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인 의미의 ‘시민’이 급진적 주체로 활약하는 시대는 지났다고 여겨졌다. ‘민주화의 민주주의’란 문제의식은 결국 시민 개념의 재규정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아파트와 같은 자신의 영역이 생긴 ‘시민’은 필연적으로 보수적일 수밖에 없는 중립의 영토에 안착하는 것처럼 보였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정치적 존재로 살아가기엔 경제적 자산의 규모가 너무 커졌고, 급진적 주체성을 행사하기 위해 포기해야 할 편안함은 너무 달았다. 결정적으로 MB의 당선은 얼마 남지 않은 정치적 시민마저 경제적 시민으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상징적 선택으로 받아들여졌다. 물론, 그 선택이 그릇된 우상의 숭배였다는 것이 판명나기까지 채 100일의 시간도 걸리지 않았지만.

MB 시대가 불행하다면, 그 이유는 사소한 것부터 체제적인 것까지 별의별 걸 다 들 수 있겠지만, 어쩌면 별다른 것도 없는 것이 바로 이 지점만 설명하면 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MB가 철없는 시대의식의 잘못된 반영이었다는 점 말이다. MB는 도도했던 시대의 ‘믿음’에 단순하고 과격하게 맞서고 있다. 당선되자마자, 이미 상당 부분 해결되었다고 믿어졌던 정치의 문제부터 들고 나왔다. 그것은 이전의 지배체제들이 애써 구축한 중립의 영토를 별거 아닌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선택이었다.

MB가 당선 이후 보인 일련의 태도들은 시민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결론만 말하자면, 어쩔 수 없이 다시 예전의 정치적 시민으로 돌아가야 했던 어정쩡한 상황이었다. 이렇듯 평범한 이들에게 다시 정치적 시민의 급진성을 부여하는 ‘퇴행’(!)의 문제야 말로 MB 체제의 결정적 무능력이었다. 말하자면, 지난해 촛불은 새삼스럽게 시민됨의 위상을 다시 확인하는 정치적 체험이었다.

그 상황은 해소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실제 촛불의 여부와 상관없이 시민의 정치적 의미에 대한 논쟁은 아직도 유효하다. 아직 올해 촛불이 어떻게 진행될지는 미지수이다. 경찰을 비롯한 지배 체제의 완력을 꺾을 획기적 방법도 아직은 마땅치 않아 보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현재의 상황이 과도기적 순간인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아무래도 MB는 아니다’는 잠재되어 있는 정치적 시민성과 ‘먹고 살기 팍팍하다’는 가시적인 경제적 시민성 사이의 상황적 모순은 언젠가 반드시 어떤 방식으로건 폭발할 수밖에 없다. MB가 문화적 통치가 아닌 공안적 통치를 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더욱 그러하다.

그렇다면 들불이 될지도 모를 분노가 잠재되어 있는, 과도기 상황에 유효한 지배 전략은 무엇일까? 지금, MB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물론, 자전거도 답이 될 수 있다. 근육을 움직여 바람을 맞는 순간만큼은 모든 것이 잊혀진다. 그러나 그건 잠깐이다. 4년은 긴 시간이다. 자전거로는 부족하다.

가장 효과적인 지배 전략은 언제나 정공법이다. 시민이라고 하는 평면적 호명이 분리될 것을 두려워하기보단 적극적으로 위계화시켜 분리해내는 것, 바로 그것 뿐이다. 위계만 각인시킬 수 있다면, 분리는 두려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분노를 관리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활용은 입맛에 따라 양방향 모두에서 가능해진다는 점에서 탁월한 선택이다. 필요에 따라서 절대 다수의 시민을 먼저 부를 수도 있고, 경우에 따라선 소수의 시민을 먼저 주목하는 방식도 있을 수 있다. 의지에 따라 다수의 의사와 친화하는 방식과 소수의 선명함을 부각시키는 방식을 적절히 활용하는 것이 핵심적 기술이다.

오늘(5월4일) 조선일보는 “시위대가 망쳐버린 ‘서울의 주말’”을 1면 헤드라인으로 뽑았다. 반면, 중앙일보는 “자전거, 5년 내 세계 3위로”, 동아일보는 “김만복, 노에 건호 돈 흐름 보고했다”를 뽑았다. 앞서 말한, 지배 전략의 측면에서 수준의 차이가 느껴지는가? 삼성이 밀어주는 중앙일보와 정권이 밀어주는 동아일보를 제치고 어떻게 조선일보가 여전히 1등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시민’을 위계화시켜 기사에 반영하고, 욕망을 분리해내는 감각은 단연 조선일보가 탁월하다.

▲ 조선일보 5월4일자 1면.
오늘 중앙일보의 헤드라인은 징검다리 휴일이라는 현실의 상황에는 존재하지 않는, 이상적 현실에 대한 설명이었다. 지향적으로 어떨지는 모르지만, 절대 체감되진 않는 호들갑이었다. 그리고 누가 봐도 결정적 하자는 그 설명이 허황된 목표라는 점이다. 중앙일보의 의도가 무엇인지는 알겠는데, 지능적 안티처럼 그렇잖아도 문제인 MB의 몹쓸 스타일만 부각시켰을 뿐이었다.

▲ 중앙일보 5월4일자 1면.
동아일보의 제목은 따로 따로 코멘트 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다. 이쯤 되면 징검다리 휴일이라는 상황에 대한 감각도, 시민이라는 존재의 양면성에 대한 이해도 전혀 없는 재앙 수준의 정파지라고 해야 할 것이다. 동아일보는 수개월째 증오를 레퍼토리로 하는 철지난 장사에 집착하고 있다. 철지난 장사에 집착하는 장사꾼들의 말로가 어땠는지는 동아일보가 더 잘 알 것이다.

▲ 동아일보 5월4일자 1면'
모처럼의 징검다리 휴일은 정치적으론 메이데이에서 촛불 1주년으로 이어지는 정국이다. 조선일보는 휴일과 일련의 정치적 일정이 붙어 있는 것에 착안해, 지배체제의 공고함을 다지는 해법을 제시했다. 시민을 위계화시키고 분리해내는 조선일보만의 핵심적 기술이다.

휴일을 맞아 사람들이 너무 많이 쏟아져 나왔다. 시위대가 없어도 어디든 불편했다. 하이서울페스티벌뿐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당연히 이유는 여러 가지이다. 행사의 미숙함, 교통 체증, 볼거리 부족, 바가지요금 등 가지각색이다. 어쩌면 욕망의 문제가 대개 그러하듯, 그 불편하다는 감정 자체가 복잡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유와 대상을 명확하게 하기 어렵다는 공통점 외엔 철저히 제각각이다.

그러나 이 모든 불편함을 조선일보는 간명하게 설명했다. 1년에 딱 한번 뿐인 황금연휴, 우리들의 주말을 망쳐버린 이유는 모두 ‘시위대’ 때문이라고 연결지었다. 불과 1300명밖에 안 되는 시위대가 사회에 ‘막대한 피해’를 일으켰다고 선동했다. ‘불편했던 당신, 1300명은 아닌 당신’이라면 누구도 공감할 수 있는 구조를 짜고, 분노를 표출할 대상을 제공하여 사회의 복잡한 모순을 단숨에 무력화시키는, 절정의 선동 전략이다.

언젠가 썼었다. 원건 원치 않건 정파적 이해관계에 따라 배치되어 있는 국내 미디어 환경에서 가장 중요한 생존 전략은 위무(慰撫, 위로하고 어루만져 달램)일지도 모른다고. 미디어가 상품이라면 정파성을 떠나 조선일보처럼 분명해야 한다고 말이다. 세상을 왜곡하는, 필요한 것만 달래주는 조선일보의 진화가 예사롭지 않은 5월이다. 징그럽기까지 하다. 문득, 궁금해진다. 이에 맞서는 우리의 열정과 상상력은 어디쯤 와 있는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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