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고나니 유명해졌다는 말이 있듯이 자고나니 가을이 소리 없이 찾아왔습니다. 잠시 한 눈 팔거나 일상에 몰두하다보면 언제 여름이 끝나고 가을이 찾아왔는지 가늠할 길이 없습니다.

이렇듯 계절은 항상 소리 없이 어느 날 갑자기 찾아왔다가 끝나곤 합니다. 아침저녁으로 찬바람이 돌면 산중엔 발길이 바빠집니다.

8월 말까지만 해도 좀처럼 익을 것 같지 않던 오미자, 으름, 다래, 머루 등 산열매들이 하룻밤사이에 익어버립니다. 빨갛게 익은 오미자를 보면 한없이 기뻐하는 아내와 잘 익어 껍질이 벌어진 으름, 검게 익은 머루, 말랑말랑하게 익은 다래를 좋아하는 아이들 덕에 날마다 아내와 긴 산행을 합니다.

▲ 곰취꽃ⓒ지리산

가을산은 한없이 많은 산열매를 내어주기에 가방 가득 산열매를 가지고 어둑어둑한 산길을 걸어 집에 돌아옵니다. 계곡 따라 난 산길을 걸어 가다보면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리다 산이 높아지면 물소리가 없어집니다.

물소리만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계곡 또한 없어집니다. 강은 산을 넘지 않는다는 말처럼 물은 산을 넘지 않고 산 아래로만 흐르고 흐릅니다.

고등학교 다닐 때의 기억입니다. 강과 바다가 만나는 곳이 어찌 생겼는지 몹시 궁금해 강 하구를 간 적이 있습니다. ‘강 끝이 어찌 생겼을까? 강과 바다가 만나는 곳은 어떤 모습일까? 바다의 시작은 어디서부터 일까?’, 이런 궁금증들이 강 하구로 발길을 잡아당겼습니다.

강 하구에서 본 강과 바다가 만나는 곳은 내 생각과 너무나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어디가 강의 끝이고 바다의 시작인지 도저히 구분할 수 없는 모습이었고 강과 바다를 머릿속으로 경계 지었던 것이 얼마나 어리석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작과 끝은 묘한 궁금증을 주는지 수 년 전에는 강의 발원지가 궁금했습니다. 지도에서 보면 강의 시작과 끝이 명확해선지 그 시작을 보고 싶었습니다. 계곡을 거슬러 산길을 따라 오르다 보면 지도에서 보는 시작은 시작이 아님을 압니다.

수많은 계곡에서 흐르는 물이 아래로 흐르고 흘러 하나의 강을 만든다는 사실을 금방 알아차립니다. 강의 발원지는 실제로 찾을 길이 없습니다.

계곡을 따라 올라가다보면 실개천이라도 물이 보이다가 어느 순간 물소리는 들리는데 물이 보이지 않는 곳이 나오고 더 올라가면 물소리도 끊어지고 고요해집니다. 수많은 계곡물이 모여 강을 이루듯 실개천도 수많은 곳에서 한 두 방울이 모여 이루어집니다.

계절도 소리 없이 찾아오듯 강과 바다의 처음도 소리 없이 시작한다는 것을 산을 오르면서 느낍니다. 시작을 요란하게 하는 것이 요즘 우리가 사는 세상살이 입니다.

소리 없이 시작한 물이 무한한 바다가 되는 자연이치처럼 물을 닮고 싶은 가을하루입니다.

▲ 머루와 다래ⓒ지리산

▲ 오미자ⓒ지리산

▲ 으름ⓒ지리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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