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짱이', '생기가 다 빠진 죽은 생선'. 이는 직장인들이 생각하는 퇴근 후 자신들의 모습이다. 퇴근 후 하는 가장 많은 일이 TV 시청, 인터넷 그리고 술이기 십상인, 그러다 내일을 위해 자는 삶. 문제는 없지만 답도 없는 직장 생활. 하지만, 그 직장 생활보다 어쩌면 더 답이 없는 퇴근 후의 삶. 그런 쳇바퀴 같은 대한민국 직장문화에 2017년 새로운 핫 키워드가 등장했다. 바로 워라밸, ‘Work and Life Balance’가 그것이다.

60: 40? 아니 40: 60? 퇴근 후의 삶

다큐는 오밤중에 거리를 달리는 사람들로부터 시작된다. 달리기가 좋아서 만난 사람들의 '야밤 런닝', 그들은 각자의 직업을 가졌지만 이렇게 밤을 달린다. 너무 힘들어 다음번에는 안 나가겠다 하면서도 결국은 또 다음 대회를 준비하게 되는, 좋아서 달리다보니 이젠 비행기를 타고 바다 건너 대회까지 참가하는 경지에 이른 사람들이다. ‘직장 생활 60%, 러닝 40%’이라고 하고 싶지만, 종종 그 균형 비율이 헛갈리는 사람들은 그저 달리며 조금씩 자신의 기록이 단축되는 그 '단순한 즐거움'에 퇴근 이후의 시간을 헌납한다.

‘퇴근 후에 뭐 하세요? - 사생활의 달인들’ 편

8월 10일 <MBC 스페셜>이 주목한 2030 세대의 새로운 트렌드 ‘워라밸’의 현장에는 이른바 우리 사회에서 취미라고 내세우는 등산, 축구, 종교 활동의 경지를 넘어 새로운 삶의 영역을 개척해 가는 사람들이 있다.

지하철에서 보호대를 찬 발목을 치켜세우며 턴을 하는 이 사람은 어떨까? 31살 항공사 사무직으로 일하는 손인하 씨가 선택한 워라밸은 '발레'이다. 아마추어 발레단의 일원으로 그녀는 이제 곧 공연을 앞두고 있을 정도의 경지에 이르렀다.

대학병원 응급실 경력 간호사 16년차 김효선 씨는 간호사 파이터로 방송을 탈 정도로 격투기에 빠져 있다. 다이어트로 시작한 격투기는 이제 당당하게 그녀를 프로무대에 세웠고, 휴가조차 태국에 가서 무에타이를 배울 정도로 자신의 '취미'에 빠져있다.

그 취미를 위해 300만 원이 넘는 비용을 들여 주말마다 바다를 건너는 이도 있다. 대학병원 원무팀장 유주형 씨는 50세의 최고령 해녀학교 학생이다. 1000km의 통학 거리를 마다않고 제주도 한림읍 앞바다 물로 달려가는 그는 이제는 퇴직 후 제2의 인생으로 '물질'을 고려 중일 정도다.

성공 신화가 깨진 대한민국, 각자의 행복을 추구하려는 사람들

‘퇴근 후에 뭐 하세요? - 사생활의 달인들’ 편

이렇게 저마다 각양각색의 '퇴근 후' 삶을 모색하는 사람들, 그리고 이런 삶의 변화가 트렌드로 등장한 2017년. 그 저변엔 이제 더 이상 성공 신화를 쓸 수 없는 대한민국 사회가 있다. 자신의 욕구를 짓누르고 일에 매달려가며 평생직장을 위해 헌신했던 것이 선배 직장인들의 삶이었다면, 더 이상 평생이 보장되지 않는 직장에서의 성공 대신 나의 행복을 모색하고자 노력하는 직장인들. 그런 고민에서 바로 특별한 존재 이유로서의 사생활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그 시작은 저마다 다르다. 유주형 씨와 같이 해녀 학교를 다니는 정규환 씨. 43살의 그는 해녀 학교의 열혈 학생이다. 이제는 제주도에 와서 때로는 현재 삶이 허하다고까지 느낄 정도라는 그는 한때 서울의 잘나가는 병원의 소아외과 의사였다.

퇴근하고 집 앞에 주차를 하는 순간 다시 호출을 받아 병원으로 돌아가는 식의 삶을 되풀이하던 그. 아이들의 자는 모습이라도 보며 산다고 했지만 정작 조금씩 '번아웃 증후군'을 보이며 활화산이 되어가던 그에게 '버킷리스트'로서 해녀가 되고 팠던 아내가 이곳을 권유했다. 그리고 아내와 그는 서울에서의 생활을 접고 이곳 제주로 내려왔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장과 위치를 가졌지만, 그것을 행복이라 느낄 수 없었던 그. 하지만 이제 해녀학교 상군으로, 퇴근이 보장된 제주에서의 의사 생활로 삶에 만족할 줄 아는 삶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같은 해녀 학교의 이주혜 씨는 이른바 '애기군'으로 아직 잠수조차 못하는 초급생에 불과한 처지다. 지금은 잠수가 안 되서 쩔쩔매는 그녀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역사 선생님을 꿈꾸는 임용고시 준비생이었다. 하지만 지난 3년, 시험을 준비할수록 길을 잃었던 그녀가 퇴근이 보장된 유통업계의 일을 하며, 해녀학교 일원으로 살아가는 현재의 삶을 통해 '나도 뭔가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게 되었다.

‘퇴근 후에 뭐 하세요? - 사생활의 달인들’ 편

워라밸의 등장은 일과 삶이라는 균형추가 '일' 쪽으로만 기울어진 불균형에 대한 새로운 방향성이다. 원해서 간 직장이라 하더라도 직장에서의 삶이 늘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는 현실, 혹은 호구지책이 나의 욕구에 우선할 수밖에 없는 현실. 하지만 한 취업 포털사이트의 조사 결과, 20대 청년 층 89.7%가 '취미나 적성에 맞는 직업을 찾는 것이 행복하다'는 현실에서 직장을 뛰쳐나오지 않고도 자신이 원하는 행복을 찾고자 하는 '균형추'의 모색이 워라밸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때론 이 워라밸이 새로운 인생의 시작이 되기도 한다. 초등학교 때 함께 학원을 다니다 뒤늦게 대학에서 만난 친구 구은혜, 조유진 씨는 회사원과 선생님이라는 직업 대신 이젠 스타트업 기업을 이끈다. 그녀들이 하는 일이란 '취미'를 배송하는 일. 매월 다른 취미를 개발하여 쳇바퀴 같은 직장 생활에 지친 이들에게 삶의 활력을 제공한다. 이번 달 그녀들이 고안한 취미는 집에서도 바캉스 기분을 낼 수 있는 냉족욕기. 어느 날 직장 의자에서 녹아내릴 것 같았던 그 순간 직장을 그만두고 시작된 이 엉뚱한 사업이야말로, 자신의 행복을 회사라는 공간에만 가둘 수 없는 이 시대 직장인들의 욕구를 '즉자적'으로 반응한 아이디어 상품이다.

물론 늘 워라밸이 이상적일 수는 없다. 워라밸을 지향하여 퇴근이 보장된 직장을 얻었던 손인하 씨는 막상 퇴근 후 지쳐 쓰러지기가 일쑤였다고 고백한다. OECD 회원국 중 두 번째로 일을 많이 하고 직장인 10명 중 8명이 퇴근 후 '번아웃 현상'을 경험하는 현실. 대한민국 직장인들의 55.5%가 상사 눈치를 안 보는 퇴근을 원하는 갑갑한 환경이 현실이기도 하다. 또한, 최저임금이 내년 올해보다 16.4% 늘어나 7530원이 되었지만 이는 OECD 32개 회원국 중 15위 수준, 경제적 조건 역시 워라밸의 균형을 저해한다.

하지만 늦깎이 해남이 된 유주형 씨의 말대로 한번 뿐인 인생은 이제 성장하지 않는 사회에서 소모품이 되기 싫은 사람에겐 절실한 화두로 다가온다. 그리고 그 화두의 해법 중 하나가 '워라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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