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윤광은 칼럼] 지난주 BTS 멤버 RM이 스페인 언론 엘 파이스와 가진 인터뷰가 화제가 됐다. 케이팝 시스템의 비인간성과 한국 문화의 특성에 관한 질문에 RM은 일정 부분 수긍하면서도, 그런 점들 때문에 케이팝의 퀄리티가 특별하며 한국은 70년 전 아무것도 없었지만 국민들 노력으로 발전했다고 답했다. 그런 후 식민지를 두며 부강해진 서구 국가들이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이 타당한지 되물었다. 한 일간지 칼럼에선 이 인터뷰를 향한 언론과 지식인들의 찬사에 이의가 제기됐다(‘‘그쪽이야말로주의’를 넘어서’, 한겨레). RM의 대답은 피장파장 식 논점 일탈이며 케이팝의 그늘은 그 자신의 영광으로 가리어질 수 없다는 지적이다. 나는 칼럼의 논조에는 동의하는 부분이 있고, RM의 의견에는 이해하는 부분이 있다.

그룹 방탄소년단(BTS)의 리더 RM [빅히트뮤직 제공=연합뉴스]
그룹 방탄소년단(BTS)의 리더 RM [빅히트뮤직 제공=연합뉴스]

RM은 케이팝의 대명사가 된 그룹의 리더다. 서구 한복판에서 자신의 국적을 어깨에 진 상태로 질의응답에 임하는 입장이었다. 설령 지적에 동의한다고 해도, 자신이 대변하는 집단의 긍정적 측면도 함께 언급하는 것 외에 현실적으로 고를 수 있는 대답이 많지는 않다. 물론, RM의 입장과 별개로 그의 말 자체는 평가 대상이 되어야 한다. 사실 RM이 특별히 그 자신만 갖고 있는 견해를 말한 것도 아니다. ‘K컬처’에 대한 외부의 평가에 “그러는 당신들은 어떠냐?” 되묻는 건 낯익은 광경이다. 우연찮게도 BTS가 소속된 하이브의 방시혁 의장도 얼마 전 CNN 인터뷰에서 케이팝 시스템이 억압적이라는 말에 ‘그런 면도 있겠지만 웨스턴 가수들이 삶의 파국을 맞는 경우가 더 많지 않냐’ 응수했다.

한국 ‘국뽕’의 핵심은 과거의 식민지 국가가 ‘K컬처’의 전파를 통해 새로운 문화 제국으로 등극했다는 세계관의 역전이 주는 카타르시스다. 서구는 세계의 표준으로서 이 서사의 사실 여부를 인준해 주는 큰 타자다. 이 구도를 기준으로 한국인들의 자의식은 자부심과 피해자 의식의 양 극지에서 널뛴다. 한국이 강대국이 되었다고 감격하면서도, 그 인정 욕구가 ‘리액션 비디오’를 얻는 데 실패하면 돌연 식민지 국가, 약소민족의 자의식으로 후퇴해 분노하곤 한다. 이런 정서는 언론과 여론을 아우르는 사회 여러 층위에서 발견된다. 케이팝 팬들은 서구 언론이 케이팝의 윤리성을 캐묻는 걸 제국주의의 위선이라 규탄하고, 축구 팬들은 손흥민이 경기장에서 겪는 불리한 상황들을 ‘인종차별’이라고 성큼 규정한다.

이건 수동적 태도로 서구를 선망하던 단계와도 다르고, 단순히 국제적 소수자의 처지를 표현하는 것과도 다르다. “70년 전”부터 품었던 부국을 향한 열망, 혹은 30년 전 세계화의 첫 삽을 뜨면서 제창된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다” 같은 색 바랜 슬로건이 ‘현실’이 되는 장관을 목도하며 한계치까지 터질 듯 팽창한 자의식이다(RM의 인터뷰는 10여 년 전 밈으로 떠돌던 "다시는 한국을 무시하지 마라"를 실화로 재현한 버전이라 통쾌함을 안겨 준 걸까?). 서구는 이제 결핍뿐 아니라 호승심을 일으키는 대상이 됐고, 해외 시장은 ‘K컬처’의 영향력에 복속된 영토처럼 간주되는 정서가 있는 것 같다. 세계의 지배적 질서에 편입했다고 믿는 탈식민지 국가가 기성 ‘제국’들에 죄의식을 요구하며 인정투쟁을 벌이고 도덕적 우위를 점하는 수단으로 피해자 정체성이 소환되는 것이다. 이것을 ‘피해자 의식 소제국주의’라고 부를 수 있을까.

2020 케이콘:택트'(KCON:TACT) 시즌2 [CJ ENM 제공
2020 케이콘:택트'(KCON:TACT) 시즌2 [CJ ENM 제공

사실, RM의 인터뷰에서 인상 깊게 본 대목은 따로 있다. 그는 ‘K’라는 라벨이 지겹지 않느냔 질문에 ‘K’는 프리미엄 라벨이며 우리 조상들이 얻으려 노력한 품질 보증이라 답했다. 한국인들이라고 모두가 ‘K’의 위대함을 경배하는 건 아니다. 국격에 대한 아전인수 식 찬양, 국산 문화콘텐츠의 세계적 흥행과 먹고사는 국내 현실의 괴리감, 사실을 날조하는 ‘국뽕 유튜브’ 창궐까지, 이 말이 띠는 작위성과 망상됨에 반감을 품은 여론도 있다. 젊은 이용자가 많은 커뮤니티에선 ‘국뽕’을 찬양하는 글뿐 아니라 야유하는 글도 적지 않다. 무조건적 찬양과 조건반사적 냉소 사이에서, ‘K’가 과연 무엇인지 있는 그대로 껴안고 직시하는 시선은 캄캄한 공란으로 비어있다. ‘K’에 관한 거대담론이 넘쳐날수록 ‘K’라는 기표는 타자화 된다.

RM의 발언은 ‘K’가 무엇인지, 그 나름의 구체적 언어로 긍정적 측면을 피력했다는 점에서 인상적이다. 아마도 그 점이 ‘국뽕’을 싫어한다는 사람 중에서도 “저렇게 말하니까 K가 또 다르게 보이네”라는 반응이 나온 이유일 것 같다. 다만 질문은 남는다. 'K'가 품질 보증 마크라면 어떤 품질에 관한 보증인가. 그 범주가 명확한 실적을 거둔 일군의 문화 콘텐츠를 넘어 국가 전 방위로 무분별하게 확장되며 한국 사회를 환상과 현실로 분단한 채 일그러진 거울을 세운 것이 ‘K’의 현주소다. ‘K’라는 기표의 공란을 채우는 저마다의 대답이 더 많이 오가고 집적되어야 한다. RM의 말이 맞냐 틀리냐는 중요하지 않다. 원래 담론은 동의할 수 있는 말에 관한 보론과 동의할 수 없는 말에 대한 반론으로 형성되는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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