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윤광은 칼럼] 갓더비트의 두 번째 활동은 성적이 좋지 않다. 갓더비트(GOT the beat)는 보아에 더해 SM엔터 걸그룹 세 팀 소녀시대, 레드벨벳, 에스파 멤버들이 뭉친 프로젝트 그룹이다. 작년 ‘Step Back’으로 등장했을 때는 신선하다는 호평이 나왔고 MV, 음원 다 반응이 좋았다. 이번 ‘Stamp On It’은 MV, 음원 모두 홀대받았고 앨범까지 냈지만 초동 음판 9만 5천 장에 그쳤다. 각 그룹 팬덤은 이 프로젝트가 정례화되는 것보다 각자의 활동에 집중해 주기를 바라는 것 같다. 이해가 가고 정당한 바람이다. 다만 수면 아래에서 의미심장한 목소리가 부글거리는데, 신인급인 에스파 멤버들이 나이 많은 선배들과 어울리며 이미지가 닳고 낡는 것에 신경질을 내는 팬들이 보인다.

의미심장하다고 한 것은 갓더비트를 향한 저 목소리들이 시급한 질문을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여자 아이돌에게 ‘나이’는 무엇일까? 이 몇 년 동안의 케이팝 산업의 변화를 하나만 꼽으라면 나는 여자 아이돌 활동 수명 장기화를 꼽겠다. 걸그룹의 활동 정년은 남자 아이돌보다 짧다. 케이팝 시대가 본격화된 00년대 후반 이후 데뷔한 주요 걸그룹은 소녀시대 정도를 빼면 실질적 활동 기간이 4~6년에 머물렀다. 반면 2010년대 중반 데뷔한 주요 걸그룹은 대부분 아직도 활동하고 있다. 데뷔 9년 차가 된 트와이스는 재계약을 발표했고, 레드벨벳‧블랙핑크도 계약기간 7년을 채운 상황이지만 컴백을 이어왔다. 동 시기 데뷔한 걸그룹들이 나란히 롱런하는 건 케이팝 역사상 볼 수 없었던 광경이다.

SM엔터 여성 유닛 갓 더 비트 [SM엔터테인먼트 제공]
SM엔터 여성 유닛 갓 더 비트 [SM엔터테인먼트 제공]

이건 모든 차원의 변수가 작용한 현상이다. 콘셉트적으론 2010년대 후반부터 성숙한 여성상, 걸크러시가 트렌드가 됐고, 사회적으론 여성주의가 부상해 트렌드 변화의 배경화면이 되었다. 산업적 차원에선 걸그룹 사업 모델이 대중형에서 팬덤형으로 바뀌었고, 국내에서 해외로 시장이 전면 확대됐다. 대중형 사업은 변화하는 시류를 타야 하지만 팬덤은 강한 애정과 결속력으로 아이돌과 오랫동안 동행한다. 해외에서 케이팝은 대중형이 아닌 팬덤형 산업에 가까우며 걸크러시에 대한 선호도가 높다. 2010년대 중반 데뷔한 그룹들은 걸그룹 해외 팬덤 시장을 스스로 확장해 갔고, 활동이 장기화되며 콘셉트를 교체하기도 했다. 각 기획사 차기 걸그룹 라인은 간헐적으로 이어질 뿐 오랫동안 다음 세대가 도래하지 않았다. 이 공백기가 작년까지 지속되면서 이전에 비해 세대교체 주기가 길어진 것이다.

현재 걸그룹 시장은 이원화돼 있다. 국내에선 무더기로 쏟아진 신인 그룹들이 트렌드를 가져가며 세대교체가 진행되고 있지만, 해외 시장은 이전 세대 그룹들에게 기득권이 있다. 2022 MAMA 팬 초이스 투표 결과를 해외 팬 화력의 척도 삼아 보자면, 트와이스‧블랙핑크가 에스파‧아이브‧르세라핌보다 10배가량 득표가 많다. 특히 서구와 일본에서 블랙핑크와 트와이스의 입지는 신인들에 비해 확고하다. 이건 팬덤 중심의 해외 시장과 코어 팬 시장이 퇴화하고 다시 ‘대중성’ 중심으로 재편된 국내 시장의 성질 차이에서 기인한다.

국내 걸그룹 팬덤은 이제 라이트 팬덤 중심이다. 원래 남성 팬덤은 걸그룹에게 얕은 관심을 가지고 관심이 빨리 식지만, 여성 팬덤은 충성도가 높고 오래간다는 속설이 통용되었다. 하지만 걸그룹 팬덤이 여초화된 현재, 여성 코어팬 숫자가 그만큼 늘었는지는 대답하기 힘들다. 오히려 케이팝 팬덤 주류인 보이그룹 팬덤이 걸그룹 팬덤으로 ‘양다리’를 걸친 채 유입하며 다수 신인 걸그룹에게 돌아가며 흥미를 품는 ‘간잽’ 문화가 형성됐고, 이들은 여성 팬덤이지만 라이트 팬덤 성향이 강하다고 봐야 할 것 같다. 그래서 기획사들은 얕고 넓은 관심을 얻는 방향으로 뱃머리를 선회하고 있고, 이것이 언젠가 말했듯 대중성이 분해돼 가는 시대에 ‘유사 대중성’을 얻는 마케팅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 흐름은 필연적으로 성별과 세대를 아우르며 팬덤을 유입시켜야 하고 이슈 개방성이 높은 ‘남초 커뮤니티’의 라이트한 남성 소비자를 껴안을 수밖에 없다.

걸그룹 블랙핑크 [YG엔터테인먼트 제공], 에스파 [SM엔터테인먼트 제공], 르세라핌 [쏘스뮤직 제공], 아이브 [스타쉽엔터테인먼트 제공=연합뉴스]
걸그룹 블랙핑크 [YG엔터테인먼트 제공], 에스파 [SM엔터테인먼트 제공], 르세라핌 [쏘스뮤직 제공], 아이브 [스타쉽엔터테인먼트 제공=연합뉴스]

10년 전 걸그룹의 대중성이 남성 대중의 관심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면, 지금의 ‘대중성’은 여성 팬덤에 기반을 둔 채 케이팝에 일정한 관심도가 있는 남성 팬덤을 공략하는 것이다. 이 흐름을 주도하는 것은 뉴진스다. 뉴진스는 케이팝 여성 팬덤 사이에서의 민희진 대표의 명성을 자산으로 여성 팬덤을 사로잡으며 데뷔했지만, 이번 컴백에선 3040 남성의 향수를 어루만지는 콘텐츠를 내놓고 2030 남성이 선호하는 유튜브 방송과 콜라보했다. 뉴진스가 남성 취향과 공명하는 또 다른 매력은 ‘어리다’는 것이다. 다른 신인 걸그룹들은 나이가 어림에도 걸크러시로 획일화돼 있기에 ‘어리다’는 느낌이 충분히 들지 않았고 남성 팬 취향과 거리가 있었다. 그렇기에 신인 그룹의 홍수에도 불구하고 이전 세대 그룹들의 지위가 방어가 된 면이 있다. 뉴진스는 전원 10대 멤버로 데뷔했고 앳되고 순수하고 귀엽다. 이건 전통적으로 남성들이 선호하는 걸그룹의 스테레오 타입이기도 하다. 여성 취향의 예쁜 아트웤과 남성 취향의 콘텐츠 구성, 주도적이지 않지만 수동적으로 매달리진 않는 여성상, 이것이 뉴진스의 매무새다.

뉴진스가 국내시장에서 선도하는 흐름은 성숙한 여성상의 퇴조와 여성 취향과 남성 취향의 믹스, 그를 통한 남성 취향의 복권이다. 만약 뉴진스가 게임의 규칙을 바꾸고 있다면 이런 지점이다. YG 차기 걸그룹 베이비 몬스터는 YG 그룹답게 걸 크러시 콘셉트일 것으로 보이지만,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역시 ‘어리다’는 점이 정체성 중 하나일 것 같다. 세대교체 주기와 맞물린 흐름 속에 케이팝 신의 여성상이 어떻게 다시금 변화할지, 다른 신인 그룹들은 어떤 영향을 받을지 지켜볼 가치가 있다. 3세대 그룹들은 여전히 상업적 경쟁력이 있지만, 그들이 롱런하게 된 기반을 침식하는 조류를 맞게 된 셈이다. 그들의 해외 팬덤이 쉽게 쓸려가지 않겠지만, 해외에서 소비하는 콘텐츠를 제작하는 국내 케이팝 신에서 존재감이 밀려나는 건 긍정적 변수일 수는 없다.

뉴진스 [어도어 제공=연합뉴스]
뉴진스 [어도어 제공=연합뉴스]

어린 여성에 대한 선호는 남성적 욕망에 입각한, 여성의 나이에 대한 대상화다. 이 점에서 걸 크러시 콘셉트가 케이팝 신에 준 성정치적 변화는 역행을 맞을 수 있지만, 저건 남성들만의 욕망은 아니다. 어떤 여성 팬들도 어리고 새로운 여자 아이돌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소위 ‘4세대’ 개막과 함께 쏟아지는 ‘신상’에 호기심을 품었고 이것이 걸그룹 팬덤이 여초화된 또 다른 배경인 것 같다. 글머리에서 말한 갓더비트를 향한 원성 역시 이런 정서와 이어져 있다. 이건 주체적 여성상을 소비하는 어떤 이들의 마음속 모퉁이에 사실은 그와 배리되는 관념이 웅크리고 있다는 뜻이다. 여성 아이돌은 군대를 가지 않는다는 점이 남성 아이돌에 대한 사업적 장점으로 거론되지만, 여성 아이돌이 남성 아이돌만큼 사업성이 없는 이유 중 하나는 수명이 더 짧다는 점이다. 걸그룹 산업의 팬덤화와 활동 수명 장기화는 그 갭을 일정 부분 메운 디딤돌이었지만, 그 디딤돌엔 약하게 금이 가고 있다.

대중은 변덕스럽고 어리다는 것이 콘셉트가 되면 더 이상 어리지 않게 되었을 때 정체성이 조난당한다. 국내 케이팝 소비자들은 자신이 사랑하는 그룹의 장기적 생명력을 갉아먹는 방식으로 그들을 소비하고 있다. 그래도 상관없을 것이다. 언젠가 또 다른 ‘신상’이 나오면 ‘간잽’을 하러 떠나면 그만이니까. 이 한 줄의 문장에 현재 걸그룹 산업이 품은 자기 파괴의 씨앗이 숨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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