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레보위츠는 베네수엘라의 볼리바르혁명을 두고 ‘급진적 내생적 발전’을 언급한 바 있다. 그는 베네수엘라 사회가 바람직한 발전 경로를 갖기 위해서는 어떤 현실주의적 토론도 베네수엘라인들의 필요에 따라 시작해야 한다고 살폈다. 이러한 전제로부터 레보위츠는 석유자본과 기간산업의 소유 문제, 국가적인 미션 프로젝트, 민주적 통제와 주체의 비전 등에 있어 실현가능한 사회화(socialization)의 경로를 발견한다.

볼리바르헌법에는 양립할 수 없는 요소가 공존한다. 한편으로는 미국식 신자유주의 정신이 함축된 워싱턴 컨센서스(Washington Consensus)의 요소를, 한편으로는 민중이 권력의 대상이자 주체라는 전복적 요소를 포함한다. 어느 요소가 승리할 것인가가 궁극적인 문제이다. 볼리바르혁명이 새로운 사회의 건설로 귀결될 것인지, 민중주의적 특징을 가진 자본주의의 새로운 변종으로 전락할 것인지는 현재진행형이자 미래의 일로, 단정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베네수엘라에서 내생적 발전의 핵심은 지역공동체에 뿌리박은 지속가능한 농업발전 프로그램이었다. 나아가 더 많은 야심찬 프로그램으로, 2004년 3월부터 인민과 정부의 협동조합 기획인 미션 부엘반 카라스(Vuelvan Caras Mission)를 실행했다. 미션 부엘반 카라스는 단지 내생적 발전에 머무르지 않고, 특수한 사회적, 경제적 결합과 연관되어 베네수엘라의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변혁에 상당한 기여를 했다.

한미동맹과 한미FTA, 비정규직과 사회적 빈곤, 기간산업과 미디어의 사유화를 특징으로 하는 한국사회에서 대안으로서의 급진적 내생적 발전 모델을 제시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바람직한 발전 경로를 찾기 위해서는 대한민국 사회구성원들의 필요에서 출발해야 하고, 경로를 충족하는 미션은 의식적인 주체들의 노력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소급하면 대한민국 미디어의 발전전략은 미디어 주체들의 창조적인 구상과 헌신적인 노력에서부터 이루어져야 한다. 누군가는 응당 미디어 발전의 내생적 경로를 제시해야 하고, 미디어 당사자들과 토론하며 합의를 이루어가야 한다.

미디어 환경 재편의 시나리오가 일단락을 앞두고 있다. 폭력적 관철이든, 타협을 통한 처리든 절차에 따라 의결될 테고, 그러면 ‘언론악법’은 통과된다. 대의제를 부정하지 않는 한 통과 절차에 대한 불만은 단지 정치적 불만이며 그 수준의 정치적 공방이 이루어질 뿐이다. 12년 전 안기부법 날치기 통과나 5년 전 탄핵, 3년 전 비정규직법 날치기 통과 따위를 돌아보면 가늠이 될 것이다. 많이 겪어본 만큼 분노의 표출보다는 이성의 안목이 더 중요한 시점이다.

한나라당은 ‘방송산업 경쟁력 강화’ ‘일자리 창출’ ‘여론 다양성’ 등의 주장을 펴왔다. 반면 민주당과 미디어행동 등 시민사회단체는 조중동과 자본에게 방송 진출의 길을 열어주고, 국가의 시민사회에 대한 감시 통제를 강화한다며 반발해왔다. 대승적 합의 같은 건 애당초 기대하기 어려웠는데, 그만큼 찬성과 반대 사이의 골이 깊었기 때문이다.

▲ 민주당, 민주노동당, 창조한국당, 진보신당, 시민사회단체가 공동으로 18일 오후 국회 본청 앞 계단에서 '국민여론무시, 언론악법 강행 한나라당 규탄 기자회견'을 열어 규탄 구호를 외치고 있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한나라당의 미디어 전략은 미디어의 시장주의적 재편을 특징으로 한다. 미디어가 경쟁력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는 미디어의 산업적 측면을 부각하는 한편 기존의 공공적 요소는 해체하거나 축소하는 것이 불가피하다. 그래서 나오는 것이 방송산업의 경쟁력 강화이며, 산업적 재편은 일자리를 확대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는 매우 익숙한 논리인데, 한미FTA 추진 당시 노무현 정부가 개방의 근거로 사용하던 선동 매뉴얼과 한 치도 다르지 않다. 실증할 수 없지만 기대할 수 있다는 신념이 폭력적 관철을 정당화한다.

한나라당의 미디어전략은 또한 조중동의 방송 진출(신방 겸영)을 보장하는데, 여론의 보수적 독과점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기획됐다는 점이 특징이다. 이는 대의제에서 미디어의 최소한의 중립적 위치조차 배격하고, 정치권력에 대한 미디어의 하위 종속적 배치의 성격을 갖는다.

미디어위원회 야당 측 위원들은 100일 간의 사회적 논의 과정에서 이같은 사실과 성격, 문제점을 낱낱이 들춰냈다. 언론악법이 통과되면 미디어공공성이 급격히 후퇴하고 표현의 자유가 심대하게 침해받는다며 반대 주장을 펼쳤다. 미디어 위원들로서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이고 최선을 다했다는 평가다. 여론도 나쁘지 않다. 하지만 아쉬움이 없지 않다. 언론악법이 아니라는 건 알겠지만, 변화하는 미디어 환경 속에서 미디어의 공공적 측면과 산업적 측면을 포함하는 내생적 발전 경로가 무엇인가에 대한 시사점은 보여주지 못해서다.

내생적 발전 경로를 구체화하기 위해서는 소유, 조절, 통제의 사회화 과정에 대한 긴장이 필요한데, 미디어전략의 구상도 이에 조응할 필요가 있다. 그러니까 과거 자본에 대한 국가의 우위 속에서 국가주도의 성장전략에 따라 구축된 공공성 영역을 사수하는 데만 집중하는 것은 발전 경로의 상상력을 제약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따라서 미디어의 산업적 재편을 촉진하는 언론악법의 문제점을 비판하되, 이제는 민주주의의 후퇴라는 정치적 선동과 도적적 비판에서 벗어날 시점이 되었다. 기존 방송과 신문, 인터넷에 대한 국가의 지원정책과 관련 법제도를 유지하는 차원에서 미디어공공성의 해체를 탄식하는 것만으로는 내생적 발전 동력의 창출을 꾀하기 어렵다.

공영방송의 해체와 1국(관)영-다민영방송 체제로의 재편, 지역방송과 종교방송의 토대 위협, 종이신문의 위기, 인터넷 공간의 통제를 특징으로 하는 미디어 환경이 곧 도래한다.

이같은 환경에서 미디어 발전의 급진적이고 내생적인 발전 경로는 무엇일까. 미디어 당사자들의 아래로부터 미디어를 통제하는 힘을 어떻게 키워나갈 것인가. 사회구성원의 커뮤니케이션 권리 실현의 전략 구상은 어떤 프레임과 콘텐츠를 기반으로 이루어져야 할까. 부문과 부문 간에 어떤 연대 전략을 갖고 배치해나가야 할까. 미디어 당사자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문제를 던져 자극하고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

대한민국 미디어의 내생적 발전 경로를 제시할 만한 조건과 실력을 갖춘 이들로는 우선 야당 측 미디어 위원들을 꼽을 수 있겠다. 미디어 위원들이 100일간 축적한 사회적 논의의 경험은 말 그대로 사회적인 것임을 상기해야 한다. 그리고 어떤 현실주의적 토론도 미디어 당사자의 필요에 따라 시작해야 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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