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는 참으로 따뜻하다

서울시는 2002년 월드컵 응원, 거슬러 가면 1987년 6월 항쟁을 야기했던 서울시청 앞 차도를 변경하여 2004년에 서울 광장을 조성했다. 그런데 2009년에 또 지척에 광화문 광장을 조성했다. 팍팍한 도시의 삶 속에서 시민들이 여유롭게 쉴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참으로 눈물이 나게 고마운 행정이다. 광장을 개방하던 날 대대적 축제를 벌이고 시민들의 환호가 언론 매체를 장식했다. 고마운 마음을 이기지 못해 차를 타고 광장에 나가보았다. 광장에 도착하니, 춤추는 분수 가운데서 환호하는 시민들의 행복한 얼굴이 넘쳐난다. 두 개의 광장이 지척에 있으니, 하루에 두 광장 모두에서 행복을 경험할 수 있다.

▲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결식 하루 전날인 5월28일 경찰버스로 봉쇄되어 있는 서울광장의 모습. ⓒ미디어스
서울시는 참으로 친환경적이다

서울 광장은 원형의 완벽한 잔디 광장이다. 인조 잔디가 아니다. 도심의 친환경성이 느껴진다. 연이어 나타나는 광화문 광장은 아기자기한 화분들과 상징적으로 기획된 거대한 꽃밭이 독특하다. 이순신 동상 앞에서 춤추듯 하늘을 향해 솟아올라 떨어지는 분수들은 꽃들을 키우는 데 필요한 물들의 향연이기도 하다. 화분 의자와 해를 가리려고 의자에 붙어있는 양산 같은 조그만 지붕들이 어울려 회색빛 아스팔트에 피어나는 싱그러운 일상을 만들어내고 있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슈마허의 책을 연상시키는 아담함, 친환경을 느끼게 한다.

아름다워지기 위해 화분을 없애고 잔디밭을 조성하고, 아름다워지기 위해 많은 나무들을 베어내고 화분과 꽃밭을 조성했나 보다. 친환경 광장을 만들려고 그 많던 화분을 없애고 잔디를 깔고, 친환경 광장을 만들려고 그 많던 나무를 베어내고 꽃밭을 조성했나 보다. 줄어드는 나무, 줄어드는 산소, 늘어나는 이산화탄소는 아름다움과 친환경을 위해 필요한가 보다. 친환경 광장에서 오히려 생명의 상실과 지배와 배제가 느껴진다.

서울시는 참으로 친절하다

싱그러움이 넘쳐나는 잔디밭. 그러나 그 광장에 들어가려 하니, 잔디를 보호해야 하므로 들어가면 안 된다고 한다. 시민들이 한데 어울려서 광장에 들어가려 하면, 불순한 의도를 가진 사람이기라도 하다는 듯이, 진입을 금지한다. 광장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면 잔디를 밟아서 죽이는 반환경적 결과를 낳는다고 한다. 잔디를 배려하는 친절함이 돋보인다.

마음대로 걸을 수 있는 광화문 광장으로 가보자. 광화문 광장의 해치 마당에는 다른 나라의 광장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다. 설계도에서부터 조성 과정, 완성된 모습까지 일목요연하게 배치해 놓고 있으니, 그 친절함과 성실함이 광장의 독특성을 연출한다. 해치 마당을 구경만 해도, 마치 다른 나라에 갔다 온 것처럼 광화문 광장의 특징을 한 순간에 파악하게 하는 기획이 참으로 친절하다.

서울시는 차별화를 좋아한다

해치 마당은 광화문 광장에 있다. 그런데 거기에 전시된 다른 나라 광장 사진들은 역설적이게도 광장의 고유한 모습은 서울 광장이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다른 나라의 광장들은 많은 사람이 모이고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걸을 수 있도록 텅 비어 있다. 다른 나라의 광장들은 사방에서 접근하기가 용이하며, 광장 안에서 어느 방향으로든 움직일 수 있는 개방성을 지니는데, 그 공통성은 서울 광장에 딱 어울린다. 광장의 원래 이미지는 서울 광장에 부합한다.

그래서 광화문 광장은 해치 마당의 사진들과는 다른 모습으로 만들었나 보다. 서울을 대표하는 광장이 이미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척에 광장을 또 만들었으니, 두 광장은 분명 차별화를 염두에 둘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언뜻 보아도 두 광장은 완전히 달라서 차별화를 통한 고유 가치가 드러난다. 그렇다면 서울 광장은 다른 나라 광장들과 어떤 차이가 있는가? 바로 완벽한 잔디밭이다. 다른 나라 광장 사진들에서는 잔디로 구성된 광장을 찾아볼 수 없었다.

서울시는 차별화에 성공했다

다른 나라 광장들과 분명하게 구분되는 서울시 광장들의 독특성, 그 차별화 성공이 주는 뿌듯함에 젖어 광장을 거닌다. 그런데 걸으면 걸을수록, 현격한 외관 차이에도 불구하고, 지대한 설계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광장의 차이점보다는 공통점이 나를 사로잡는다. 서울 광장이든, 광화문 광장이든 내 마음대로 걸을 수가 없다. 서울 광장은 잔디 보호를 위해 마음대로 걸어서는 안 되고, 광화문 광장은 걷는 방향이 정해져 있어서 마음대로 광장을 좌충우돌 누빌 수가 없다. 한쪽 길을 따라서만 걸어야 하는 일방적 구조는 마치 독백처럼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구조이다. 자유와 소통의 공간이라는 광장에서 자유와 소통이 불가능하다는 공통점이 나를 사로잡는다.

외관에서 풍기는 자유와 소통의 단절은 광장의 의미 자체를 변형시키고 있다. 서울 시민의 자유로운 만남, 자유로운 충돌, 자유로운 의견 개진, 자유로운 합의를 막는 것은 다른 나라 광장들과는 분명하게 차별화되는 서울시만의 공통점이다. 서울 광장이든 광화문 광장이든 관계없이, 다른 나라 광장들과의 차별화는 외관상의 성공에 그치지 않고, 광장의 의미와 활용 가능성에서도 차별화하는 데 성공을 거두고 있다. 서울 시민은 서울시의 허가를 받아야만 잔디밭에 들어갈 수 있고, 허가한 방향대로만 걸어야 한다. 서울 광장과 광화문 광장은 문화 소비를 위한 인공적 환경이며, 축제를 이어가고자 하는 신청자들 누구에게나 광장이 개방되는 것은 아니다. 왜 그렇게 했을까? 그것은 광장을 만든 본래 의도, 광장이 지닌 역사성 때문이라고 한다.

▲ 2002년 월드컵 당시 서울광장 ⓒ서울특별시청

서울시는 역사성을 좋아한다

서울 광장은 시청 앞에서 이루어진 역사적 사건, 특히 2002년 월드컵에서 4강 진입이라는 획기적 성과, 붉은 악마라는 한국적 현상을 일궈낸 공간을 계승했다. 광화문 광장은 일제의 문화말살 정책으로 인해 상실된 대한민국 6백년 정치문화의 중심지 모습을 살려내기 위해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에 관한 철저한 역사 고증을 거쳐 산출한 광장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 역사의식에서 1987년 6월 항쟁의 역사의식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한국의 민주화, 인권, 한반도 평화를 일궈낸 역사적 기록과 성과들은 망각되었다. 그것을 이어가는 집회나 문화행사를 위해서는 광장을 사용할 수 없으며, 광장 관리자는 사용허가를 내주고 나서도 사용인과의 사전 협의 없이 일방적으로 불가 ‘통지’를 할 수 있다.

광화문 광장은 6월 항쟁이 아니더라도 ‘효순이 미선이 촛불’, ‘노무현 탄핵 반대 촛불’, ‘광우병 촛불’ 같은 무수한 역사적 사건을 담고 있는 곳이다. 이렇듯 광장에서 메아리치고 있는 역사의 목소리는 역사 고증에서 왜 배제되었는가?

한국은 한국인만의 고유한 광장 문화가 있다. 광장에 모여 만들어낸 소중한 민주화 역사가 있다. 한국인의 광장은 그저 예술을 소비하는 공간만은 아니다. 서울 광장과 광화문 광장은 새로움과 변화를 창출하는 저항의 정신과 자유로운 의사소통 과정을 축적하고 있는 생명 유기체이다. 서울 시민은 역사 누적적 생명체를 사랑한다. 서울 시민은 역동적 역사를 담고 있는 그 광장을 사랑한다.

서울시는 왜 광장 조성에 목숨을 거는 것일까? 서울 시민은 왜 광장에 목숨을 거는 것일까? 서울시는 시민들의 자유로운 영혼에서 울려나오는 목소리가 상호소통하지 못하도록 광장을 틀어막고 있고, 광장의 고유한 성격과 한국적 광장 역사를 상실하게 하려고 전전긍긍한다. 그런데도 서울 시민은 어떻게든 광장에 가고 싶어 한다. 광장에 모여서 우리들만의 차별화를 만들어내고 싶어 한다. 곤봉으로 때리고 독성 물대포를 쏘는데도, 서울 시민은 촛불을 들고 기어이 광장으로 나가서, 잔디를 밟으면서, 역사 고증에서 배제된 역사성을 끄집어내려 한다.

광장에서 메아리칠 수 없는 이런 넋두리는 서울 시민을 밀실로 틀어넣는 한국적 현상에 대한 넋두리이다. 우리는 밀실로 밀려들어간다. 멋진 광장을 놔두고서 밀실로 들어가서 부글거리는 마음을 진정시켜야 한다. 그래도 한마디를 하겠다.

“광장에 어울리지 않는 광장에게 명한다. 이제 너에게서 광장 명칭을 박탈한다.”.
“광장에 어울리지 않는 광장에게 명한다. 이제 너에게 어울리는 새로운 명칭을 부여한다.
서울 밀실! 광화문 밀실!”

서울 시민은 밀실이 되어 버린 광장에서 물러나서, 이제 광장이 되어 버린 자신의 밀실에서 광장다운 광장을 잉태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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