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칼은 펜보다 강했다. 촛불 1년, 이명박 정부의 일등 공신은 단연 검찰과 경찰이다. 대부분의 정치·사회적 이슈들이 검·경의 수사라는 깔때기를 거치면서 법과 질서의 문제로 축소되고, 근본 가치와 논의의 생산적 핵심이 왜곡되고 있다.

수가기관인 검·경의 전가의 보도는 두 가지다. 공권력으로 뒷받침되는 ‘법 해석’과 ‘사실 확정’이 그것이다. 팩트와 해석의 생산은 언론의 역할이기도 하지만, 언론이 생산하는 팩트와 해석에는 수사기관과 같은 공권력이 뒷받침되지 않는다. 언론과는 달리 법원 판결의 사실과 해석에는 집행력이 부여되지만, 그 힘은 사건 이후의 사후적인 것이다. 법원 판결에는 칼 맞은 이후 갑옷을 내주는 때늦음이 있다.

기본적으로 칼은 펜보다 강하고, 빠르다. 오늘을 비판적으로 기록하고 평가하려는 ‘펜의 노력’이 분주했지만, ‘칼의 노래’를 막을 수는 없었다. 그것이 언론이든, 판결이든 ‘펜’은 매번 너무 늦거나, ‘칼’ 자체를 겨냥하지 못했다. 사실을 확정하고, 법을 적용하는 수사단계에서, 통제되지 않는 검찰과 경찰의 자의적 권력은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비수가 되고 있다. ‘정치검찰’은 이제 명실상부한 ‘정치’ 그 자체다. 우리 시대의 민주주의가 검·경 각본의 무대 위에 상연되는 꼭두각시 인형놀이가 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진지한 질문이 필요한 때이다.


2.

촛불 정국에서 검찰은 먼저 ‘법 해석’의 칼을 뽑아들었다. 정연주 전 KBS 사장의 배임혐의, MBC <PD수첩>의 광우병 보도, 광고주 불매운동, 유모차 엄마에 대한 아동학대죄 적용 여부, 미네르바의 ‘허위 사실 유포’에 이르기까지. 검찰은 그야말로 놀라운 창의력(?)으로, 정치적 법 해석의 새로운 국면을 열었다. 하나같이 뜨거운 논란이 되었지만, 과잉해석으로 인한 논란의 점화 그 자체가 이미 기획의도의 하나이기 쉽다.

위와 같은 검찰의 자의적·권력적 법 해석에 대한 견제는 주로 법률가 집단 내부에서 주도적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여러 진보적 법학자들과 변호사들이 문제를 제기했고, 최근 미네르바 사건에 대한 법원의 판결이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검찰의 공격적인 법 해석으로 인한 시민들의 학습효과는 판결 이전의 문제다. 최종적인 판단에 이르기까지 ‘시간의 정치’는 결코 민주주의에 우호적이지 않다. 대법원 판결 시점이 되면, 논의의 생명력인 현재적 의미가 탈색되고, 결국 법원의 최종적 판결은 회고적 평가에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3.
반면에 촛불 정국 이후의 사건들에서 검·경은 ‘사실’(팩트)을 재단하는 칼을 뽑아들고 있다. 용산참사, 장자연 리스트, 박연차 리스트 사건에서, 사실을 선별해 법적 팩트로 확인하는 재량적 권한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철거민들의 사망 원인, “○○일보 ○ 사장”, 박연차 세무조사의 정치권 연루 등 관련 의혹들은 수사절차상의 유의미한 팩트로 확정되지 않았다. 모두 이른바 ‘살아있는 권력’과 관계된 의혹들이다.

시민들의 의혹이 높은 이 사건들에서, 검찰과 경찰에 의해 일방적으로 ‘정의’(define)된 팩트’(fact)가 법의 정의(justice)로 확인될 것이라는 우려가 높다. 수사기관에 의해서 사실로 확정되지 않고, 버려진 의혹들은 법원의 판단 대상이 되지 않는다. 재정신청과 특검이라는 제도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 특별한 검(劍)은 좀처럼 칼집에서 꺼내기가 어렵다. 또 ‘모두가 한몸’이라는 검사에 의해서 수사와 기소 여부가 다시 결정되는 재정신청은 종전의 결론을 되풀이하는 ‘빛 좋은 개살구’이기 쉽다. 이제 수사권에 대한 제도적 통제는 우리 사회 민주주의의 핵심 쟁점이 되었지만, 아직은 논의의 시작 단계에 불과하다.

그래서 수사기관의 일방적인 팩트 선별과 생산에 대한 견제는 기본적으로 언론의 역할이다. 검·경의 자의적 수사를 통제하고, 움직이는 것은 의혹이 아니라 팩트다. 취재로 드러난 팩트로 수사상의 팩트를 견제하려는 노력이 함께하지 않는 한, ‘한 점 의혹 없는 수사’를 주문하는 것은 공허한 말에 그치기 쉽다. 언론은 수사의 사실이 아닌, 취재의 진실을 알릴 권한과 의무가 있다. 수사기관에 의해서 버려진 의혹들을 질기게 붙잡고, 먼지를 털어내는 언론의 승부 근성이 필요하다.

지난 4월30일 MBC <뉴스후>의 장자연 리스트 수사 관련 보도는 그런 점에서 빛났다. 경찰의 일본 현지 수사를 따라가며 부실한 수사의 문제를 명확하게 보여주었다. 조금만 더 빨리 취재가 이루어졌다면, 경찰 수사가 그렇게 쉽게 일단락되지는 못했을 것이라는 아쉬움은 있다. 또 용산참사 초기에도 몇몇 언론이 수사 발표와는 다른 취재상의 팩트를 드러냈었다. 그 팩트들이 현재 용산사건 공판 법정에서 검찰과는 다른 법 논리를 전개하는 변호인들의 중요한 무기가 되어있을 것이다. 다만 아쉬운 것은 공판이 진행되는 현재, 검찰 수사기록 1만여 쪽의 팩트와 경쟁하는 새로운 팩트들의 후속 취재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시간이 흘러야 먼지를 벗고 드러날 수 있는 사실도 있다. 수사기관과는 다른 언론의 한계들이 있겠지만, 팩트로 말하고, 팩트를 통해 사회적 소통을 만드는 언론 고유의 힘을 조금 더 질기게 가져갔으면 하는 부탁이다.

용산 참사 100일이 지났고, 장자연씨의 죽음은 49재를 넘겼다. 시민들의 관심이 희미해져가는 때 일수록, 의혹이 있는 곳에 언론의 집요함이 계속되기를 바란다. 그것은 “○○일보 ○ 사장”의 빈칸을 채우는 것보다 백만배는 더 가치 있는 노력일 것이다. ‘칼의 팩트’와 당당하게 경쟁하는 ‘펜의 팩트’를 기대해 본다. 철학자 김영민의 인문학에 대한 당부를 언론에 전한다. “펜이여, 칼같은 승부근성을 배워라!”

세상과 사람을 배우는 즐거움으로, 자칭 인권변호사 생활을 하고 있다.
아직, 법을 통한 실천보다는 법에 대한 실천이 더 중요하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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