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장 재공모 결정이 과연 EBS의 근본적인 문제를 얼마나 해소시켜줄 수 있을까. 사장으로 가장 유력했고, 사실상 내정되었다는 이원창 사장후보의 경우, 고급다큐를 없애고 영어강의프로그램으로 EBS의 편성을 채우겠다고 주장할 만큼 EBS는 그렇게 만만한 ‘홍어X'인가보다. 아니 그렇게 만만하게 보고 있다는 또 하나의 증거일 뿐이다.

교육부 실국장 출신이 언론사 방송사의 사장을 꿈꿀 수 있는 곳, 교육부 실국장 출신이 가장 강력한 후보군에서 행세할 수 있는 곳도 EBS이다. 한국교육방송공사 EBS를 관련사업자들의 이익집단인 ‘협회’쯤으로 간주하고 퇴물관료 처리장으로 보고 있는 교육부의 시각이 어이없을 뿐이며, 부화뇌동하는 방통위 시각에 분노할 뿐이다.

▲ 방송통신위원회 ⓒ미디어스
방통위에서 밀려났거나 KBS 등에서 쫓겨난 이들이 유독 EBS의 부사장자리나 감사를 노리고 들어오는 것도 하루 이틀이 아니다. 더 심각한 것은 다른 공영방송, 즉 KBS와 MBC는 이사회에서 사장을 뽑지만 EBS는 방통위가 사장을 내려 꽂는다. 왜? 여기에 어느 누구도 명쾌한 답을 주지 않는다. 왜 EBS만 방통위의 직할 식민지가 되어야 하느냐에 대한 대답을 방통위가 해야 한다. 답하지 못하면 EBS이사회에 돌려줘야 할 권한이다.

지난 정권부터 끊임없이 제기된 방통위 식민지로서의 EBS의 독립에 필수적인 조치이다. 사장 재공모 운운하기 전에 잘못된 것을 바로 잡을 필요가 있다는 의미다. 하지만 방통위 실무자들이나 상임위원들은 별로 관심이 없는 듯하다. 아니 잘 모르는 자들이 앉아 있으니 그 문제의 심각을 놓치고 있다고 하는 것이 정확할 수 있다. 공부하지 않고 군림할 수 있는 그런 자리가 상임위원이기 때문이다.

방통위 식민지 구조의 출발은 바로 방통위가 사장을 지명한다는 것에서 출발한다.

EBS의 존재와 생존에 독립은 없다. 오로지 굴종과 굴욕에 인내하는 세월이 있었을 뿐이다. 전 사원이 똘똘 뭉쳐 그 독립을 위해서 처절한 두 달간의 싸움을 펼쳤던 것이 불과 3년 전이었고, 그 싸움 결국 노무현 정권이 파견한 방송위원회(방통위의 전신)의 앞잡이들에 의해 무력화 당했다. 이후 교육방송은 항상 그랬듯이 시들어갔다. 또 다시 굴종과 굴욕에 인내하는 세월을 견뎌내며, 결코 빼앗길 수 없는 최소한의 영역만을 사수하고 있을 뿐이다.

EBS를 향해 따뜻한 눈길을 보내주는 정당도 국회의원도 찾기 어렵다. 오로지 EBS의 이사자리는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챙겨야 하는 감투이고, 부사장과 감사는 방통위가 식민지에 갖는 권한일 뿐이다. EBS 요직에 대한 능력은 전혀 다른 차원의 영역이고, 줄 잘 서고 힘 있는 자에 귀염을 받으면 갈 수 있는 자리일 뿐이다.

냉정하게 살펴보자. 방통위가 EBS를 좌지우지하는 것은 두 가지. 하나는 앞 서 언급한 사장지명권이고 다른 하나는 방송발전기금 지원이다. 3년 내내 이 기금을 지렛대로 삼아 EBS를 갖고 놀고, 3년마다 사장 지명권과 부사장 및 감사 지명권을 갖고 노는 구조.

사장 재공모는 ‘개나 소나 EBS사장 할 수 있다’는 과장된 자신감이다. 누구하고 잘 알기 때문에 EBS사장쯤은 할 수 있다는, 잠시 쉬어가는 자리로, 경력관리에 적합한 자리쯤으로 여기며 공모한 결과, 어중이떠중이들이 똥파리 떼처럼 모여들었다가 결국 재공모라는 상황까지 초래한 것이다.

▲ 서울 도곡동 EBS 사옥 ⓒEBS
해결책 중 하나는 ‘개나 소를 분별하고 사장감을 구분할 수 있는 방통위 상임위원 5명의 냉정함’이다. 하지만 솔직히 꿈이런가 하노라. 이춘호씨의 이사 선정만 해도 그렇다. 현 정권 들어와 부동산 투기로 장관에 낙마한 사람이며 KBS이사로 정연주 사장 퇴진에 앞장섰던 방송장악의 앞잡이며, 심지어 KBS와 KT이사를 동시에 겸직한 파렴치한이다. 그런데 지금 KT사외이사로 있는데 또 다시 EBS이사로 선임했다. KT라는 통신회사와 EBS라는 방송사는 격렬한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경쟁영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쪽의 기밀을 한꺼번에 쥘 수 있는 동시 겸직을 허용해 주는 방통위, 그들은 결코 제정신이 아닌 집단라는 비판에 직면할 수밖에 없는 행위를 저질렀다.

EBS이사를 이런 자들로 뽑았으니, EBS이사회에 사장선임권한을 넘겨줘야 한다는, 그래서 EBS의 독립성을 강화해 줘야 한다는 상식을 감히 주장할 수 없게 만들어 버렸다. 방통위의 EBS이사진 구성능력에 경외심을 표해야 할까 침을 뱉아야 할까.

죽어나는 것은 식민지에서 밥 벌어먹고 사는 EBS구성원들뿐이며, EBS를 믿고 자녀 교육뿐만 아니라 자신의 평생교육을 꿈꿔야 하는 시청자들뿐이다. 그나마 건강한 EBS구성원들이 스스로 열악한 구조적 식민지에서 자율의 영토를 지켜왔고, 그 영토를 확장해 왔음을 기억함으로써 위안을 찾는다.

EBS구성원에게 또 다시 대책 없는 ‘방송독립’의 짐을 떠맡긴다. 항상 미안하고 항상 지켜볼 수밖에 없는 안타까움만 전할 뿐이다. 싸우지 않아도 된다. 또 다시 EBS구성원들이 다치는 모습을 보는 것이 힘들 것 같다. 그냥 지금까지 식민지에서 당신들이 지켜왔던 그 ‘자율의 영토, 독립적인 영토’를 좀 덜 빼앗기면서 또 3년을 버티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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