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 아닌 ‘독재’ 논쟁이 한창이다. 조중동을 영토로 삼는 헛나이 자신 철부지들은 ‘독재’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독재’가 아니라는 증거라는 희한한 논리를 펴고 있다. 그러면서 ‘진짜 독재가 뭔지 맛을 좀 봐야 정신을 차리겠느냐’는 협박을 던지고 있다. 정말 ‘독재’는 그 표현을 공공연히 사용할 수 있는가 혹은 그렇지 않은가를 분기점으로 구분, 형성되는 것일까? 물론, 아닐 게다. 다만 그들의 주장처럼 표현의 사용 여부를 포함한 일련의 정도들을 두고 과거의 강고한 독재와 오늘의 연성화된 독재의 차이들을 설명할 순 있을 것이다. 단, 그렇다고 변비나 설사나 본질이 ‘똥’이라는 것이 달라지지는 않지만.

독재는 정치적인 영역, 공적 표현의 장을 기준으로 판단되는 것이다. 지적하듯, 몇 개의 정치적 퇴행을 두고 ‘독재’라는 단어가 남발되는 것이라면 정략적이라 볼 수도 있다. 하지만, 현재 상황의 심각성은 정치적인 영역, 공적 표현의 장의 퇴행이 사회 전반의 전체적인 분위기에 강제력을 가지면서 사회 모든 분야의 행위와 논리들이 회귀지향적인 흐름에 휩싸여 있다는 점이다. 독재 논쟁이 촉발된 맥락도 그것이다. 학문적으로, 정치적으로 독재 개념이 어떻게 구성되는가의 절대성 여부와는 별개로 국민들이 정권이 독재라고 느낀다. 심각한 것은 바로 그 상대성이다. 확실히, 개인적 차원의 문제라고 여겨지는 것들의 위축되고 있고, 취향과 스타일의 문제가 형법의 기준으로 획일화되고 있다.

얼마 전, 연예인의 사생활이 경찰에 의해 기획 수사되고, 강남 클럽의 풍속이 포털에서 애꿎은 도덕 논쟁으로 번지더니, 서울시에 의해 문화지구로 지정된 홍대 클럽들이 단속의 철퇴를 맞고 있다. 이달 들어 벌써 두 차례나 경찰이 홍대 클럽에 들이닥쳐 별 다를 것 없는 ‘풍기’를 새삼 문제 삼아 공연을 중단시켰다고 한다. 더불어, 타투숍에 대한 ‘후리가리식’ 단속도 오랜만에 재개되었다. 일각에서는 강남을 중심으로는 클럽과 연예인을 단속하고, 마포를 중심으로는 클럽과 문신을 단속하는 수사가 기획되고 있다는 제보도 있었다. 요 몇 주간 예사롭지 않게 움직이는 경찰을 보며, 이제 ‘대마초’를 단속하겠구나 싶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영화배우 오광록이 대마초 흡연 혐의로 검거되었다.

물론, 지구상의 거의 모든 나라들이 ‘마약’을 법률로 관리한다. 그러나 그 법률들이 우리보다 진일보한 점은 마약의 개념과 범위에 대한 사회적 갈등을 앞서 겪고 난 이후 ‘개인의 자기 결정권을 어디까지 국가가 강제할 수 있는가?’를 둘러싼 값비싼 경험 값이 쌓여있다는 점이다. 압축적으로 말하자면, ‘환각’을 통제하기 위해서 국가가 모든 것들을 틀어막고 처벌하는 일이 매우 부당하다는 것을 체제가 깨달았다는 점이다. (단, 미국만은 예외이다. 미국은 모든 종류의 마약들과 강력한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거의 유일한 나라이면서 동시에 실패하는 유일한 나라이다.)

대마초가 ‘마약’의 범주에 포함되고, 마약이 다시 ‘환각’이란 개념으로 연상, 치환되는 과정에서 우리는 한 번도 그 욕망과 감각이 개인의 권리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었다. 아니, 그 범주와 개념의 제자리 찾기가 필요하다는 생각조차 불경한 것이었다. 환각은 여전히 본드 부는 비행 청소년이나, 클럽에서 문란한 생활을 즐기는 피폐한 젊음의 이미지로 유통되고, 마약은 ‘건전한 사회’와는 절대로 양립할 수 없는 반사회적 물질이라는 포박을 벗지 못한 채 그 자체로 범죄가 되고 있다.

▲ 조선일보 6월 22일자 8면.
따져 물어야 한다. 개념적으로 ‘환각’은 그 자체로 범죄인가를 따져야 하고, 현실적으로는 대마초는 ‘마약’인가를 물어야 한다.

환각의 사전적 뜻은 ‘실제로는 자극이나 대상이 없는데도 그것이 실재(實在)하는 듯이 감각적으로 느끼거나, 느꼈다고 생각하는 감각’이다. 1938년 스위스의 연구실에서 LSD-25(최초의 의료용 환각제)가 개발된 이래 지금까지도 환각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관한 분분한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감기약을 먹으면 뺨이 얼얼해지는 것도 일종의 환각 증상이다. 물론, 환각은 환각제 개발 이전에도 존재해왔다. 어떤 공동체이건 일종의 환각 체험을 역사적 경험, 문화적 풍습, 종교적 전통으로 갖고 있다. 말하자면, 환각에 대한 인류의 욕구는 어떤 기준으로 ‘환각’을 통제할 것인가를 고민해 온 것보다 훨씬 이전부터 존재해왔던 역사이다. 국가적 통제 없이, 지극히 사적인 영역의 행위로, 공동체의 자율적 질서에 의해 오랫동안 별 탈 없이 관리되어온 영역이란 얘기이다. 국가를 중심으로 한 위계질서에서 효율성에 기반한 통제와 훈육의 관점에서 ‘환각’을 바라보며 법으로 금지하기 시작한 행위는 인류 역사 전체에서 보자면 매우 최근의 일이다.

대마초 역시 마찬가지이다. 대마초 규제의 역사는 자본주의 성장의 역사와 대략 일치된다. 약용을 비롯하여 다양한 용도로 활용되던 대마초는 자본주의의 고도 성장과 맞물려 그 씻을 수 없는 해악으로 인해 금지되기 시작하였다. 대마초의 유일한 해악은 게을러진다는 것이다. ‘대책없는 게으름’이야 말로 자본주의 체제가 두 눈 부릅뜨고 저주해온 오랜 적이다. 건강한 노동력을 전제로 하는 생산 중심의 자본주의 체제가 대마초에게 가했던 폭력의 올가미는 그래서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공고해졌고, 더 교묘한 상징 조작이 가해졌다.

자본주의와 대마초의 화해할 수 없는 이 저주의 관계는 대마초와 담배의 지위를 보면 보다 확고해진다. ‘금욕주의’는 자본주의가 강제한 오랜 전통이며 자본주의 발달의 근원적 힘이었다. 담배는 용납되고 대마초는 배척당한 극적 대비가 정확히 이 자리에 위치한다. 담배가 긴 노동의 중간을 메우는 짧은 위로의 연기었다면 대마초가 상징하는 삶의 방식은 금욕적 노동에 기초한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 근본적으로 저항하는 것이었다.

영화배우 김부선씨는 지난 2005년 한국 사회에 처음으로 대마초의 문제를 던졌었다. 당시, 나는 그 뜨거웠던 논쟁의 실무자였다. 그 뜨겁던 시간이 지나고 지금 무엇이 남았는가를 돌아보면 그저 안타깝고 또 막막할 뿐이다. 그저, ‘그래, 독재로구나’ 이러면서 고개만 주억거리고 있을 때, 다시 김부선씨가 시대의 퇴행에 후련한 메시지를 던졌다. 그녀는 개념적으로 대마초가 마약으로 구성될 수 있느냐고 물었고, 행위를 처벌한다는 근대 이후의 법정신에서 현행 마약 법률의 문제점도 짚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현재의 대마초 수사가 정국 전환용이자, 길들이기 수법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물론, 그녀는 지식인이 아니기에 정제되어 있지 않고, 전문가가 아니기에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난 2005년이 그랬듯 그녀는 일관된 용기로 세상과 마주하고 있는 거의 유일한 연예인이다. 대마초의 아이콘이 된 이후 그녀의 삶은 그 이전에 비해 하등 나아진 것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방송은 여전히 그녀를 기피하고, 연예인의 사회적 발언에 관대하지 못한 사회의 시선이 그녀의 삶을 붙들고 있다. 이번 발언의 경우에도 대마초를 한약에 견준 그녀의 비유가 적절했는가 하는 비본질적 논란만 뜨거워진 채 그녀가 던진 메시지의 본질은 묻히고 있다.

이미 되찾은 줄 알았던 자유와 권리들이 원래 있었던 쥐꼬리만큼의 자리로 돌아가고 있다. 왜 원래 있던 걸 빼앗냐는 물음을 앞서 차단하기 위해 ‘클럽’을, ‘연예인’을, ‘문신’을, ‘대마초’를 경찰은 열심히 조지고 있다. 그 자유란 것이 퇴폐적인 것이라고, 음란한 것이라고, 불온한 것이라고, 존재하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묶어버리는 전형적인 수법이다. 나는 지금 이것이야 말로 확실한 ‘공안’의 수법이고 연성화된 ‘독재’의 증거란 말을 하려는 것이다. 너무나 뻔뻔하게 물량 공세로 몰아 닥쳐오는 상황 앞에 누구랄 것도 없이 우물쭈물 대고 있고, 김부선씨의 메시지는 바로 그 우리 모두의 게으름을 겨냥하고 있는 것이란 얘기이다.

그래 자칫, 이러다간 ‘자유’라는 단어 자체가 왜곡된 인식을 동반하는 현실이 조만간 닥치게 될지도 모른다. ‘자유’는 정치적 입장을 밝힘으로써 획득되어지는 것이 아닐 거다. 실천적 행위를 통해 개인을 둘러싼 ‘문화’를 교체할 때 비로소 도달할 수 있는 무엇일 테다. 개인을 둘러싼 모든 사회적 관계와 그것을 가로지르는 환경 그 자체의 퇴행을 김부선씨의 대마초 발언이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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