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방을 뒤진 영은수(신혜선) 검사의 팔목을 낚아챈 서동재(이준혁 분)의 팔을 황시목(조승우 분)이 잡는다. 하지만 그들은 곧 자신들의 뒤에서 다가오는 그 누군가의 존재감에 움찔한다. 곧이어 복도의 각 방을 열고 우르르 쏟아져 나온 검사 무리들이 조폭처럼 양쪽으로 늘어서 허리를 굽히고, 그들 앞에 이제 막 검사장이 된 이창준(유재명 분)이 우뚝 선다.

<응답하라 1988>의 아버지 검사가 되다, 그 첫 번째 <비밀의 숲> 유재명

tvN 주말드라마 <비밀의 숲>

<비밀의 숲>의 이 장면은 상징적이다. 끝내 그에 대한 의심을 거두지 못하는 황시목 앞에 이제 검사장이 된 이창준의 존재감으로 보여주며, 검사 조직의 생리를 단번에 설명하고 있다. 그 좁은 검찰청 복도 앞에 우르르 늘어서서 고개를 조아리는 검사들과, 끝내 황시목조차 고개 숙이게 만드는 이창준. 그 장면에서만큼은 주인공이 황시목이 아니라 이창준이라 해도 무리가 없어 보인다.

그렇게 유재명이 연기하는 이창준은 회를 거듭할수록 존재감을 뻗쳐간다. 첫 회 자신에게 상납하는 여성으로 인해 전전긍긍하는 부패 검사일 것만 같았던 그가 오히려 회를 거듭할수록 모호해진다. 도청 소재지도 아닌 도시에서 태어나 재벌의 사위가 되고 이제 검사장으로 만족하지 않을 '야심만만한' 개천의 용이 된 한 인물 이창준. '모든 것은 밥 한 끼에서 시작되었다'라는 말로 시작된 그의 묵직한 내레이션, 그가 찢어버린 지갑, 그리고 자신의 장인과 아내마저 의심치 않는 그의 눈길에서 선과 악 그 어느 편으로 쉽게 재단할 수 없는 한 인물의 복잡한 속내를 헤아려보게 된다.

그렇게 회를 거듭할수록 두터워져 가는 이창준의 존재감은 <비밀의 숲>이란 드라마의 안개를 더욱 짙게 만들고, 그래서 이 드라마를 즐겨 보는 이들로 하여금 황시목 못지않게 이창준이란 존재의 매력을 만끽하도록 만든다. 그러고 보니 <응답하라 1988>에서 학주(학생 주임)였던 그의 존재감도 만만치 않았다. 그저 여느 학교에 한 명씩은 있을 법하던 괴팍한 학생 주임으로, 그리고 동룡이 아빠로 시작되었던 그의 존재감은 드라마가 마무리 될 즈음 어느 틈엔가 골목 아빠들 멤버의 고정 1인으로 확고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비밀의 숲> 이창준을 통해 높아진 관심은 거슬러 <해수탕 여인(2014)>을 비롯해 <살아남은 자(2016)>까지 그가 이전에 출연했던 작품까지 이어지도록 만든다.

<응답하라 1988>의 아버지 검사가 되다, 그 두 번째 <파수꾼>의 최무성

MBC 월화드라마 <파수꾼>

아이러니하게도 똑같은 검사인데 유재명과 전혀 반대의 의미에서 새롭게 보이는 인물도 있다. 바로 MBC 월화드라마 <파수꾼>에서 검찰총장 후보 하마평에 오르내리며 국회 청문회를 앞둔 서울중앙지검장 윤승로 역의 최무성이다. 서울법대 수석 출신에 나라를 위해, 그리고 자신의 입신양명을 위해 하찮은 인간들의 희생쯤은 가볍게 즈려밟고 이제 검찰총장을 앞둔 그. '파수꾼'들의 도전에도 자신의 인맥과 노회한 처세술, 그가 지난 시절 살아왔던 협박과 술수로 끄떡 없이 버티는 윤승로야말로 이 시대 '괴물'의 표본이다.

그런 윤승로가 <응답하라 1988>에서 부성애로 시청자들의 눈시울을 적시었던 순둥이 택이 아빠였다니! 이것이야말로 반전 중의 반전이다. 처음 그가 TV에 등장했던 건 <청담동 살아요(2011)>의 기러기 아빠 최무성 역이었다. 연기인지 본모습인지 헷갈렸던 그 두루뭉술한 존재감과 달리, 이 작품에서 그의 모습은 조금씩 자신의 지분을 찾았던 것. 하지만 그렇게 <청담동 살아요>에서 일반인처럼 등장했던 그가 <세븐 데이즈>, <베스트 러>, <악마를 보았다>에서 '악마' 같은 악역이었다는 건 또 하나의 반전이다. 아니, 그보다는 최무성이 연희단 거리패 출신이며 도쿄 비쥬얼아트스쿨 영상학부 연출 전공에 <사람을 찾습니다>, <청소부> 등 다수의 연극을 연출한 사람이라는 것이 더 반전이라면 반전일 것이다.

그렇게 ‘신출귀몰하다’는 표현이 걸맞은 최무성이기 때문일까? <비밀의 숲>의 늘씬한 유재명과 달리, 한 덩치 하는 최무성이 '서울중앙지검장'의 자리에 앉아 주변 인물들을 떠보며, 그들의 쓰임새를 이리저리 재단하고, 그러면서도 맹목적인 부성애로 '사이코패스'인 자신의 아들 범죄를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 모습은 <파수꾼>이란 드라마의 핵심 코드이다. 최무성이 연기하는 윤승로의 의뭉한 노회함이 이 시대 또 다른 '악'의 변주로 드라마를 이끌어가고 있는 중이다.

<내부자들>의 재벌 회장님, 이번엔 검찰청장으로 <수상한 파트너>의 김홍파

SBS 수목드라마 <수상한 파트너>

이제 그의 악역은 익숙하다. <내부자들>의 오회장, <384 기동대>의 방필규 회장, 그리고 <수상한 파트너>의 선호지방 검찰청장 장무영.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 한마디는 높지 않지만 무시무시하고, 비수가 되어 상대방의 가슴에 박힌다. 악역으로서 그는 '클리셰' 같지만 여전히 그의 존재감은 압도적이다. 하지만 그런 악역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적인지 동지인지 모를 염석진을 두고 고뇌하는 <밀정>의 김구가 있고, 낭만적인 의료진의 울타리가 되어주었던 <낭만닥터 김사부>의 돌담병원장 여운영도 그의 몫이다.

'피해자이면서 가해자인 집에서는 다정한 가장이나, 밖에서는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발버둥치는(월간조선 인터뷰)' 이 시대의 또 다른 가장의 모습을 그의 '악역'을 통해 표현해 내고 있다. <수상한 파트너>의 선호 지방 검찰청장으로 분한 김홍파 배우는 비명횡사로 아들을 잃고 그 원한을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은봉희(남지현 분)에게 쏟아 붓는 맹목적 부정을 그려낸다. 그렇게 아버지로서 맹목적인 모습은 선호 지방 검찰청의 대표로서의 권위로 이어진다. 이제 드라마의 종반, 그가 그 자리에 오기까지 덮었던, 아니 스스로 조작했던 노지욱-은봉이 부친과 관련된 사건에서 '이 시대 가장'의 그늘을 대변한 주적으로 그 존재감을 드러낼 예정이다.

'20대는 투쟁, 30대는 전쟁, 40대는 깨달음의 시간'이었다는 이 오랜 내공의 배우는 극단 목화 출신의 연극 현장에서 20년의 경륜을 쌓았다. 자신이 연기한 배역이라면 그가 쉬는 호흡부터 연구한다는 이 노배우의 '악역'은 그래서 언제나 극의 중심으로 확고하게 드라마를 이끈다.

김홍파, 최무성, 유재명. 각자가 살아온 삶의 이력이 길고도 굵은 이 배우들이 연기하는 '검사장'급 인사들은 김홍파 배우의 말대로 이 시대의 또 다른 아버지 상이다. 그들은 때론 출세를 위해 혹은 나라를 위해 불법에 동조했고 앞장섰으며, 그 과정에서 누군가의 인생을 짓밟고 가정을 파괴하며, 오늘날 남들에게 폴더 인사를 받는 '일그러진 영웅'이 되었다. '밥 한 끼'로부터 혹은 한 번의 눈 감음, 혹은 한 번의 동조가 오늘날 기성세대라 말하는 '부도덕한 아버지'의 전형을 만들었고, 이제 드라마 속 그들에겐 젊은 검사들의 도전과 처벌만이 남았다. 비록 그들의 앞길엔 처벌만이 드리워졌을지라도, 그와 별개로 이들 '신선한' 악역의 진기명기를 선보이는 배우들의 연기는 갈수록 더 보고 싶은 매력을 발산하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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