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까지만 해도 비정규직법과 언론악법은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제각기 자기 운명을 개척했을 뿐이다. 세상 일은 모른다. 6월이 되니 두 법이 밀접한 관계에 놓여 있다는 것이 들통 났다.

26일 한나라당 단독 국회가 열렸다. 열어놓고 보니 두 법은 이미 떼려야 뗄 수 없는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두 법의 운명은 어디로 귀결될 것인가. 이르면 주말을 거쳐 29~30일에, 그렇지 않으면 7월 초 또는 회기인 7월25일까지 계속 지켜봐야 한다.

▲ 한나라당 안상수 원내대표가 26일 의원총회에서 "오는 29일 상임위를 소집해달라는 요구서를 오늘 제출할 것"이라며 "29일부터 당당하게 상임위를 열어 법안을 심의하고 통과시킬 것은 시킬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출생 성분 다르나, 동시대에 같은 경험

비정규직법은 노동자의 고용과 생존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언론악법은 시청독자의 미디어 주권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비정규직법이 멀쩡한 사람의 몸을 공격하고, 언론악법은 역시 멀쩡한 사람의 정신을 공격한다는 점에서 성분이 조금 다르다.

출생 시기도 다르다. 비정규직법은 2003년 9월에 잉태되어 2006년 11월30일에 탄생한 법이다.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 의원들이 민주노동당 의원들의 난동을 제압하고 가볍게 통과시켰다. 언론악법은 2004년 한나라당이 품고 고이 간직하고 있다가 2008년 가을에 좋은 세상 만나 탄생을 앞두고 있는 법이다.

그런 두 법이 어찌하다 보니 비슷한 경험을 치르게 됐다. 비정규직법은 5인연석회의의 경험을, 언론악법은 미디어발전국민위원회의의 경험이다. 둘 다 사회적 논의(합의)의 경험이다. 소통 자체가 안 되는 판에 테이블이라도 꾸렸으니 일단 사회적으로 선택받은 건 분명하다.

5인연석회의는 지난 6월18일 첫 만남을 가졌다. 임성규 민주노총 위원장, 장석춘 한국노총 위원장, 김재윤 민주당 간사, 조원진 한나라당 간사, 권선택 자유선진당 간사 등이다. 5인연석회의는 △비정규법 개정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지원금 △비정규직 노동자 보호 대책 △특수고용직 노동자 보호대책 등의 의제를 다루되, 연말까지 틀을 유지하기로 합의했다.

하루 전날인 6월17일 미디어위원회는 깨졌다. 야당 측 위원들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면서 파장이 됐다. 하나는 깨지고 하나는 시작되고, 이날까지만 해도 두 법이 지금처럼 깊은 관계를 맺을 줄은 아무도 몰랐던 거다.

▲ 야4당 의원들과 시민사회단체 인사들이 26일 국회 본청 앞 계단에서 '단독국회 규탄, 언론악법·비정규악법 저지' 공동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앞줄 왼쪽부터 김영호 언론개혁시민연대 대표, 이강래 민주당 원내대표, 강기갑 민주노동당 대표, 유원일 창조한국당 의원, 노회찬 진보신당 대표. ⓒ 오마이뉴스 남소연
두 개의 시나리오, 동시 탄생 또는 시차를 둔 탄생

두 법이 새로운 탄생을 앞두고 있다. 칼자루를 쥔 한나라당이 결연한 의지를 갖고 있어서다. 현재로서는 막아낼 특별한 뭔가가 없다. 탄생은 기정사실인데, 그렇다면 어떤 과정을 거치면서일까.

비정규직법이 놓인 처지부터 보자. 7월1일 비정규직법 시행 2년을 앞두고, 비정규직법이 보호법이 아니라 양산법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건 2년 기간 제한 때문이 아니었다. 자본은 2년이 되기 전에 비정규직 노동자를 집단으로 해고하고, 빈 자리에는 또 다른 비정규직 노동자를 채워 넣었다. 길거리에 비정규직이 넘쳐났다. 부랴부랴 대책을 세우자고 만들어진 게 5인연석회의다.

양 노총은 비정규직법 시행 유예 전제가 없다는 조건으로 5인연석회의에 참여했고, 4차회의가 진행된 오늘까지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노동자 당사자인데, 유예가 극약처방이고 정규직 전환기금이 진통제라는 사실을 어찌 모르겠는가.

23일 한나라당은 의원총회를 열고 법 시행 3년 유예를 당론으로 정했다. 간사에게는 야당과의 합의를 위해 2~4년을 놓고 논의하라는 권한을 주었다.

26일 오후에 열린 6차 5인연석회의에서 한나라당은 유예 기간을 2년으로 줄이고 내년 정규직 전환기금을 5천억원에서 1조원으로 늘리자고 제안했다. 이에 대해 민주당과 한국노총, 민주노총은 ‘유예 불가’로 맞선 것으로 알려졌다. 민주당은 유예 기간 6개월, 전환기금 향후 3년간 3조6천억원을 복안으로 하고 있었다.

민주당이 ‘유예 불가’ 입장으로 선회한 건 오늘 오전에 있었던 추미애 환노위원장과 양 노총 위원장의 면담 영향 탓이다.

양 노총 위원장이 오늘 오전 환노위 소회의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법 시행 유예를 전제로 만들어진 5인연석회의였다면 아예 참석하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밝힌 후 추미애 환노위원장을 만나 의사를 전달했고, 추미애 위원장이 “5인연석회의에서 합의안이 나오지 않으면 정부안도, 한나라당안도 상정할 수 없다”고 화답한 것.

▲ 한나라당 안상수 원내대표가 26일 오후 국회 예결위회의장에서 의원총회를 마친 뒤 로텐더홀에서 단독국회 철회를 요구하며 농성중인 민주당 의원단 앞을 지나고 있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이번 국회에서 한나라당이 짤 수 있는 법안 처리 전술 시나리오는 현재로서는 두 가지로 압축된다.

하나는 비정규직법과 언론악법을 포함한 MB법안을 적시에 직권상정해 처리하는 방법, 다른 하나는 비정규직법을 선 처리한 후 임시국회 회기인 7월25일 전에 때를 봐서 언론악법을 처리하는 방법.

전자를 보자면 29~30일 일방 처리 가능성도 얼마든지 제기된다. 후자를 보자면 비정규직법을 모양 좋게 처리하는 수순을 밟아야 한다. 민주당이 ‘유예 불가’를 고집하는 한, 비정규법안의 29~30일 조기 처리는 어려워진다.

민주당이 공식적인 회의 자리에서 ‘유예 불가’ 입장을 천명한 만큼 비정규직법 선 처리 그림은 어려울 수 있다. 그런데 물밑에는 다른 기류의 흐름이 감지된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적정한 수준에서 비정규직법을 합의할 가능성이 제기된다. 27~28일 주말 동안 양 당이 비정규직법 선 처리 합의를 할 수도 있다는 관측이다. 국회 분위기는 급반전된다.

이 경우 한나라당은 세 가지를 얻는다. 하나는 단독 국회의 정당성, 하나는 비정규직법 개악, 하나는 언론악법 처리로 가는 징검다리. 그리고 민주당은 한 가지를 얻고 한 가지를 잃는다. 얻는 것은 언론악법 직권상정 일시 보류, 잃는 것은 4당 공조와 시민사회단체와의 교감 관계. 작년 12월부터 잘 다져온 반MB 전선도 궤멸한다.

비정규직법과 언론악법은 이렇게 연을 맺었고, 관계는 클라이막스를 향하고 있다. 일시에 손을 잡고 태어날 수도, 비정규직법의 과감한 희생으로 언론악법의 탄생을 조금 더 지연될 수도 있다. 주말에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무얼 하는지 잘 살펴보면 29~30일의 그림이 보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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