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로 짤막한 피서를 다녀왔다. 일요일에 출발해 월요일에 돌아오는 도착적인 일정을 감행했음에도 ‘7말 8초’ 살인적인 휴가피크의 폐해를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했다. 고속도로는 차들로 넘쳐났고, 휴게소는 인산인해를 이뤘다. 뜻하지 않은 정체에 지칠 대로 지친 일행과 한우스테이크를 14,000원에 판매하는 휴게소에 저녁을 먹으러 들렀다(물론, 스테이크를 주문하지는 않았다). 일행은 여섯 명이었건만, 인파에 떠밀려 4인용 식탁에 겨우 자리를 잡고 번호표를 들고 기다렸다. 그 때였다. 중학생쯤 되 보이는 아들과 함께 온 40대 중반의 아저씨가 우리에게 자리에서 비켜줄 것을 요구한 것은.

그는 냉면을, 아들은 우동을 담은 쟁반을 각각 들고 있었다. 음식 먹을 사람이 앉아야지,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식탁을 점령하고 있으면 어떻게 하냐는 것이 그의 논리였다. 확실히, 합리적인 말이긴 했다. 그러나 관행화된 패턴을 따르고 있는 이들에게 부탁이나 협의가 아닌 명령조의 말을 당연한 듯이 던지는 상황에 기분이 상한 우리는 다른 자리를 찾을 생각도 하지 않은 채(실제로 불가능한 상황이기도 했다) 엉거주춤 일어선 채로 그들의 식사장면을 감상했다. 우리들 몫의 식사가 나온 후에도 끝끝내 국물 한 방울까지 느긋하게 마시고 일어나는 그의 모습에 적개심을 느낀 건 나 뿐만은 아니었으리라. 상대적으로 전전긍긍하며 체할까 걱정될 정도로 우동을 후루룩 마셔버리고 자리를 뜬 아들이 안쓰러워 보였달까.

식사를 마치고 식당을 나오며 이 팍팍함이 어디서부터 비롯됐는가를 다시 생각했다. 바캉스는 휴가를 뜻하는 프랑스어다. 프랑스의 휴가는 1년에 1개월 정도. 여름이면 파리 시내에는 관광객과 이들을 상대하는 상인들만 남는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프랑스인들의 바캉스 사랑은 유별나다. 한국에는 바캉스란 말은 건너왔지만, 실제 의미는 아직 바다를 넘어오지 못한 듯싶다. 대개 여름휴가를 5일 정도로 생각하곤 하는데, 실제로는 이틀 남짓인 경우가 상당하다는 거다. 명목상으론 휴가가 보장되어 있지만, 회사 사정이나 상사의 눈치를 보다보면 휴가를 활용할 수 없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함께 여행을 간 이들의 증언도 대략 일치했다. 민주노총이나 한국노총에라도 가입한 노조가 있는 사업장이라면 모를까, 대개는 휴가를 제대로 주지 않는다고 보면 된다는 거다. 대개의 휴가일정이 7말 8초에 집중되니 수십 만 대의 차량이 같은 곳을 향하고 같은 곳에서 만난다. 길도, 휴양지도, 휴게소도 임계점을 넘어서니 피곤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바캉스 스트레스란 말이 괜히 생긴 게 아니다.

바캉스가 팍팍하다보니 도심에서라도 이를 대체하기 위한 일들이 벌어진다. 광화문 광장이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다. 재밌는 사실은 광장을 찾은 인파들 중 절반 이상이 아이들 물놀이를 위해서 나들이를 감행한다는 거다. 방학을 맞았지만, 여전히 바쁜 부모덕에 변변한 바닷가 한번 가보지 못한 아이들은 한풀이하듯 분수대 주변을 깡총거리기 바쁘다. 부모들이라고 왜 계곡물에서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겠는가, 아이들이라고 해서 바다가 좋은 줄 왜 모르겠는가. 다만, 제한된 휴가로 인한 ‘바캉스 트러블’에 걸렸을 따름이다.

▲ 1일 시민들에게 개방된 광화문광장 '플라워 카펫'에서 시민들이 휴대전화 사진기를 통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박상규
광장은 도심바캉스 공간으로만 만족해야 하는 걸까. 며칠 전, 이 광장에서 표현의 자유를 요구하던 이들이 신체의 자유를 속박당한 채 연행되었다. 보수언론들은 이들이 광장을 점거하고 일 년 열두 달 집회시위를 연다는 것처럼 호도한다. 당연히, 그럴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다만, 광장을 시민들에게 돌려주자는 상식적인 이야기를 상식과 동떨어진 방식으로 하기 전에 광장이 어떤 이유에서 열렸는지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게 먼저다. 2002년 미군장갑차에 희생된 여중생들을 추모하던 집회의 군중이 광화문 일대에 들어섰을 때, 같은 해 월드컵 응원인파가 16차선 도로를 뒤덮었을 때, 2006년 한미FTA에 반대하는 시위대가 미대사관 앞을 넘어설 때, 이 공간은 이미 시민들의 표현의 자유가 분출하는 광장이었다. 그러나 서울시가 15개월이라는 시간과 470억 원이라는 세금을 들여 공간을 꾸몄을 때, 광장은 차도에 갇힌 채 분수대와 ‘플라워 카펫’이 깔린 정원으로 전락했다. 224만537송이의 꽃으로 채운 플라워 카펫은 서울시가 고심 끝에 낸 시위방지용 비책이란다. 덕분에 ‘너른 공간’이어야 할 광장은 옹색해졌고, 서울시의 강력한 의지대로 정치적 의사표현은 팍팍해졌다. 바캉스와 광장은 그래서 공통점을 갖는다. 허락을 받아야 쓸 수 있는 시공간이 되 버린 것이다. 그들이 열어준 공간에서 허용된 방식으로만 놀아야 하고, 그들이 허락한 일정에서 가능한 선으로만 움직여야 한다.

▲ 시민사회단체와 야4당은 3일 오전 11시,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광화문광장 조례’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개최했다. ⓒ곽상아
▲ 3일 광화문광장 기자회견 참석자가 연행되고 있는 모습 ⓒ곽상아
위정자들의 광장에 대한 공포를 이해하지 못할 바도 아니다. 4.19도, 6.10도 광장을 통해 정치적 의사표현이 가능했고 실제 권력에 그만한 타격을 줬으니까. 그러나 광장을 닫는 것만으로 문제를 없는 것처럼 만드는 일은, 사냥꾼을 만난 꿩이 덤불 속에 머리만 파묻는 것 같은 미봉책일 뿐이다. 광장에서의 의사표현은 이명박-오세훈 같은 보수주의자들이 중심에 있는 세상 뿐 아니라 어느 사회에서나 당연히 보장받아야 할 권리이고, 이는 사회적 소통을 위해서도 바람직하다. 문제가 지속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구조’는 도외시한 채, 문제는 있어서도 안 되고 문제를 드러내서 이야기하는 것은 더더욱 안 된다는 태도는 대화로 해결가능한 문제를 과격한 문제로 키우는 지름길일 따름이다. 역사적으로도 권력에 의해 열린 ‘어용 광장’들이 끝끝내 권력을 몰아내는 공간으로 사용됐던 일이 비일비재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육조거리가 어쨌다고? 성균관 유생들은 자신들의 목을 내걸고 명백한 시위를 해대지 않았던가.

하여, 우선 대한민국에 바캉스를 허하라. 도심정원에 몰려 대체바캉스로 만족하는 이들에게 바캉스의 즐거움을 돌려주자. ‘광장 바캉스’를 강제하는 현실, 사람에 치이는 바캉스를 강제하는 현실이 우리를 더 팍팍하게 만들고 있다. 장담컨대 대한민국 국민 모두에게 한 달 이상의 바캉스가 현실화된다면 시위대가 광장을 사용할 일은 비약적으로 줄어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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