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쓰는 입장에서, 제일 괴로울 때가 하나의 소재가 하나의 글로 완결적으로 구성되지 않을 때이다. 요 며칠이 그랬다. 쉴 새 없이 일이 벌어지긴 하는데, 밤하늘 은하수처럼 작렬하는 블로거들의 빛나는 글들 사이에서 고뇌하다, 변별점을 갖춘 그럴싸한 글을 만드는데 계속, 실패했다. 쓰다 말다, 썼다 지웠다를 반복했다.

너무 덩치가 큰 고민이었다. 어제 오늘, ‘민주주의’를 키워드로 하는 몇 개의 사건이 우연히 나란한 시계열로 배치됐다. 민주주의를 염려한 DJ의 ‘독설’을 지지하는 여론이 50%를 상회한다는 조사 결과가 있었고, 네티즌들에 의해 오바마발 ‘시국선언’이라 명명된, 저 멀리 이란의 민주주의에 대한 오바마의 연설이 있었다. 그리고 오늘자 조선일보는 ‘한국에 꼭 맞는 민주주의란 있는가’라는 박효종 서울대 교수의 사뭇 흥미로운 칼럼이 실렸다.

▲ 조선일보 6월 18일자 34면.
주거니 받거니, 맥락과 질서를 달리하는 사물과 발언들이 하나로 집결되는, 그렇다. 화두이다. 민주화 정부 10년을 경험한 체제에서, ‘항쟁’이라고까지 불린 국가적 들불 사태가 딱 1년 전의 일이건만, 문제는 다시 그리고 여전히 ‘민주주의’이다.

다시 그리고 여전히 ‘민주주의’가 화두로 읽히는 세월의 퇴행에 대해서는 여러 차례 썼었다. 민주주의의 총론적 위기에 대한 경고를 날리는 미디어와 글들 역시 무수하다. 조금 다른 얘기를 해보자. 이르자면, 민주주의라고 하는 거대한 무엇을 다시 불러낸 MB를 방어하는 치들의 졸렬함 말이다.

먼저, 왜 민주주의인가. 지금 민주주의가 화두라면, ‘MB’는 이 화두의 ‘화마’쯤 될 것이다. 실제 민주주의가 위기이건, 아니면 조중동류의 지적처럼 이 위기가 무엇인가를 노리고 있는 아우성이건 간에 민주주의 자체를 담론 시장에 올린 방화범이 MB라는 사실을 부정할 순 없다. DJ의 염려는 바로 그 이야기이다. 참여정부 내내 현안에 대해 좀처럼 발언하지 않고 침묵하던 그가 정치적 논란이 거세게 일 것을 알면서도, 거두절미하고 단도직입적으로 MB를 향해 간 것은 이 모든 시작점과 꼭지점이 MB 자신이라는 인식을 가지라는 얘기이다. 오바마의 발언이 재해석된 까닭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가 발언을 뱉은 자리가 MB의 옆자리가 아니었다면 그의 발언은 그저 그런 미국식 외교 수사로 읽히고 끝났을 테다.

가타부타 MB가 대답을 해야 한다. 이렇거니 저렇거니 하는 공론들을 잠재울 방법은 그것 외엔 없다. 돌이켜보면,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이후 국가적 차원의 동요가 일어났을 때, MB는 최소한의 형식적 사과를 담은 담화라도 냈어야 했다. 그 잠깐의 고개 숙임을 통해 정국의 기류를 환기하고, 수세를 공세로 전환할 시간을 벌었어야 했다. 그런데 MB는 하지 않았다. MB의 사과는 MB의 패배가 아니다. 민주주의 이후의 민주화를 살아가고 있다는 실감을 국민에게 전달시켜 주는 행위일 뿐이다. MB는 그걸 패배로 인지하고 있다. 민주화 이전의 민주주의 방식이다. 그러니까 ‘독재’란 소리를 듣고 있는 게다.

바로 이 대목에서 박효종 교수의 글이 지닌 문제적 의미가 포착된다. 한국 사회의 보수가 원천적으로 수권 불능의 집단은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박효종 교수와 같은 이들이 MB의 이 낙후됨을 정색하고 꾸짖을 수 있어야 한다. 민주주의가 담론이 된 정치적 맥락과 민주주의 현재를 이해하는 시간적 감각을 지니고 있노라면, 노무현 전 대통령이 구가했던 탈권위의 ‘간지’를 흉내라도 낼 수 있는 ‘연기력’ 정도는 갖추어야 한다고 MB를 다그쳐야 한다. 하지만 박효종 교수는 뜬금없이 ‘한국에 꼭 맞는 민주주의란 있는가’라고 묻고 있다. 전형적인 물타기, 용왕도 기겁할 물귀신 작전이다.

박효종 교수는 ‘선거민주주의, 대의민주주의, 참여민주주의, 광장민주주의, 토론민주주의’ 등 민주주의를 분류하는 체계와 범주에서부터 격을 전혀 맞추지 못하고, 계통을 혼동하는 교수 안 같은, 아마추어의 모습을 보인다. 그러곤 자신만의 분류법에 따라, 3가지 민주주의의 문제를 예로 드는데 하나 같이 허술하다.

그는 민주주의의 문제와 위기가 MB 때문이 아니라 그 이전 정권에서부터 존재한 문제였고 결과적으로 MB의 책임이 아니라는 자신의 논리를 입증하기 위해 우물쭈물 궤변을 늘어놓고 있다. 선거 민주주의의 문제를 얘기하면서 광장민주주의를 패자부활전이라 칭하고, 전직 대통령의 역할을 마음씨 좋은 할아버지 정도로 상정하는 그의 과감한 무지, 박력 있는 비약은 어안이 벙벙할 뿐이다. 대의민주주의의 ‘삼류’스러움을 지적하며 조건 없는 등원과 국회 폭력을 보는 한나라당적 시각을 견지하는 것은 대의를 가장한 조폭 논리에 다름 아니다. 결국, 그가 말하는 대의민주주의란 약자의 연대를 폭력으로 이해하는 힘의 논리에 다름 아니다.

마지막으로 그가 광장민주주의를 언급한 부분은 그가 ‘민주주의’ 문제를 언급할 자격도 실력도 없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실체가 불분명한 ‘소리없는 아우성’에 의존하여 광장을 폭력으로 도식화하는 그의 비뚤어진 내면은 결국 ‘민주주의의 위기가 MB의 문제가 아니다’라는 한 문장을 거칠게 번안해내는 동어반복에 불과하다. 민주주의에 자기 절제력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논리 자체가 금시초문이지만, 백번 양보하여 그럴 수도 있다손 치더라도 그가 말하는 자기가 대체 누구인지 모르겠다. 국민의 자기절제력을 요구하며 이룩되는 체제는 무엇인가 말이다. 수준 높은 민주주의를 위해 절제되어야 하는 것이 국민의 요구인지 아니면 권력의 남용인지는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해답을 찾을 수 있는 문제인데, 서울대에서 윤리교육을 가르치는 분이 그걸 혼동하니 딱할 뿐이다.

박효종 교수의 부실한 글은 역설적으로 왜 모든 민주주의의 문제가 여전히 MB를 절대화해서 해설될 수밖에 없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MB가 올드보이라는 건 누구나 알고 있다. 진짜 심각한 문제는 올드보이가 그나마 시대적 ‘영감’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조차 박탈한 채 그를 방어하겠다며 미디어에 나서고 있는 ‘경호원’들의 수준이 너무 낮다는 점이다. 이것이야 말로, 불과 1년여 전만 해도 민주주의 이후의 민주화를 논했던 한국 민주주의의 극단적 후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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