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생각해도 노무현은 사람이 참 순했습니다. 비록 3당야합을 반대하는 과정과 5공청문회를 통해 옹골차고 당찬 이미지로 뜨긴 했지만 그러나 그의 성품은 기본적으로 신사적이었습니다.

촌놈에게 신사적이란 말이 가당키나 하냐고 눈을 흘길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내 말인 즉, 영국 신사와 같은 젠틀함을 갖췄다는 게 아니라 사람을 너무 쉽게 믿었다는 겁니다. 내가 선하게 대하면 상대도 나를 선하게 대해 줄 거라는 그런 선량한 믿음 말예요.

그가 대통령에 당선되자마자 시도한 것이 검사와의 대화였습니다. 필경 정권마다 갈짓자 행보를 거듭했던 검찰의 올바른 자리를, 국민이 보는 앞에서 대통령과 평검사들과의 허심탄회한 대화를 통해서 모색해 보자는 게 행사의 취지였을 겁니다.

그러나 기발하고 순진하다 못 해 황당하기까지 한 이 대화를 보면서 내내 머리가 지근거렸습니다. 이런 식으로 나라를 이끌자고? 이런 방식으로 난마처럼 얽힌 시국을 헤쳐 나가자고? 오마이 갓~!

2003년 3월 9일 진행됐던 노 대통령과 전국 평검사들과의 대화. ⓒ청와대

노무현은 검사들을 믿었을 겁니다. 자기가 나서서 이렇게 온 국민이 보는 데서 대통령과 대화하는 판을 깔아줬으니 이들도 뭔가 시대적 분위기를 읽고 거기에 걸맞은,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 줄 수 있으리라.

그게 순진한 착각이었다는 건 얼마 지나지 않아 금세 드러났습니다. 평검사들은 노무현의 친인척 문제까지 꺼내들며 대통령을 공격했고, 결국 노무현 입에서 "이쯤 되면 막가자는 거지요?"라는 노기 어린 말까지 터져 나왔으니까요.

되돌아 보면, 이 장면이 노무현 정권의 앞날을 보여주는 조짐이었던 셈입니다. 노무현은 강하게 밀어붙여야 할 상대 앞에서 외려 자신을 내려 놓았습니다. 절대 믿어서는 안 될 상대 앞에서 외려 자신을 무장해제시켰습니다.

권력의 정점이라는 대통령 자리에 오르고도 권력의 속성을 전혀 이해하지 못 하고 지나치게 나이브했다고나 할까요? 그런 식으로 노무현이 떠나보낸 국정원과 검찰이 훗날 그에게 어떤 짓을 했는지 다들 아시지요?

이명박근혜 정권을 겪으면서 권력의 애완견으로 전락한 검사들을 조롱하고 비판할 때 자주 쓰는 말이 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 앞에서 보여줬던 그 서슬퍼렇던 기개는 어디로 갔느냐"고. 그러나 그 대상이 잘못됐습니다. 탓하라면 차라리 노무현의 유약함과 미숙함을 탓해야지요.

검사가 무슨 죄가 있습니까? 그들은 태생부터 살아있는 권력 앞에서만 머리 숙이도록 설계되고 그렇게 길러진 충견들입니다. 제 손을 탈탈 털어버린 무력한 대통령에게 충성할 그런 미련한 검사가 세상 천지에 어디 있습니까? 물론 예외적인 검사가 아주 없는 건 아니지만.

듣자니, "나는 조직에 충성하지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윤석렬 검사의 말이 요즘 화제가 되고 있다지요? 정상적인, 너무나 정상적인 그의 말이 왜 이렇듯 화제가 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건 작금의 풍토가 비정상이 정상으로 보일 정도로 극렬하게 휘어지고 찌그러져서 그런 거 아닙니까? 그래서 애완견들만 모여 있는 줄 알았더니 그래도 정상적인 사람이 한 명은 끼어 있네? 하며 다들 놀라고 반가워 하는 거 아닙니까?

지난달 29일 오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2017 국민통합과 정권교체를 위한 국민통합위원회 출범식'에서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전 대표(왼쪽)와 이재명 성남시장이 인사를 나누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박근혜 탄핵 가결 이후, 대한민국의 시계는 대선정국을 향해 급하게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현재로선 문재인과 이재명 투톱을 내세운 더민주의 질주가 가장 돋보이는 게 사실입니다. 새누리의 이합집산과 더불어 반기문이 본격적으로 가세하는 새해가 되면 정치풍경이 또 달라질지도 모르지만 말입니다.

각설하고, 이명박근혜 정권을 심판하고 최순실 부역자들을 청소해야 할 엄중한 책무를 지닌 새로운 지도자는 절대로, 노무현처럼 그저 사람을 좋게 좋게만 대하는 선량하고 순한 사람이 돼서는 안 됩니다.

'잃어버린 10년' 정도가 아니라 유신시대로까지 뒷걸음친 이 나라를 바로 세우려면 비둘기처럼 순결하되 뱀처럼 교활하고 사자처럼 용맹하면서도 무소의 뿔처럼 돌진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권력을 제대로 활용해서 털 곳은 시원하게 털고, 밝힐 곳은 낱낱이 밝히고, 제거해야 할 것은 야무지게 제거해서 촛불을 든 온 국민의 속을 사이다처럼 뻥 뚫어주고 그러면서도 눈물마저 굳어버린 세월호 유족들의 아픔을 섬세하게 어루만져줄 수 있는 그런 대통령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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