인간은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서 해석된다. 내가 존재하고 내가 욕망하고 내가 살아가는 방식은 모두 너, 인간관계에서 체득했다는 걸 의미한다. 즉 나는 너다. 인간은 관계 속에 존재하지 않으면 해석될 의미가 없다. 아니 해석 자체가 불가능하다. 유태인 철학자 마르틴 부버는 ‘나와 너’에서 “‘나와 너’는 오직 온 존재를 기울여서만 말해질 수 있다. 온 존재로 모아지고 녹아지는 것은 결코 나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너’로 인하여 ‘나’가 된다. ‘나’가 되면서 ‘나’는 ‘너’라고 말한다. 모든 참된 삶은 만남이다”라고 했다. 인간은 타인의 존재 방식을 고려하지 않으면 살 수가 없다. 그러면서 인간은 자신의 존재 의미를 비로소 깨닫게 된다.여기 한 남자가 있다. 어머니의 무한대 사랑을 받고 있다
드디어 네이버가 칼을 뽑아 들었다. 그동안 말을 듣지 않았던(?) ‘쿠키뉴스’를 특별히 설정하지 않아도 네이버 메인에 노출되는 ‘기본 언론사’에서, 개개인이 설정하지 않으면 메인에 보여주지 않는 ‘선택 언론사’로 바꿔버린 것이다. 이로 인해 쿠키 뉴스는 실질적으로 네이버 메인에서 퇴출 당했다. 사실 이런 일은 언제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았다. 뉴스캐스트 오픈 초기, 네이버가 계약한 43개 언론사중 14개 언론사만 기본 언론사로 채택하겠다고 얘기할 때부터 이미 정해져 있었다고 봐도 좋겠다(현재 국민일보 제외 35개 언론사가 기본형으로 등록되어 있다.). 한마디로 말해, 네이버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단 한번도 ‘갑’의 입장에서 벗어날 생각을 한 적이 없다. 뉴스캐스트가 증명한 네이버의 위력 뉴
유람선 탄다고 쪽방촌에 햇살 비칠까 서울시가 가정의 달을 맞아 쪽방촌 주민 130명을 초청해 한강 유람선을 태워준다. 서울시는 서울의 5대 쪽방 밀집지역에서 130명을 골랐단다. 이들은 여의도 선착장에서 한강홍보선 한가람호를 타고 밤섬을 거쳐 반포대교를 둘러 본다. 왼쪽 5월6일자 31면 기사에서 서울시 관계자는 “쪽방촌 주민들이 답답한 쪽방에서 벗어나 시원한 한강을 느끼고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꿋꿋하게 살아갈 삶의 희망을 갖게 하고자 행사를 마련했다”고 밝혔다. 1년에 한번 그것도 뽑기에서 당첨된 옆방 이웃에게 듣는 한강이 얼마나 시원할까. 재개발, 재건축 지상주의로 줄달음치는 서울시가 이런 생색 한번으로 낮은 곳의 민심을 모두 보듬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닌지. 집
WHO에서 그 용어가 부적절하다 하여, 병명을 Swine Flu(돼지 독감)에서 Influenza A(H1N1)로 바꾸어 발표했다는 것은 이미 우리에게 잘 알려진 사실이다. WHO는 바이러스에 대한 연구결과, 또 그 용어의 확산이 불러일으킬 산업적 영향 등 여러 가지를 고려하여 신종 바이러스에서 ‘돼지’라는 꼬리표를 떼어주었다. 이에 즈음하여, 우리 나라를 비롯한 전 세계의 축산 농가와 산업 관련자들이 돼지(고기)와 이 병의 무관성을 강변하며, 돼지고기와의 연관성을 상기시키는 이 용어에 강하게 반발해 온 것, 나아가 WHO와 각종 연구기관에서도 돼지가 이 병의 근본적 발생처라는 확실한 증거가 없다며, 돼지고기 섭취는 절대 안전하다는 입장을 발표해 온 것, 역시 우리가 주지하는 바다. 그럼에도 필자는
조선일보에 분노하지 않은 지 꽤 되었다. 매일 들춰보지 않아서가 아니다. 조선일보가 나아져서는 더더욱 아니다. 조선일보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동아일보의 상태가 실소를 자아낼 만큼 허술해지고, 중앙일보가 때깔을 바꾸려 몸서리치고 있지만, 조선일보는 한결같다. 1등의 위용이기도 하고, 딱히 더 나빠질 것도 없이 어쩌면 정체되어 있는 양상이기도 하다. 조중동만을 놓고 상대평가를 해보자면 그래도 여전히 조선일보가 제일 감각이 낫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딱히 분노할 것도 더 날을 세울 것도 없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는 진취적 차원에서 보자면 에너지 낭비다. 조선일보의 논조는, 보도양식은 술 취한 누군가들의 귀소본능과 같은 차원의 생에 대한 의지의 문제라고 나는 믿는다. 그런 생각
시위와 축제지난 5월2일 진귀한 풍경이 목격되었다. 그날은 촛불집회가 시작된 지 1주년이 되는 날이었고, 서울시에서 그야말로 ‘야심차게’ 준비한 하이 서울 페스티벌(이하 페스티벌) 개막식이 열리는 날이었다. 서울에서 한다는 것 외에는 별 관련이 없어보이던 것들이 교묘하게 융합되는 장면이 연출되었다. 서울역에 모여 본행사를 마친 시위대는 청계광장으로 자리를 옮겨 집회를 계속 가지려 했다. 그러나 경찰은 그들을 저지했다. 마침 그 앞에서 페스티벌의 퍼레이드가 진행되고 있었고, 청계광장으로 들어가지 못한 시위대는 자연스레 ‘경찰에 떠밀려’ 퍼레이드 혹은 퍼레이드 구경꾼들과 섞여들게 되었다. 설사 시위대가 청계광장으로 가려고 했던 것이 페스티벌의 구경꾼들과 함께 하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다 할지라도, 설사 서울
지난 6일 미디어발전국민위원회가 주최한 부산공청회에 야당 추천 공술인(公述人)으로 참석했다. 그런데 이번 공청회는 준비단계에서부터 뭔가 이상했다.우선 이틀 전인 4일 오전까지 한나라당 추천 공술인들의 명단조차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그날 오전까지 발표할 원고를 보내달라고 했다.이틀 전까지 상대편 공술인 이름도 몰라미디어발전국민위 홈페이지(http://newmedia.na.go.kr)에 공청회 공지가 올라온 것도 4일 오후였다. 무릇 공청회란 ‘국민의 여론이나 전문가의 의견을 듣기 위한 공개회의’를 뜻한다. 그렇다면 사전에 충분한 시간을 두고 미리 개최사실을 알려야 한다. 명색이 국회의 사회적 논의기구라는 데에서 이런 식으로 한다는 게 이해하기 어려웠다.뒤늦게 밝혀진 한나라당 측 공술인들의 면
노무현-이명박 정권은 국민을 두려워하지 않는 점이 너무 닮았다. 4·29 재보선에서 한나라당이 시흥시장을 포함해 0대6으로 영패했다. 그런데 청와대에서 나온 반응은 지역선거라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노 정권은 집권 기간 중에 실시된 모든 재보선에서 참패했다. 그 때마다 선거결과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따위의 말로 국민심판의 의미를 일축했다. 권력중독에 걸려 마비증세를 보이더니 끝내 국민과 멀어져 비참한 종막을 내렸다. 한나라당이 아성인 영남에서 패배한 것은 충격적 의미를 갖는다. 같은 한나라당 출신이 경합한 경주에서 유권자는 친이계가 아닌 친박계를 선택했다. 당내 견제세력이 필요하다는 판단일 것이다. 울산은 현대왕국로서 차기 대선주자로 알려진 정몽준 의원의 본거지다. 그가 그곳에서 뛰었지만 허사였다
돼지들만 억울하게 됐다. 돼지독감(swine flu)라고 초기에 명명된 것과는 달리, WHO는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신종 인플루엔자가 돼지에서 비롯하지 않았다고 판단하고 공식 명칭을 변경했다. 늦은 일이다. 많은 이들은 이미 이 질병을 '돼지독감'이라고 생각하고 있다.1918~1919년 전 세계를 공포에 떨게 했던 스페인 독감의 경우도 그랬다. 스페인 독감은 스페인에서 시작되지 않았다. 하지만 스페인 독감이라고 이름 붙여졌고, 지금껏 그 이름으로 통용되고 있다. WHO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앞으로도 2009년 발병한 신종 인플루엔자는 꾸준히 ‘돼지독감’이라고 불리게 될 것이다.이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을 때, 국내 언론의 보도 태도는 기존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특히 40대 버스 운전기사 모
여론조사는 사회성원이 각종 사회적 문제나 정책·쟁점(issue) 등에 관하여 가지고 있는 신조(信條)·견해·태도·의향 등을 밝히려는 목적에서 행하는 사회조사를 말한다. 그 시초는 1800년대 미국 대선 전 모의투표였다고 하나 실질적으로는 20세기 초부터 많은 언론기관에 의해 경쟁적으로 실시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선거철이 되면 각종 기관에서 실시한 여론조사결과가 여러 언론 매체에 의해 보도되면서 선거 판세에 대한 분석 자료로 활용되기도 하고 각 정당에서는 이를 근거로 지역별, 계층별 대응 전략을 수립 또는 변경하기도 하는 등 그 위력은 막강하다. 이명박 대통령도 지난 대선 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같은 당 박근혜 후보와의 초박빙 승부에서 대선 후보로 확정되는 순간 여론조사의 덕을 톡톡히 봤
얼마 전 김연아 선수(이하 ‘선수’생략)의 과도한(?) 광고출연에 한 네티즌이 쓴소리를 했다가 인터넷 테러를 당했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한 개인으로서 김연아가 자신의 선택이 되었든 매니지먼트사인 IB스포츠의 결정에 의했든 광고에 출연한 것을 뭐라 하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별 얘기도 아닌 것 가지고 테러 수준에 가까운 비난을 했던 다른 네티즌들도 이해가 안됐다. 소녀시대가 과도한 광고를 찍는 것과 김연아가 광고 찍는 것은 똑같은 공인이자 개인의 선택문제로 볼 수 있건만, 소녀시대의 그것에는 뭐라 않고, 김연아의 그것에만 뭐라 하는 것도 다소 납득하기 어려웠다. 더불어 그걸 가지고 김연아를 건들지 말라는 식으로 테러를 하는 것도 김연아를 ‘개인’으로 보지 않고, 국가적 정체성과 동일시하는 ‘상징’
그는 부모에게 버림받았다. 할머니와 둘이 산다. 할머니는 대화의 상대라기보단 의식주의 의존대상일 뿐이다. 주로 게임을 하고 공포물을 보며 불에 타 죽는 꿈을 꾼다고 했다. 게임, 즉 가상의 공간은 그가 유일하게 자신감을 갖고 타인과 소통하는 창이다. 공포물은 관계 맺기에 미숙한 그가 꿈꾸는 상상 속 인간관계의 틀이다. 삶에서 우리는 늘 주변인들로부터 긍정적인 면은 인정을 받고 부정적인 면은 자극을 받으며 진로를 조정해나간다. 하지만 그는 실재적인 관계를 맺는 데 서툴다. 친구가 없다. 공포물은 그가 관계를 맘대로 조종하고 통제하며 관계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다고 상상할 수 있는 공간이다. 전기톱으로 사람을 살해하는 영화 장면을 반복적으로 반추하며 떠올리는 그의 상상은, 흉기 앞에서 벌벌 떠는, 그러면서 그에
한나라당이 ‘예상대로’ 참패한 재보궐 선거와, 그 선거 결과를 ‘국민의 심판’으로 겸허히 받아들인다면서도 (역사적으로 모든 집권세력들이 그랬던 것처럼) 6월 미디어관련법 강행 처리 방침과 촛불 집회에 대한 ‘폭력적 법치’ 등을 포함한 자가당착적 헛발질 처방을 내놓은 것과, 14년 만에 전직 대통령이 검찰에 불려가는 스펙터클을 헬기 부감 숏으로 감상할 수 있었던 지난 한 주는 한국사회의 지배적 풍속이 역시 ‘진부한 다이내미즘’이라는 걸 일깨운 시간이었다. 또한 지난 한 주는 생활계의 귀한 이슈나 나름 사유(思惟)가 필요한 이슈들에게는 이들 진부하거나 다이내믹한 대형 이슈들의 그림자에 가린 짙은 망각의 시간이었다.지난주, KBS에 대한 대법원 기자단의 ‘1년 출입정지’ 조치가 있었다. 기자들이 아니면 대부분
한나라당 지적대로 현 지상파 방송이 경영 위기에 직면해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소유 규제 완화로 인한 대자본 투입이 만병통치약일까? 지상파 방송사 경영 위기는 외부적으로는 광고시장 침체로 인한 지속적인 광고매출액 감소, 내부적으로는 디지털 전환으로 인한 제작비의 증가 등으로 인해 비롯되었다. 또한 세계적인 경제 위기와 함께 다매체 다채널 시대에서 유료매체와의 경쟁구도 등 보다 구조적인 문제에서 비롯된 것으로 파악해야 한다. 무엇보다 방송은 여론 형성에 기여하고 국민의 알권리를 보호한다는 점에서 산업적인 시각보다 공익적인 시각으로 바라봐야 한다. 방송사 경영 안정화도 좋다지만 단순히 소유·진입 규제 완화로 대자본이 투입되면 핑크빛 미래를 가져다 줄 수 있다는 식의 낙관적인 기대만으로는 개
정치적인 의미의 ‘시민’이 급진적 주체로 활약하는 시대는 지났다고 여겨졌다. ‘민주화의 민주주의’란 문제의식은 결국 시민 개념의 재규정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아파트와 같은 자신의 영역이 생긴 ‘시민’은 필연적으로 보수적일 수밖에 없는 중립의 영토에 안착하는 것처럼 보였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정치적 존재로 살아가기엔 경제적 자산의 규모가 너무 커졌고, 급진적 주체성을 행사하기 위해 포기해야 할 편안함은 너무 달았다. 결정적으로 MB의 당선은 얼마 남지 않은 정치적 시민마저 경제적 시민으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상징적 선택으로 받아들여졌다. 물론, 그 선택이 그릇된 우상의 숭배였다는 것이 판명나기까지 채 100일의 시간도 걸리지 않았지만. MB 시대가 불행하다면, 그 이유는 사소한 것부터 체제적인 것까지
전통적으로 한국 축구팬들이 한국과 중동국가가 축구 경기를 할 때 걱정하는 것이 있다. 중동 선수들의 기술이나 능력이 아니라 그들의 침대축구 기술이다. 침대축구 목적은 오롯이 승리다. 그들은 이기고 있거나 유리한 스코어에 있을 때 시간만을 끌기 위해 아프지 않은데도 일부러 그라운드에 드러눕는 행위 등을 하곤 한다. 침대축구는 멋진 플레이로 팬들에게 축구의 즐거움을 보일 필요가 없다. 시간만 지나면 결국 이기기 때문이다. 이들에겐 축구 팬이 없다. 이에 중동 팬들로부터도 비판을 사는가 하면 심지어 축구 자체를 싫어하게 만들기도 한다. 현재 침대축구 기술이 미디어위에서도 구현되고 있다. 해당 팀은 미디어발전국민위원회의 여당 측 위원들이다. 미디어법은 이미 표결 처리하기로 정치권이 합의했다. 머리수에서 많은 한
갈 길 바쁜 미디어발전국민위원회가 정당 추천이라는 태생적 한계와 국민위원 개인기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구조로 인해 자칫하면 남은 50일 동안 제자리걸음을 반복할 가능성이 커 보인다. 위원회가 출범 50일을 넘기면서, 다양한 의견수렴을 위해 주제별·지역별 공청회를 시작했고, 내부적으로 주제별 분과회의를 통해 위원들 간의 숙의의 시간을 갖는 등 큰 흐름 속에서는 무리 없이 진행되고 있는 듯 보인다. 그러나 한나라당 추천 위원들의 경우 애초에 한나라당이 내놓은 개정안보다 강한 규제완화를 주장하기도 하고, 국민위원으로서 법안의 긍정적, 부정적 폐해를 함께 고려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특정 언론사와 특정 정권에 대한 고집스런 편향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여론수렴을 통한 합의의 장으로 기능해야 할 국민위원회에 대
1. 칼은 펜보다 강했다. 촛불 1년, 이명박 정부의 일등 공신은 단연 검찰과 경찰이다. 대부분의 정치·사회적 이슈들이 검·경의 수사라는 깔때기를 거치면서 법과 질서의 문제로 축소되고, 근본 가치와 논의의 생산적 핵심이 왜곡되고 있다.수가기관인 검·경의 전가의 보도는 두 가지다. 공권력으로 뒷받침되는 ‘법 해석’과 ‘사실 확정’이 그것이다. 팩트와 해석의 생산은 언론의 역할이기도 하지만, 언론이 생산하는 팩트와 해석에는 수사기관과 같은 공권력이 뒷받침되지 않는다. 언론과는 달리 법원 판결의 사실과 해석에는 집행력이 부여되지만, 그 힘은 사건 이후의 사후적인 것이다. 법원 판결에는 칼 맞은 이후 갑옷을 내주는 때늦음이 있다. 기본적으로 칼은 펜보다 강하고, 빠르다. 오늘을 비판적으로 기록하고 평가하려는
새롭고 낯선 것, 익숙하지 않은 것에 대한 두려움이 많은 사람은 분명 용기가 없는 사람이다. 용기는 두려움을 극복해야 생긴다. 용기 있는 사람은 두려움 없는 사람인가? 아니면 둘 다 동시에 이뤄지거나……. 꽤나 진지하게 생각한 건데 글로 옮기고 보니 말장난 같다. 내 경우 용기도 없고 두려움도 많다. 그러니 새롭고 낯선 것, 익숙하지 않은 것에 대한 부담과 압박이 크다. 이를 극복할 신념 같은 건 더더욱 없다. 신념을 갖고 용기를 내는 것은 정말 더 큰 용기가 필요하다. 무언가 ‘신내림’같은 확신이 들기 전에는. 전주국제영화제가 올해로 10돌을 맞았다. 4월 마지막 날 성대한 개막행사가 열렸다. 전주국제영화제 민병록집행위원장은 인사말에서 ‘흰머리가 늘었을 뿐이고, 주름살이 늘었을 뿐’이라며 특유의 유머를
메이데이마다 옷 벗는 남녀 한국 신문은 해마다 메이데이만 되면 비키니만 걸치고 인공폭포 아래서 물장구치는 여성 모델을 등장시킨다. 이런 버릇은 여러 해 계속됐다. 올해도 여지없이 메이데이 전야제가 열리는 4월30일자 도하 여러 일간지에 물보라치는 파도와 폭포 속 남녀의 시원한 사진이 실렸다.경기도 용인 에버랜드 캐리비언 베이 인공 파도 풀에서 남녀가 즐기는 사진이다. 이 파도 풀은 매년 5월1일 개장을 앞두고 늘 4월 말에 여성 모델과 남자 직원들을 동원해 홍보용 연출사진을 찍을 기회를 여러 신문에 제공한다. 대재벌의 계열사 상업광고를 매년 신문에 싣는 이들에게 언론의 공공성은 어떤 의미일까. 신문들은 이런 쓰레기 같은 상업광고를 사진보도라는 이름으로 실으면서 붙이는 ‘사진설명’은 압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