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소설가 김은희] 나이가 들고 있다. 허리를 잠깐만 구부리고 일해도 허리가 아파서 펼 수도 구부릴 수도 없는 상태가 되었다. 무거운 것을 들면 여지없이 다리까지 아프고 저려 몇 날 며칠을 고생한다. 소화력도 예전 같지 않은 나이가 되어 조금만 많이 먹어도 탈이 난다. 내 나이에도 활기차게 날아다니며 사는 사람이 많은데 나는 고스란히 나이를 느끼며 살고 있다. 약골로 태어났고 십 대에서 이십 대, 삼십 대로 넘어가면서 건강해지려고 노력하며 몸을 아끼지 않은 탓이 클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나이가 들어 좋다.

이십 대에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사전을 읽었을 때가 있었다. 우리나라만의 아름다운 단어를 찾고, 뜻을 기억하기 위해서였다. 책에서 좋은 표현이 있으면 여러 번 읽고 노트에 짧게 옮겨 적기도 했다. 일상에서 시처럼 이야기하고, 소설처럼 표현하는 게 익숙했다. 지금은, 없다. 사실 잘 기억나지 않는다. 많이 쓰던 단어와 용어도 기억나지 않는 일이 많다. 쓰려고 했던 문장이 기억나지 않아 애를 먹고 결국 기억해 내지 못했다. 이야기하다 끝을 맺지 못하는 일도 잦다.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길을 잃는 일도 많다. 글도 내 마음대로 읽을 때가 있다. 전혀 다른 단어로 글을 읽을 때가 있어 두세 번 확인해야 한다.

이미지=게티이미지뱅크​
이미지=게티이미지뱅크​

처음엔 창피하고, 난감하고, 무서워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못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몇 년 전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친구들을 만나면서 마음이 놓였다. 친구들도 같은 두려움을 안고 있었다.

정말, 기억이 나지 않아. 잘 들리지 않고, 엉뚱한 이야기를 해.

다 같은 증상이 있었다. 일곱 명이 한자리 앉아 이야기하는데 가운데 앉아 있는 친구가 한 이야기를 양쪽 끝에 앉아 있던 친구가 다르게 듣고 해석하고 옆에 친구한테 말했다. 우린 배꼽을 잡고 웃었다. 또 단어가 기억나지 않아 아, 그거, 라고 말해도 모두 찰떡같이 알아 들었고, 어, 그래, 라고 해도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았다. 그날 모두 같은 증상이 있다는 것을 알고 안도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 것을 애써 기억하려 하지 않는다. 시간이 되면 불현듯 기억나고, 인터넷으로 찾아보면 된다.

가끔 만약 과거로 돌아가고 싶다면 언제로 돌아가고 싶은지 십 대로, 이십 대로 돌아간다면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묻는 사람들이 있다. 삼십 대에는 이십 대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십 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사십 대 초반에는 삼십 대 초반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십 대와 이십 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당시 십 대, 이십 대를 생각하면 밝지도 유쾌하지도 않았다. 그 불안정하고, 불편한 세계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작년이었다. 책방에서 사람들과 책을 읽고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는데 나와 비슷한 나이의 남자 수강생이 불쑥 물었다. 과거로 돌아간다면 언제로 돌아가고 싶어요? 이십 대는 십 대로, 삼십 대는 이십 대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다. 사십 대, 오십 대였던 수강생은 십 대, 이십 대, 삼십 대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했다. 공부를 좀 더 열심히 해서 더 나은 대학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해보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고, 이십 대로 돌아가 다른 친구를 만나고 싶다고 했다. 수강생이 나를 쳐다보며 선생님은요? 라고 물었다.

이미지 출처=게티이미지뱅크​
이미지 출처=게티이미지뱅크​

나는 내년에 오십이 된다. 오십인 나는 돌아가고 싶은가. 생각했다.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예전과는 다른 이유였다. 그때만큼 재밌게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때만큼 나를 온전히 느끼며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돌아간다고 해도 나는 똑같은 선택을 하며 똑같이 살 게 분명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내 십 대, 이십 대는 밝지 않았다. 우울하고 반항적이었다. 죽음을 생각하고, 일탈을 생각하고, 벗어나길 원하는 불안정한 시절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우울한 십 대가, 발을 땅에 딛지 않고 있는 것 같던 이십 대가 나에게 너무 재밌고 소중한 시간이었다. 그 시간에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내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불안한 시절을 건너왔기 때문에 별일 없이 평온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남은 나날은 지금보다 행복할 거라는 믿음이 생겼다.

그래서 말했다.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분명 이십 대에, 삼십 대에 빛났을 것이다. 그래도 나는 지금이 좋다. 물론 예전 같지 않아 불편한 것도 있지만 조금씩 내 몸에 맞게 움직이고 활동하는 법을 깨달아 가는 중이다. 나이를 먹는 것도 나쁘지 않다. 어제 칠십이 넘은 동네 어머님이 나에게 길을 묻기 위해 불렀다. “아가씨!” 옆에 있던 딸이 “엄마!”하고 어머님 옆구리를 뚝 쳤다. 어머니는 “왜, 젊고 이쁜 나인데. 아가씨 같은데”라고 말했다. 어머님 나이엔 나도 아직 젊은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계속 진행 중이다. 인생이 아름다워지는...

김은희, 소설가이며 동화작가 (12월 23일 생), 대전일보 신춘문예 소설 등단, 국제신문 신춘문예 동화 당선, 제30회 눈높이아동문학대전 아동문학 부문 대상 수상.   

  ☞ 네이버 뉴스스탠드에서 ‘미디어스’를 만나보세요~ 구독하기 클릭!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