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조현옥 수필가] ‘춘마곡(春麻谷) 추갑사(秋甲寺)’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봄의 정취가 아름답다는 마곡사를 올봄에는 두 번이나 찾았다. 한번은 응진전(應眞殿) 앞에 자목련이 다소곳이 피어있는 4월 말이었고, 한 번은 여름을 맞기 전 5월의 마지막 토요일이었다.

주차장에서 백범 선생 명상길이라는 표지판이 보여 절은 명상길을 돌아본 후에 가기로 하고 눈앞에 보이는 길로 곧게 올라갔다. 4월의 마곡사에는 키도 작고 얼굴도 작은 꽃마리가 포슬포슬한 흙 위에 봄이라는 글자를 꼭꼭 눌러 쓴 것처럼 곳곳에 피어있었다.

은적암 백련암 방향으로 가는 갈래 길이 나왔지만 흐르는 개울물 소리가 듣기 좋아 개울을 따라 토굴 방향으로 곧게 걸었다. 개울가에는 자줏빛 깻잎 모양의 잎을 위로 소복하게 쌓은 것 같은 자주 광대나물이 많이 피어있었다. 좀 더 올라가니 겹벚꽃과 박태기나무가 진분홍색 꽃이 핀 가지를 하늘을 향해 뻗고 있었고, 그 옆으로는 명자꽃이 선홍색으로 봄날을 수놓고 있었다.

호젓한 명상길 (사진=조현옥)

길을 걷는 내내 맑은 새소리까지 더해지니 어느 유명한 감독이 만든 봄날의 영상 속에 들어와 있는 느낌이 들었다.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있어서 행복하고 아름답게 느낄 수 있어서 행복한 날이었다. 아름다운 풍경이 있어도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느낄 수 없고, 아름답고 소중한 것을 지킬 수 없을 때는 처연한 슬픔을 느끼게 된다.

병들어 목숨이 꺼져가는 자녀를 바라보듯 주권을 잃어가는 조국을 염려하며 일본군에게 쫓겨 이 길을 걸었을 김구 선생님의 심정은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알 수 없는 조국과 자신의 운명 앞에서 슬픔과 좌절도 느꼈으리라.

마곡사에 은거하기 위해 삭발을 하고 원종(圓宗)이라는 법명으로 승적에도 올랐지만 백범 선생은 조국을 구할 방법을 고심하였을 것이다. 마곡사 도량을 오가며, 세조가 감탄했던 대대로 왕이 나올 터인 군왕대를 오르내리며 사사로운 마음을 비우고 조국 독립의 올바른 방향까지 계획하였으리라.

부모가 아픈 자녀를 바라보며 슬퍼하지만은 않는다. 슬픔은 이를 악물고 참으며 아이를 구할 방법을 찾을 것이다. 어떻게든 조국의 독립을 찾으려는 백범 선생의 결심은 변함이 없었다. 선생은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대한 분노로 일본군 장교를 죽일 정도로, 눈앞에 펼쳐진 현실에 타협하고 포기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마곡사 현판 (사진=조현옥)

그리하여 마곡사를 떠난 뒤에 교육사업에 헌신하는 백범 선생의 심정이 ‘백범일지’에 이렇게 나타나 있다.

‘나부터 망국의 치(恥)를 당하고 나라 없는 아픔을 느끼나, 사람이 사랑하는 자식을 잃고 상망(喪亡)을 슬퍼하면서도 혹 살아날 것만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하는 것처럼 나라가 망하기는 망했지만 국민이 일치 분발하면 곧 국권이 회복될 것 같은 생각도 드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후생들로 하여금 애국심을 양성하여 장래에 광복하는 길 외에 다른 길이 없으리라고 생각되어, 계속하여 양산학교를 확장하고 중학부의 학생을 더 많이 모집하여 교장의 임무를 다하기로 마음먹었다.’- [백범일지, 서문당 1989]-14편 安岳事件 중에서

선생도 조국의 온전한 독립이 백성들의 교육 없이는 이루어지기 어렵다는 생각을 하였던 것이다.

마곡사에는 유서 깊은 문화재가 많다. 마곡사 영산전(靈山殿) 현판은 세조가 김시습을 만나러 왔다가 보지 못하고 가는 길에 써 놓고 간 것이라고 한다. 탑의 네 면에 ‘사방불’이 새겨져 있는 5층 석탑은 나라의 기근을 사흘 동안 막을 수 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정성 들여 짜며 기도했더니 앉은뱅이도 일어났다는 대광보전(大光寶殿)의 삿자리, 죽으면 염라대왕이 몇 바퀴 돌았느냐 묻는다는 싸리나무 기둥 등 재미있는 전설이 있는 문화재도 있다.

하지만 내가 마곡사에서 가장 보고 싶었던 것은 따로 있었다. 평생을 독립운동하며 올바른 철학이 있는 민족지도자로 사셨던 백범 김구 선생의 자취가 있는 ‘백범당(白凡堂)’이다. 그리고 선생께서 1946년 상해에서 돌아와 동지들과 직접 심으셨다는 향나무였다.

마곡사 백범당 (사진=조현옥)

마곡사(麻谷寺)라는 이름 때문에 마곡에는 삼(麻)과 연관된 무엇이 있을 듯하지만, 이름의 유래 중에 하나를 따르면 설법을 들으러 온 많은 사람들의 모양이 마(麻)의 모양 같아 마곡사라고 하였을 뿐이다.

마곡사는 마곡천을 중심으로 남원(南院)과 북원(北院)으로 나뉘며 태화산과 마곡천의 모양이 태극 모양으로 태극의 기운이 흐른다 하니 백범 선생과 더욱 인연이 깊게 느껴졌다. 마곡사에 머물렀던 시간이 선생에게도 중요하고 의미 있는 시간이었기에 해방 후에 이곳을 다시 찾아 기념식수까지 한 것이리라.

봄 햇살이 반짝이는 마곡천을 건너 5층 석탑이 있는 곳으로 갔다. 5층 석탑을 중심으로 스님들이 기거하며 마음을 다스린다는 심검당(尋劍堂), 대광보전, 응진전이 있고, 응진전 옆으로 백범당의 측면이 보였다.

백범당은 복원한 것이기는 하지만 선생의 진영이 있고, 향나무와 무궁화를 동지들과 기념식수 한 뒤에 찍은 사진도 있어 백범 선생의 뜻이 오롯이 담겨 있는 듯했다. 향나무도 다른 나무와 같이 여러 종류가 있고 누워서 자라는 종도 있지만, 김구 선생이 심어놓은 향나무는 지금도 곧게 서서 70여 년 세월 동안 선생의 뜻을 지키고 있다.

김구 선생이 해방 후 1946년 여러 동지들과 기념식수를 한 향나무 (사진=조현옥)

우리나라가 독립된 뒤에도 백범 김구 선생은 온전히 독립된 조국의 발전을 위한 뜻을 지켜나갔고 올바른 방향을 제시했다.

‘내가 원하는 우리 민족의 사업은 결코 세계를 무력으로 정복하거나 경제력으로 지배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사랑의 문화, 평화의 문화로 우리 스스로 잘 살고, 인류 전체가 의좋게 즐겁게 살도록 하는 일을 하자는 것이다. (중략) 이 큰 일은 하늘이 우리를 위하여 남겨놓으신 것임을 깨달을 때에 우리 민족은 비로소 제 길을 찾고 제 길을 알아본 것이다.- [백범일지, 서문당 1989]-나의 所願

김구 선생은 평범한 한 사람의 백성(白凡)이라는 자신의 호처럼 조국을 위해 헌신하는 것은 자랑할 일이 아니라 당연한 일이라고 했다. 백범 선생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고 그저 평범한 한 사람의 국민일 뿐인 내가, 막연히 선생이 그립고 선생의 발자취를 따르고 싶은 것은 왜일까. 베어지며 향을 풍기는 향나무처럼 선생의 올곧은 삶의 향기를 따라가면 지천명의 나이를 넘어 약해지는 몸과 맘을 바로 세울 수 있을까 하는 바람 때문인가 보다.

선생은 1949년 6월 26일 안두희가 쏜 총에 맞아 운명하셨다. 그 다음 해 1950년 6·25가 발발한 것은 누구나 아는 일이지만 백범 선생의 서거일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선생의 뜻이 마곡사 향나무와 함께 오래도록 기억되고 우리 정치에서 실현되길 바라며, 다가오는 6월 26일에는 백범 선생의 뜻을 기리며 추모하는 시간을 가져야겠다.

☞ 네이버 뉴스스탠드에서 ‘미디어스’를 만나보세요~ 구독하기 클릭!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