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계가 '죄다' 좌파라고 한 윤계상의 발언은 분명 당황스런 일이다. 물론, 세상사를 설명하며 '죄다'라고 하는 부사를 사용했다는 것 자체가 그의 의식이 덜 여물었음을 보여주는 것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설익음을 이유로 그가 면죄부를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의 문제가 비록 단어를 사용함에 있어 개념의 엄밀함을 벗어난 것뿐이라고 하더라도, 그의 발언에 부당함을 느끼는 대중이 존재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그래서 문득, 궁금해졌다. 그야 논란이 될 줄 몰랐다고 했고, 거듭 사과까지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하필 아이돌 출신으로 영화계에서 여전히 이질감을 느낀다는 자신의 처지를 설명하기 위해 그는 '좌파'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일까? 그의 표현대로라면 분명, 잘 모르는 단어였을 텐데 말이다.

▲ 영화 '집행자' 포스터 촬영 중인 윤계상ⓒ윤계상 공식사이트
물론, 이번 사건의 경우 본인이 사과도 했거니와 영화판의 객관적 조건을 현실적으로 고려하지 못한 어느 개인의 설익은 투정 정도의 해프닝으로 마무리되면 될 테다. 이참에 그가 아이돌 출신이라는 콤플렉스에 대해 사뭇 진지하게 성찰하며, '좌파'라는 단언의 용례에 대해 떳떳이 말할 수 있도록 학습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면 오히려 그에게도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누구나 실수 할 수 있고, 이를 적극적으로 반성할 수 있다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소한 허물들은 덮어줄 수도 있어야 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윤계상을 비난하자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윤계상의 발언을 통해 사회적으로 유의미한 생산성을 끌어내고 그렇게 해석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이른바, '좌파'라는 단어와 개념이 대중적으로 어떻게 통용되고 있는 가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요약지가 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가 좌파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압축적으로 설명하고 싶었던 의미이라는 얘기다.

윤계상은 '우호적이지 않은', '융통성이 없어 답답한', '깨끗하게 봐주지 않는' 정도의 의미로 좌파를 설명했다. 익숙한 오해다. 며칠째 시끄러운 인터넷을 보다 더욱 놀라웠던 것은 그가 이렇듯 특별할 것 없는 진부한 악담을 했다는 것이었다.

그렇다. 솔직히 '좌파'라는 개념의 의미는 물론 그런 정치적 단어를 입에 올리는 것조차 잘 상상이 되지 않는 어느 연예인이 놀랍게도 좌파에 대한 흔한 오해와 진부한 악담을 서슴없이 구가했다는 점 말이다. 헌재의 언론법 판결이 절차적 민주주의의 여실한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었다면, 이렇듯 민주주의의 내용에 있어서도 우리는 여전히 지독한 편향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좌파라는 단어만 봐도 경기를 일으키는 누군가들의 논리가, 좌파를 설명하는 어떤 이들의 방식이 여전히 확고한 지배력을 갖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촘촘히 생각해보자. MB는 좌파를 일컬을 때, '대안이 없는', '일은 안하고 꼬투리 잡기만 좋아하는', '언제나 있는 반대를 위한 반대자들'과 같은 비유를 들곤 했다. 조중동 역시 다르지 않다. 조중동에게 좌파란, MB의 그것에 '노무현에 대한 지지'와 '미국에 반대하고, 북한에 우호적인'이 추가되면 된다. 좌파라고 하는 계급적 용어, 사회학적 지칭은 여전히 완전히 다른 이중의 해석으로 사용되고 있다. 좌파를 경멸하는 이들이 일컫는 좌파와 스스로를 좌파라고 생각하는 이들의 정체성 사이의 거리는 여전히도 멀고, 어느 쪽도 이 거리를 해소할 의지를 갖고 있지 않다.

그래서 분개할 필요 없다는 거다. 윤계상의 발언은 분개할 것이 아니다. 행여나 당신이 그 발언의 의미를 추론하며, 좌파라고 하는 단어의 대중적 사용법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다면 그것도 거두길 당부한다. 무의미하단 뜻이 아니라 그렇게 접근해선 풀리지 않을 거란 충고다. 굳이 김수영 시인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조그만 일에만 분개할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사실, 따지고 보면 거듭되고 있는 MB의 라디오 연설과 어제 있었던 시정연설은 좌파에 대해 완전히 썰렁한 지식을 갖고 있는 윤계상의 그것보다 훨씬 더 모욕적인 좌파 비하이다. 예컨대, 언론법을 설명하면서 언론의 다양성을 말하고, 4대강은 전세계를 선도하기 위한 녹생성장의 일환이요, 비정규직 알바 자리 나눠주는 일이 서민 복지와 청년실업에 기여한다는 그이다. 자신을 반대하고 있는 이들의 논거를 자신의 정당성을 설명하는 것으로 풀이하는 극단적인 언어도다, 이러면 또 어쩔테냐고 묻는 안하무인의 태도이다.

MB는 꽤 오래 전부터 스스로에게 도취되어 극단적일 정도로 객관적인 조건들의 현실을 고려하지 않는 태도로 세상을 대하고 있다. 일련의 언론 장악과 공안적 치받음으로 좌파의 공간을 협소하게 만드는데 성공한 MB는 언론법, 4대강, 예산안, 규제완화, 녹색성장 등의 고정 레파토리를 거침없이 밀어붙이고 있다. 이에 반대하는 이들, 그러니까 그의 입장에선 '대안이 없는', '일은 안하고 꼬투리 잡기만 좋아하는', '언제나 있는 반대를 위한 반대자들'에게는 홍위병을 동원하여 좌파라는 낙인을 찍어주고 있는 중이다.

조그만 일에 분개를 거두고 심각한 우익소아병(小兒病)에 걸린 이들과 그 홍위병들을 어찌해야 하는 것인지 따져보자. 지난 주 일정은 아찔할 정도였다. 27일 황우석 판결이 있었고, 28일에는 용산 판결과 재보선 선거가 있었다. 29일에는 언론법 헌재 판결과 공정택 교육감이 직을 상실했다. 그리고 엊그제 아프카니스탄 파병이 결정됐다. 그리고 이번 주 MB는 태평스럽게 라디오 연설을 했고, 천역덕스럽게 시정 연설을 대독시켰다. 이 모든 것에 대해 분개하기는 너무 벅차서인가? 그래서 그토록 조그만 일 밖엔 분개할 수 없는 것일까? 어제 윤계상의 사과와 심경고백을 읽으며, 오히려 그가 딱하게 여겨졌다. 멋들어져 보여 한 마디 뱉은 것 치고는 그가 겪고 있는 심리적 압박감이 상당할 테다. 그러니 됐다. 이제 그만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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