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윤광은 칼럼]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나희덕의 시를 비평하며 시의 서정성을 이렇게 정의한 적 있다. “‘너무 빨리’가 세상의 시간이고 ‘너무 늦게’가 나의 시간”일 때 그 시차가 서정이다. 세상과 타인과의 조우의 실패가 빚는 “엇갈림과 사무침의 화석”이 시라는 말이다. 이 말을 가져와 다른 분야에 잇대어 보면, 00년대 한국 힙합의 시차도 세상보다 내가 느린 것이었다. 거기에서 오는 자조와 내일을 향한 기약이 지배적 정서였다면, 2010년대 이후 한국 힙합은 세상보다 내가 빠르다고 말한다. 세상의 시간보다 빠르게 성공을 이뤘고, 남보다 빨리 이 사회 꼭대기에 올라왔다. 이것이 힙합의 전통적 관습 중 하나인 ‘자기 과시’의 시차다. 그리고 케이팝에서 이것과 동일한 시차를 가진 것이 ‘걸 크러시’다.

실제로 케이팝의 걸 크러시는 가사와 스타일적 요소를 힙합에서 가져오고 성별을 반전한 성격이 있다. 그것은 이러한 양식을 선도적으로 시도한 YG, JYP 같은 기획사가 힙합에 음악적 뿌리를 두고 있거나 콘텐츠 제작에 미국 힙합을 참조해 왔다는 배경 사실과 관련이 있다. 물론 힙합은 지극한 남성적 장르다. 여성들이 걸 크러시에 기대하는 정서와 지향점은 그것과 배치되는 부분이 많다. 다만, 힙합의 스웨거가 나의 멋과 삶을 뽐내는 태도라고 할 때, 자기애와 자신에 대한 긍정 같은 가치를 확신하는 태도인 측면이 있다. 여자들 역시 자신을 내세울 자격이 있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말하고 싶다. 그런 해방감을 안겨 주는 것이 멋지고 자신감 넘치는 태도로 구성된 유형의 걸 크러시라는 말이다.

블랙핑크 정규 2집, 타이틀곡은 '셧 다운' [YG엔터테인먼트 제공], 에스파 컴백 라이브 포스터 [SM엔터테인먼트 제공]
블랙핑크 정규 2집, 타이틀곡은 '셧 다운' [YG엔터테인먼트 제공], 에스파 컴백 라이브 포스터 [SM엔터테인먼트 제공]

여기서 따라오는 질문이 있다. 그렇다면 그 시차가 과연 정확한가. 나는 정말로 세상보다 앞서 있는가? 래퍼로서의 캐릭터와 현실에서의 삶이 일치하는지 캐묻는 것이 역시 힙합의 전통적 관습인 ‘진정성’이다. <쇼미더머니>에 막 출연한 무명 래퍼가 부와 명예를 이뤘다고 으스대도 믿어 줄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아가서, 힙합이 제공하는 자기 과시의 쾌감과 그것을 들으며 자신을 이입하는 사람들이 사는 현실과의 시차를 물을 수 있다. 나는 이 점에서 한국 힙합은 계층 이동이 어려워진 현실에서 여전히 자수성가가 가능하다는 믿음을 재생산하며 젊은 세대 사이에서 사회에 관한 보수적 이데올로기를 구성한다고 지적한 적 있다(자기 계발 담론의 보호구역이 된 한국 힙합).

한국 여성들의 현실도 걸 크러시와 시차가 있다. 그들의 사회적 처지는 아직 노래가 표현해주는 여성상만큼 주체적이지 않다. 하지만, 이것이 현실을 속이는 이데올로기로 빠지지 않는 건 노래를 듣는 사람들이 이미 현실과의 괴리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케이팝을 포함해 문화 산업에서 여성들의 바람이 투영된 콘텐츠가 우세해진 건 문화계 전반에서 여성의 주체성이 소외돼 있다는 인식에서 비롯한 것이다. 그 저변에는 현실에 대한 각성이 있고, 그것을 변화시켜 나가는 실천으로서 남성적 시각으로 왜곡되지 않은 여성상, 남성들처럼 주도적인 여성상을 마련해 달라는 요구가 대두한 것이다. 즉, 한국 힙합의 자기 과시가 창작자들이 수입해 유행시킨 관습이라면, 걸 크러시 유행은 기층에서부터 소비자들이 일궈낸 성격이 있다.

걸 크러시란 말이 유행하기 시작한 것도 벌써 오 년, 육 년이 지났다. 걸그룹 산업이 여성향으로 바뀐 현실과 맥락이 의미가 있기 때문에 이 말을 쓰고 있지만, 이제 따로 지칭하는 말이 필요가 없을 만큼 여성향 걸그룹은 케이팝의 메인스트림이 되었다. 여성 아이돌 팬덤이 여초화 되었다는 사실 자체보다 그 상태가 보편성을 얻은 상황에 주목하는 것이 논의의 전환을 이끌어 줄 수 있다. 여전히 이 산업에 남성 팬덤도 존재하지만 그들 역시 여성 취향을 반영한 콘텐츠를 더 이상 불평하지 않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 소비하고 있다. ‘걸 크러시’가 남성 취향 콘셉트의 대항마를 넘어 성별 취향을 불문하는 보편 양식이 된 상태에 주목하고 그것이 어떤 파급 효과를 내고 있는지 봐야 한다는 뜻이다.

걸그룹 뉴진스 [어도어 제공=연합뉴스]
걸그룹 뉴진스 [어도어 제공=연합뉴스]

영화이론가 로라 멀비는 영화에서 시각적 쾌락이 ‘남성적 응시’(male gaze)와 여성의 보여짐이란 구조를 재생산한다고 설명한 바 있다. 근래 여성 아이돌 산업에서 일어난 큰 변화는 남성적 응시의 퇴출이다. 남성의 욕망으로 바라보는 여성은 그 시선을 반영하는 수동적 대상으로 재현되기 쉽다. 여성 팬들은 응시의 대상이 아니라 주체로서 세상과 자아를 바라보는 캐릭터를 욕망한다. 이런 차이는 서사나 세계관은 물론 시각적 콘셉트에서부터 갈리기 마련이다. 여성 팬들은 걸 크러시가 섹시 콘셉트로 전치되는 것에 강한 거부감이 있다. 같은 신체 노출 의상이라 해도 결의 차이를 감지하고 선정성이 있을 때 항의하기도 한다. 적극적 피드백을 통해 자신들의 시각과 취향으로 산업의 표준을 재구성했는데, 한국을 나타내는 대명사 중 하나인 케이팝 신에서 어느덧 '여성적 응시'가 남성적 응시를 대체하는 일상적 감각이 된 것이다.

케이팝의 연대기를 떠올려 보면, 남성 대중이 걸그룹에 열광하던 시기라고 해서 여성향 그룹이 없었던 것도 아니고, 남초 팬덤 그룹이라 해도 여성들 취향이 꼭 배제된 것은 아니었다. 남성 아이돌에 비해 여성 아이돌의 소비자는 늘 성별이 혼재했었고, 그렇기 때문에 걸그룹 산업이 여성향으로 일률화 된 지금 시기는 과거와 구분되는 의미가 있다. 이제 케이팝은 걸 크러시가 메인스트림이 된 것을 넘어 포화된 상태다.

최근 데뷔한 뉴진스는 이러한 과포화 상태의 징후다. 그 어떤 그룹보다 여성 팬 비중이 크지만, 걸 크러시의 주류 콘셉트와 반대로 순정하고 화창한 빛깔로 기획되었다. 이렇듯 주체적 여성이란 테마 안에서 쏠림이 일어나고 반작용으로 새로운 대안이 등장한다는 것, 이것은 장르 산업의 발달과 성숙에 따른 전형적인 현상이다. 이것을 걸 크러시란 말이 필요가 없을 정도로 일상화된 단계, 걸 크러시 이후의 다양한 걸 크러시 기획이 시작된 상태, '포스트 걸 크러시'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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