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김민하 칼럼] 정부가 지정해준 국가애도기간이 끝났다. 정치권은 전열을 가다듬는 분위기다. 이에 따라 참사를 둘러싼 더 많은 이야기가 나올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그게 얼마나 생산적일지, 우리 사회가 이 참사를 극복하는 데 어떤 도움이 될지는 앞으로 하기에 달렸다. 무엇보다도 이후 대응의 본질은 윤리에 관한 문제라는 것에 공감하는 게 첫걸음이다.

이번 참사 수습 과정에서 정부 당국자 중 그나마 윤리를 고려한 것으로 보일 수 있는 행보를 한 유일한 인사는 윤석열 대통령이라고 할 수 있다. 동의가 안 된다면 ‘그나마’에 초점을 맞춰 생각해보라. 열 명 중 아홉 명이 잘못을 하면 가만히 있는 한 명이 돋보이기 마련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참사 자체에 대해 종교 행사에 참석해 발언하는 형태로 간접적으로나마 ‘사과’를 한, 몇 안 되는 책임자로 그나마 가장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모양새를 취하고 있다.

나머지 사람들은 어땠는가? 이상민 행전안전부 장관은 참사 직후 경찰을 투입하는 것으로 막을 수 있었던 사고는 아니었다는 취지의 주장을 펴며 법적 책임을 덜어내는 데에 주력하는 모습부터 보였다. 한덕수 국무총리도 외신 기자들과의 간담회에서 정부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취지의 발언을 농담조로 했다. 경찰 지휘부는 안전대책에는 애초 아무 관심이 없었고 참사가 벌어진 상황에도 뒤늦게야 있어야 할 곳에 복귀했다. 이 덕에 윤석열 대통령은 주요 당국자 중 참사를 가장 먼저 인지하고 참사 직후 가장 적극적인 대응을 한 인물이 될 수 있었다. 웃어야 하는가 울어야 하는가?

​​윤석열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가 지난 6일 서울 중구 명동성당에서 열린 이태원 참사 희생자 추모 미사에 참석, 기도하고 있다.(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가 지난 6일 서울 중구 명동성당에서 열린 이태원 참사 희생자 추모 미사에 참석, 기도하고 있다.(연합뉴스)

사실상 윤리적 붕괴 상태나 다름이 없었던 재난콘트롤타워의 상태는 대통령의 노력에도 정부에 대한 국민적 신뢰를 회복하기 어려운 상황을 만들고 있다. 이 난국을 돌파하는 유일한 방법은 대통령이 스스로 감당해야 할 윤리적 판단과 결단을 미루지 않고 행하는 것에 있다. 즉, 연이은 간접적 사과가 빈말에 그치지 않으려면 대통령의 태도가 실제로 이후 상황 대응의 변화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먼저 법적 책임을 면하는 것에 우선적으로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던 인사들과 절연해야 한다. 한덕수 국무총리와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은 앞서 언급한 논란으로 대통령이 윤리적 책임을 감당하는 데에 이미 방해요인이 되었다. 과감한 인사조치가 필요하다. 경찰청장, 서울경찰청장 등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들에 대해서는 경질에 그치는 게 아니라 당일 행적과 대응에 대한 철저한 수사가 이뤄져야 한다. 지자체가 보다 적극적으로 안전대책 수립을 하도록 강제하는 방안을 찾을 필요성도 있다. 용산구와 서울시의 태도는 지금까지 드러난 것만으로도 안이함 그 자체이다. 특히 용산구청장의 경우는 최소한의 책임의식을 갖고는 있는 것인지조차 의문일 지경이다.

그런데 참사의 재발 방지를 보다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는 이보다도 더 근본적인 차원의 조치가 필요하다. 가령 경찰의 문제이다. 경찰 특수본 수사에 대한 언론 보도를 보면 경찰 내부에서도 사고 위험을 경고하는 보고서가 여러 차원에서 작성됐다고 한다. 일선에선 참사 당일 이전부터 여러 경로로 기동대 배치 요구가 이뤄졌다. 이러한 일종의 경고를 경찰 지휘부가 무시한 이유는 무엇인가?

경찰청장, 서울경찰청장, 당시 용산경찰서장의 행태에 그 답이 있다. 이들은 모두 당일 도심 집회 대응이 끝나고 나서 캠핑장에서 잠이 들었고, 집으로 퇴근했으며, 설렁탕 한 그릇을 챙겨 먹었다. 안전대책보다 정치 권력이 민감해 할 집회 대응을 더 중시한 것이다. 서울경찰청의 마약수사대까지 동원한 마약 단속 계획도 이들의 관심사가 어디에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상식적으로 10만이 넘는 인파가 모인 장소에서 무슨 마약 단속이 가능하겠는가? 이것은 전시(展示)행정에 불과하다. 그런데 그렇다면 이들이 이러한 모습을 보여주고자 한 대상은 누구인가? 결국 정치 권력의 정점에 서있는 대통령과 그 주변이 아니겠는가? 마약 관련 수사를 중시하는 정권의 입맛에 맞추려는 경찰의 부적절한 노력이 안전대책의 등한시로 이어졌다는 지적은 그래서 가능하다.

이를 바로잡고자 한다면 책임자를 처벌하는 것에 더해 경찰을 장악해 말 잘듣는 경찰로 바꾸려 한 정권의 시도 역시 반성해야 한다. 행안부의 경찰국 설치는 누가 왜 주도하였는가? 앞으로도 그러한 태도로 경찰 조직을 대할 것인가? 책임자에 대한 인사조치와는 별개로 경찰 조직에 대한 정권의 접근법이 달라져야 하지 않는가? 이 점을 봐도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의 경질, 파면, 자진사퇴 등은 불가피하다. 인사조치는 단지 책임을 묻는 차원이 아니라 통치 방향의 전환이라는 측면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얘기다.

같은 맥락에서 여당의 대응도 달라져야 한다. 참사 직후 자세를 낮추는 듯했던 여당은 정치적 손해를 경감하는 것에만 포인트를 맞춘 듯 ‘남탓’으로 일관하고 있다. 일부 인사들의 ‘공영방송탓’은 이들의 의도된 몰상식을 보여준다. 언론이 진작에 참사를 경고했어야 했다는 취지인데, 상식에 맞지 않는 주장이다. 굳이 찾자면 정부를 너무 믿었다는 반성을 언론 스스로가 할 수는 있다고 본다. 그러나 기동대 포함 200여명을 현장에 배치하겠다는 경찰의 보도자료에 대한 검증은 실제 그날이 돼봐야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여당 일각의 주장이 비현실적이란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바이든-날리면’ 논란으로 MBC를 마녀사냥 하려던 사람들 아닌가. 언론이 제대로 경고했더라도 입맛에 맞지 않으면 ‘조작’이라고 했을 사람들이다.

여당 내 일부 인사들은 민주당 유관조직이 촛불집회 참가를 독려하거나 직접 조직했다는 조선일보의 보도를 근거로 들어 “민주당이 참사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참사에 대한 대응은 행정이 제대로 역할을 한 것인지를 점검하는 것을 넘어 사회의 근본적 작동 양식을 되짚어보게 한다는 점에서 언제나 정치적 성격을 가져왔다. 문제가 되는 것은 정파적 이해관계가 정치적 윤리를 압도하는 현상이 참사의 원인을 짚고 재발을 방지하는 일의 방해로 작용하는 경우다. 이 맥락으로 보면 오히려 참사 대응을 탈정치화 하려는 것이야말로 정파적 이해관계를 우선시하는 태도라는 점에서 문제다.

이런 형이상학적 담론으로 가지 않더라도 여당의 주장이 무리하다는 것은 쉽게 논증 가능하다. 민주당 지지자나 당원은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정당의 구성원이 참사를 막지 못한 정부 대응에 항의해 집회에 참석하는 것이 왜 문제인가? 버스 대절은 안 되고 지하철 개별 이용은 되고 뭐 그런 기준인가? 집권여당이 이런 황당한 수준의 남탓이나 할 때가 아니다.

물론 민주당 지지자들의 대응에도 걱정스러운 대목이 없는 건 아니다. 정권 핵심부 인사에 대한 악마화가 그것이다. 예를 들어 경찰이 마약 수사라는 전시행정에만 몰두하느라 안전 대책을 놓쳤다는 지적과, 마약 수사를 하기 위해 일부러 기동대 투입을 막았다는 주장은 성격이 완전히 다른 얘기다. 세월호 참사를 둘러싼 논쟁을 돌이켜봐도 고의침몰설 등의 음모론적 주장이 진상규명과 재발방지에 도움이 되지 않았음은 자명하다.

일부 인사들이 음모론에 몰두하는 것은 그게 정파적 이해관계를 추구하기 위한 효율적 방식이기 때문일 것이다. 사태의 원인이 사회 이곳 저곳의 구조적 문제에 있다고 하면 이를 위한 해결책을 두고 각 정치세력간의 지난한 경쟁이 불가피하다. 그러나 ‘악마’의 존재가 사태의 원인이라고 하면, 이 ‘악마’를 처단하기 위해 힘을 하나로 모으는 게 유일한 해결책이 된다. 이게 참사의 뒷배경에서 음모론이 창궐하는 한국 정치의 핵심 매커니즘이라고 할 수 있다.

대중이 자생적으로 판단하는 걸 근본적으로 막을 수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윤리적 책임을 다할 준비가 돼있는 정치라면 이런 상황을 부추기고 불을 붙이기보다는 말리고 자제를 요청하는 데에 힘을 모아야 한다. 바로 그 대목에 민주당의 책임이 있고, 그것이 정치적 윤리이다. 정권을 살살 때리라는 게 아니다. 핵심을 때리기 위해서라도 이러한 윤리적 판단과 결단이 필요하다는 거다. 즉, 이번 참사는 과거에도 늘 그렇듯 대통령과 여야 모두가 남이 아니라 스스로를 돌아보고 사회공동체에 본질적으로 기여하는 방법을 찾는 윤리적 감수성을 요청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책임을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 네이버 뉴스스탠드에서 ‘미디어스’를 만나보세요~ 구독하기 클릭!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