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만 명이 넘는, 전국에서 230만 명이 모여 만든 광장의 촛불이 대통령 탄핵이라는 국회의 결정을 이끌어냈다. 10월 말부터 시작된 광장의 촛불은 국회 탄핵 가결의 결정적 국면이 되었던 12월 3일까지 모두 6차례 대규모 집회를 만들어 냈다. 광장에서는 참가한 시민, 노조, 사회단체들조차 예상하지 못했던 규모에 놀라운 상상력과 풍자가 더해졌다. 새누리당 정진석 원내대표가 탄핵 의결 하루 전 내뱉은 “광장 민주주의가 의회 민주주의를 대체할 수 없다”는 반발은 광장 민주주의의 승리로 귀결되었다.

연합뉴스 자료 사진

듣기에서 시작하는 광장 민주주의

광장의 민주주의는 타인의 목소리를 잘 듣는 태도와 행동에서 시작된다. 함께 외칠 구호가 듣기에서 시작하듯 말이다. 그런데 타인의 목소리를 어떻게 듣는가에 따라 광장을 향한 참여는 달라진다. 우선 타인의 목소리에서 자신이 동의할 수 있는 입장을 발견하는 방식이 있다. 다양한 목소리들 중에 교집합을 찾는 과정은 ‘합의된 목소리’를 만들어 낸다. 지난 일곱 차례 광장의 시민들은 노동자, 자영업자, 농민, 학생,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 등 다양한 정체성이 낼 목소리의 교집합으로 “박근혜 퇴진”을 택했다. 명료하고 목표가 단일한 이 요구는 시간이 정해진 위기 국면에서 참여한 사람들의 규모가 클수록 강력한 효과를 낳는다. 국회로부터 이끌어낸 234표의 대통령 탄핵 찬성이 이 효과였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촛불의 광장에서는 타인의 목소리를 듣는 또 다른 방식이 있었다. 타인의 목소리에서 나와 다른 입장과 의견을 찾아내어 차이를 발견하는 방식이다. 서로 간의 차이에 대한 확인이 반드시 방관이나 분열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도리어 자신의 한계를 돌아보고 성찰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이 때 나오는 목소리는 합의된 목소리가 아닌 다양하고 분산된 목소리들이다. 물론 이런 목소리들이 어떤 효과를 가져 올지는 누구도 확신할 수 없다. 그러나 광장이라는 공간은 이들을 잠정적으로 묶어주고 서로에게 관심을 기울이게 만들어 준다.

광장에서의 두 가지 대화

합의된 목소리나 다양하고 분산된 목소리들 모두 광장에 모인 사람들 사이에 대화에서 만들어진다. 타인의 목소리와 교집합을 만들기 위해서는 타인의 목소리를 자신이 모방하거나 반복하며 끊임없이 “확인”해야 한다. 반면, 다양한 목소리들이 광장에 공존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자신의 입장을 피력하는 일방적인 대화가 아니라 상대의 입장과 차이를 확인하기 위한 “물음”이 오가야 한다. 이런 대화의 형식은 하나가 아니다. 광화문 광장 본무대의 발언, “장수풍뎅이연구회”와 같은 깃발들의 행진, 소와 말을 동원한 풍자, 직접 제작한 손피켓과 행진용 플랑카드의 상상력 등은 언어와 기호가 교환되는 커뮤니케이션의 양식들이다.

합의된 목소리를 만들 ‘확인’과 다양한 목소리들에 귀를 기울일 ‘물음’은 광장에 참여한 개개인의 의지 뿐 아니라 태도 또한 필요로 한다. “박근혜 퇴진”이라는 합의된 목소리는 타인과 같은 감정을 느낄 때 감탄으로 나타난다. 광장에 처음 나왔거나 예상하지 못한 규모의 시민들이 점점 늘어가면, 우리는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다니!”라는 탄성을 터트린다. 이러한 확인의 감정은 다시 미디어가 재현하는 경이로운 촛불의 스펙터클을 통해 광장 밖의 대중들에게 확산된다.

이와는 달리 다양한 목소리들을 발견하는 태도는 타인과의 차이에 대한 인정보다 의문에서 시작된다. “어떻게 저런 사람들이 나와 같은 입장일까?”라는 의문이 그것이다. 물론 이런 의문이 궁금함에 그치지 않고 타인에게 던지는 물음과 대화로 이어져야 한다. 왜 성소수자들이 자신과 같이 박근혜 퇴진을 외쳤는지, 농민들이 박근혜 퇴진으로 무엇을 얻으려하는지에 대한 물음과 대화가 오갈 때, 광장의 민주주의는 대통령 한 개인의 퇴진 그 이상을 얻어낼 공동체가 될 수 있다. 합의된 목소리를 전달하는 미디어는 이러한 의문과 대화를 매개하지 않는다. 도리어 미디어는 다양한 목소리를 차이와 분열로 만들며, 광장의 대화에 참여할 수 없었던 이들에게 그곳을 무질서와 대립의 공간으로 재현한다.

국회의 탄핵 가결까지 광장에서는 합의된 목소리를 만들어내는 대화가 더 중요했을지 모른다. 다양한 입장들 사이의 교집합을 찾기 위한 대화는 마이너스(-)의 대화가 될 수밖에 없다. 철도노조는 성과연봉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파업을 정리했다. 전농은 트랙터까지 끌고 왔지만 농산물 최저가격에 대한 요구를 관철하지 못했으며, 언론노조는 언론장악 방지법의 국회통과를 이루지 못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 직접 연루된 목표가 아니라면 어느 것 하나 뚜렷한 절박함을 드러내지 못했다. 각자의 당면한 목표가 미뤄지더라도 ‘박근혜 퇴진’이라는 합의의 목소리를 위한 대화에 참여한 셈이다.

넓어질 광장에서 어떤 대화를 할 것인가?

그러나 이제 우리는 광장에서 어떤 대화를 할 것인가? 헌재의 탄핵 결정을 기다리며 합의의 목소리를 계속 낼 것인가? 아니면 노동, 언론, 교육, 농민, 환경, 젠더, 청년 등 다양한 목소리들이 서로에게 물음을 던지며 새로운 민주주의의 단초를 발견할 플러스(+)의 대화를 할 것인가? 이런 대화가 이뤄질 광장은 반드시 광화문일 필요는 없다. 각자가 처한 일상의 공간과 노동의 현장, 지역 공동체의 공간이 한국 사회라는 공동체의 공간을 구성해 낼 수 있다. 이미 우리는 지난 지역 촛불 집회를 통해 사람들이 반드시 서울 광화문이라는 한 곳으로 ‘집중’하지 않아도 대화가 가능했음을 경험했다. 다만 이제는 서로의 공통된 입장을 찾기 위한 대화 뿐 아니라, 서로가 물음을 던지고 자신을 돌아볼 대화가 필요할 뿐이다.

광화문이라는 물리적 공간을 넘어 확장될 광장 민주주의는 목소리들이 만날 매개(media)를 필요로 한다. JTBC, 한겨레, 경향, TV조선과 같은 언론이 합의된 목소리를 낼 소재를 제공한 미디어였다면, 지금부터는 또 다른 미디어들이 더 많이 필요하다. 탄핵의 결정, 정치권의 재편, 광화문의 스펙터클은 앞으로도 여전히 합의된 목소리를 위한 재현의 소재가 될 것이다.

그러나 더 넓어질 광장에서는 다양한 목소리들이 만날 공간을 제공하고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며 대화를 가능케 할 미디어가 필요하다. DJ DOC의 광화문 본무대 공연 취소에 대한 대화, 최근 논란이 되었던 ‘시민의회’ 제안에 대한 의견들은 왜 <100분 토론>이나 <심야 토론>의 주제가 될 수 없는가? 다양한 목소리들과 서로에 대한 물음이 오가는 대화보다 하나의 결론을 향해 합의를 바라는 대화가 더 즐거울 지도 모른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결코 즐겁지 않다. 의문과 물음이 오가고 오해가 생겨나며 이해를 하기까지 어느 하나 쉽지 않은 과정이 민주주의이다. 광장의 대화를 ‘시민혁명’이라 치켜세운 지금의 미디어 중에서 이런 대화를 매개할 공공성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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