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 한상희 칼럼] 지난달 JTBC 보도에서 조금 생소한 표현이 귀에 들어왔다. "연인 혹은 옛 연인 사이에서 벌어지는 폭력 범죄의 신고 건수가 3년 만에 3배로 뛰었습니다." 일반적으로 '데이트 폭력'이라고 칭하던 것을 '연인 혹은 옛 연인 사이에서 벌어지는 폭력'이라고 풀어서 명명한 것이다.

'데이트'라는 어휘가 가지고 있는 긍정적이고 밝은 이미지들이 '폭력'이라는 정반대 이미지의 어휘와 결합했을 때 더 끔찍한 상황으로 인식될 수도 있다. 그러나 오히려 '폭력'의 심각성을 '데이트'라는 어휘가 약화시킬 수 있어 '데이트 폭력'을 연인 사이에 벌어지는 사소한 다툼으로 인식할 여지가 크기 때문에 다른 용어로 대체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어 왔다. 앞서 언급한 보도는 현장에서 이런 고민이 그대로 반영된 결과로 보여 시청자로서 고마웠다.

JTBC 뉴스룸 (10월 10일 보도화면 갈무리)
JTBC 뉴스룸 (10월 10일 보도화면 갈무리)

"내가 사용하는 언어의 한계가 내가 사는 세상의 한계를 규정한다"라는 비트겐슈타인(L.Wittenstein)의 말을 굳이 빌리지 않더라도 사물 혹은 사건을 어떻게 명명하는가에 따라 생각과 행동이 달라진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수많은 사건사고를 접하는 통로가 미디어라고 할 때 이러한 명명이나 호칭의 영향력은 미디어의 언어로 표현될 때 더욱 명확해진다. 불법촬영을 '몰카'로, 불법촬영을 저지른 사람에게 '호기심'이라는 이유를 붙여주는 순간 이 행위는 범죄가 아닌 장난이나 실수 정도에 그치고 만다. 범죄 가해자를 '악마'라고 부르는 순간 그의 행위는 일반적인 사람이 저지른 범죄가 아닌 '특별한' 것이 되면서 사건의 본질을 흐리게 만든다.

전 세계가 처음 경험한 바이러스에 대해 초기 그 발생 지역으로 알려진 지역명을 넣어 '우한폐렴'이라고 명명했지만 이후 WHO(세계보건기구)는 COVID-19로 바꿔 부를 것을 권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후에도 '우한폐렴'을 고집한 언론사도 있었는데 그 지역과 해당 국민에 대한 혐오로 이어질 뿐 누구에게도 이로운 점은 없었다.

정부가 축제의 자리에서 벌어진 '참사'를 굳이 중립적이라는 불필요한 이유를 대면서 '사고'로 바꾸어 부를 것을 권장하는 것 역시 미디어의 언어가 주는 규정의 힘을 익히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MBC 뉴스데스크 (11월 5일 보도화면 갈무리)
MBC 뉴스데스크 (11월 5일 보도화면 갈무리)

MBC가 앞으로 이태원 참사라는 말을 쓰지 않고 '10.29 참사'로 쓰기로 결정했다는 앵커의 말을 들으며 많은 생각을 했다. 특정 지역이 호명에 의해 위험 지역으로 낙인찍히고 지역과 관련된 사람들에게 고통과 상처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는 지역명을 빼는 것이 좋은 선택일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아직 명확하게 책임을 지는 사람이 나오지 않았고 여전히 희생자들과 유족들의 아픔은 그날, 그곳에 머물고 있음을 생각할 때 '이태원'의 정리되지 않은 상황을 너무 서둘러 빠져나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러운 마음이 든다. 미디어의 언어가 가지는 무게는 결코 가벼울 수 없을 것 같다.

* 한상희 언론인권센터 사무처장 칼럼은 사단법인 언론인권센터 '언론인권통신' 제 979호에 게재됐으며 동의를 구해 미디어스에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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