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인류의 역사만큼 오래됐다. 따로 생각할 필요도 없다. 라스코나 알타미라 동굴벽화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럼 뇌물은? 알려진 바에 따르면 기원전 15세기 경 이집트에서도 뇌물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다는 기록이 있다하니, 그 역사가 짧지는 않다. 그럼 뇌물로서의 그림은?

전직 국세청장의 ‘그림로비’ 건으로 세상이 다시 시끄럽다. 예술의 ‘사회적 쓸모’가 다시 한 번 확인되는 순간이다. 예술이 실용적인 목적을 갖지 않는다고 이야기했던 분들, 이제 그 입 다무셔야 할 듯싶다. 보시라, 이만큼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지 않는가. 높은 분들이 그림을 가지고 참 많은 일들을 해내시지 않는가 말이다. 작년에는 삼성이 미술품으로 비자금을 조성했다는 소식이 알려져 예술 애호가들의 가슴을 ‘훈훈하게’ 만들지 않았던가.

▲ 지난 2005년 9월 22일 오후 국세청 대회의실에서 열린 국회 재경위 국정감사에서 이주성 청장(오른쪽)이 전군표 차장(왼쪽), 한상률 조사국 국장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주성 전 청장(15대)과 전군표 전 청장(16대)은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되었으며, 한상률 전 청장(17대)은 전군표 전 국세청장에게 인사청탁 명목으로 값비싼 그림을 상납했다는 의혹이 불거진 뒤 국세청장을 사퇴하고 지난 3월 미국으로 출국했다. ⓒ 권우성 오마이뉴스

요즘엔 예술이 백화점도 장식하고, 도시도 바꾸고, 권력관계에도 개입하니 그야말로 ‘예술, 네가 고생이 많다’고 치하해줘야 할 형편이다. 평소 ‘예술은 인류가 도달한 가장 찬란한 불꽃’이라 생각하며 나름 예술계 언저리에서 활동하는 이로서 유감스런 맘이 솟구치지만 뭐, 어쩌겠는가. 예술이 사회적으로 어필하는 방법이 아직은 이 정도에 머물러 있는 것을.

미술작품은 희소한 가치로 인해 높은 가격을 형성한다. 선물하기 편하고 받는 사람 역시 품위를 지킬 수 있는 품목이다. 집에 ‘사과박스’를 들여놓는 것 보다는 작품을 들여놓는 게 확실히 품위롭지 않겠는가. 더군다나 양도세도 붙지 않아 이력을 추적하는 것도 쉽지 않으니 그야말로 안성맞춤이다. 뇌물이나 부정축재 모두 예술진흥을 위한 정책을 최악의 방식으로 교묘히 활용하고 있는 셈이다. 정작 정책의 수혜자가 되어야 할 작가들은 작품 한 점 팔기가 어려워 빈곤에 허덕이는데, 선의의 정책이 사회적 비리나 양산하는 꼴이 됐다. 맘 같아선 그냥 하던 대로 사과박스나 계속 돌리시라고 고언을 드리고 싶지만, 어디 될 말인가.

당연히 예술작품을 돈세탁이나 청탁용으로 전용하는 이들의 탁월한 처세와 이문과 권력에 재바른 행동을 타격해야 마땅하겠으나, 한편으로 생각하면 이미 자본과 제도의 안쪽으로 ‘투항’해 버린 예술에 대해 지나친 기대와 상징성을 부여하는 것도 그리 유쾌한 일만은 아니다. 미술이 매력적인 재테크 수단으로 세인들의 입에 오르내린 것도 벌써 오래된 일. 몇 년 전 인사동의 한 전시장은 100만 원 짜리 유명작가 소품전에 온 중년여성들이 몸싸움까지 벌여가며 ‘묻지마 구매’를 하는 아수라장을 연출하기도 했다. 당시 욱일승천하는 것으로 여겨지던 한국미술시장에 발맞춰 갤러리들은 작가들을 동원해 ‘기획상품’을 쏟아냈고, 경매회사들은 연일 ‘최고가 경신’을 부르짖으며 분위기를 띄웠다. 각종 매체들 역시 부화뇌동, 미술시장에 투자할 것을 정언명령 삼아 사람들을 부추기기 바빴다. 그러나 지금은? 허탈할 정도로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 경제위기에 직격탄을 맞아 미술시장은 그대로 반토막이 나버렸다.

미술시장이 바벨탑마냥 와르르 무너지기 전 몇 해 동안은 시장이 미술의 전부인양 이야기되던 우울한 날들이었다. 그러나 미술품의 가치는 가격에 있지 않다. 가장 비싼 작품이 가장 예술성이 뛰어난 것도 아니다. 많은 이들이 가장 비싼 작품으로 레오나르도다빈치의 <모나리자>를 꼽지만, 우리의 기쁨에 찬 여성(모나리자의 다른 작품명인 ‘라 죠콘다’는 이탈리아어로 기쁨에 찬 여성이라는 뜻이다)께서는 가치평가를 거부한 채 오늘도 고고하시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루브르 박물관을 빛내주는 이 귀하신 몸을 프랑스가 경매에 내놓을 리가 만무하다. 세속적인 호기심은 계속 작품의 가격을 묻고 예술의 가치를 계량화하고 싶어서 몸이 달아오른다. 그러나 몇 억이니 몇 백억이니 하는 숫자놀음은 예술의 가치와는 하등 상관이 없다. 900억짜리 데미안 허스트의 보석해골과 300만원짜리 장욱진의 소품 중 어느 것이 더 예술적으로 위대한가? 누구도 정답을 이야기할 순 없는 문제다. 가격은 단지 가격일 뿐, 그 이상을 말해주지 않는다. 물론, 제도로서의 미술의 생존은 역시 기존의 구조를 답습하는 것으로 유지된다. 작가와 화랑과 미술관과 경매와 컬렉터와 평단 등이 맺는 구조는 꾸준히 ‘예술’을 인증해 낸다.

뇌물로 활용되는 그림까지 그 제도 내에 포섭할 수 없다는 건 당연한 사실. 그러나 뇌물 그림이 제도 내에 들어올 수 없는 본질적인 이유가 또 있다. 뇌물로서 효과를 가지려면 이름만 들어도 고개를 끄덕일 만한 대가의 작품이 필요하다. 받는 이가 작품의 가치를 인식하는 데 별도의 노력을 들여야 한다면, 그거 곤란하지 않겠나. 또, 뇌물로 사용되는 그림들은 속성상 은밀한 거래가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까 미공개로 대가의 작품을 구매한다? 그러다 보면 유명작가의 미공개 작품이 대상이 되는 경우가 많아질 밖에. 미공개 작품이라... 뭔가 냄새가 나지 않는가. 맞다, 미술에는 위작이라는 ‘유구한 전통’이 깃들어 있다. 사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겉으로 쉽게 드러내지 않는다는 특징 덕에 뇌물용 그림에는 위작이 횡행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한 마디로 동티는 덜 나고 폼은 더 나는 그림로비 고민하다, 가짜 그림 갖다 바치고 헤벌레 웃는 경우 생길 수 있다는 말 되겠다. 고거, 생각만 해도 쌤통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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