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3일 선거 결과가 발표된 후, 이란은 폭풍 속으로 빨려들어가 버렸다. 그 시위를 보고 있노라면 남의 일 같지가 않다. 나를 포함한 많은 한국인들은, 현 정부의 임기가 3년 반 넘게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다음 대선을 걱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란의 이번 대선은 분명히 ‘합법적’이었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보통, 비밀, 평등의 원칙이 지켜지는 가운데 선거가 치러졌다. 선거 유세 과정에서 개혁파 후보인 미르 호세인 무사비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밝은 녹색을 상징으로 삼아 축제처럼 선거운동을 진행해 나갔다. 테헤란의 광장에서 벌어지는 대규모 지지 집회는 외신 기자들의 카메라를 붙들어놓기에 충분했다. 아랍권을 순방하는 오바마 미 대통령의 은밀한 지원 사격도 눈에 띄었다. 바야흐로 이란에도 변화의 물결이 당도하는 것처럼 보였다.

▲ 경향신문 6월 15일자 8면.
막상 투표함을 열고 보니 결과는 기대와 완전히 딴판이었다. 현임 대통령인 마무드 아마디에자드가 62.6%의 득표율을 올리며 상대방 후보에게 압승을 거둔 것이다. 이란의 대선은 결선투표제를 도입하고 있기에, 한 후보자가 과반수 득표를 하지 못하면 결선투표가 진행된다. 하지만 그럴 필요도 없어졌다. 이 압도적인 수치에 무사비를 지지하던 이란 국민들이 분노를 느끼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무사비에 대한 지지 열풍은 분명히 뜨거웠다. 그런데 이렇게 완패했다니? 선거 조작을 의심하지 않을 도리가 있을까?

미국의 인권단체 Avaaz에 따르면, 대선 과정에서 부정행위가 있었다는 증거가 조금씩 등장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한 개별적인 증거들은 아직 공식적인 언론을 통해 공개된 바 없다. 만약 확실한 증거가 나온다면, 이란의 최고 결정기관인 혁명수호위원회는 무사비의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을 것이다. 확실한 증거가 나오지 않는다 해도, 아마디에자드의 지도력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17일 오후 7시 현재까지 시위 도중 사망한 사람들의 숫자는 총 12명. 이 숫자는 앞으로 더 늘어날 것이다.

이 사건을 보며 나는 몇 가지 상념에 사로잡혔다. 우선 테헤란을 뒤덮었던 밝은 녹색의 물결을 짚어보자. 무사비의 지지자들은 주로 여성, 도시에 거주하는 전문직 종사자, 고학력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앞서도 말했지만 그들이 만들어낸 선거 운동은 그 자체가 하나의 축제와도 같았다. 문제는 그러한 ‘축제와도 같은 선거’가 반드시 민주적인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일부 논자들은 여성이 중심이 되어 진행된 선거운동이 도리어 이슬람 원리주의적 사고방식에 고착되어 있는 보수층의 결집을 불러왔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 논리 자체는 부당한 피해자 탓하기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지만, 중요한 것은 거기서 어떤 ‘교훈’을 얻어내느냐이다. 요즘 한국인들은 ‘축제’라는 개념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경향이 있지 않나? 선거도 축제처럼 하고, 홍보도 유세도 축제처럼 하고, 심지어는 시위도 축제처럼 하고, 등등. 특히 촛불시위에 본격적인 사회 이슈를 접목시키려 들 때마다, ‘촛불시위의 자발성이 훼손된다’거나 ‘축제의 장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식의 반발이 없지 않았는데, 이번 사태를 놓고 보면 그 축제라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결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축제처럼 선거운동하다가 결국 목숨 걸고 데모하게 된 이란 국민들을 보면 분명히 그렇다. 무언가를 ‘축제처럼’ 하는 것은 하나의 방법일 뿐이지, 그 자체가 정치적 성격과 성과를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한국과 이란의 경우를 1대1로 비교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도 염두에 두어야 할 필요가 있다. 실질적으로 이란을 지배하는 집단은 혁명수호위원회이며, 최고지도자 하메네이의 입김에 의해 이번 정국의 방향이 좌우될 것이다. 말하자면 (어쨌건 절차적으로는) 민주적인 선거를 통해 선출된 대통령이 시위로 인해 물러난다 해도, 이란이라는 나라의 안정성은 그리 큰 타격을 받지 않는다. 반면 대한민국의 경우에는 권력의 대부분이 대통령에게 집중되어 있고, 그 대통령 위의 기구는 존재하지 않는다. 3년 반 뒤에 한국에서 지금 이란과 같은 시위가 벌어질 경우, 그것이 한국의 민주주의에 가져올 충격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클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이다.

이란의 시위를 보며 한국의 3년 반 뒤를 걱정하게 되는 이유도 바로 그것 때문이다. 이란이 처한 국제적 고립과 사회적 불평등 등을 놓고 볼 때, 현 국면에서 절차적 민주주의가 지켜지지 않는 것은 비교적 덜 심각한 일이다. 오히려 그 반대로 절차적 민주주의를 위해 국민들의 반발을 힘으로 억누른다면 그것은 큰 비극이 될 터이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도 그러한가? 우리가 가진 것은 87년 체제의 허약한 정통성 뿐이다. 다음 대선이 치러진 후 이란의 경우와 같은 시위가 벌어진다면, 그것은 과연 민주주의의 발전에 기여하는 정당한 시위가 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답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우리가 지켜내야 할 ‘민주주의’란 대체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지켜낼 수 있을까? 혹여 그러한 행동은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일이 되지는 않을까? 염치불구하고 독자 여러분께 이 질문을 남겨둔 채 이번 칼럼을 마무리짓고자 한다.

<드라마틱>에서 수습기자 및 취재기자로 일했고, <Foreign Policy> 한국어판의 편집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21세기를 규정짓게 될 키워드에 대한 단행본을 집필 중이며, 옮긴 책으로는 <아웃라이어>가 있다. 고려대 법학과 졸업, 현재 서강대 철학과 재학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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