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중동의 복수극이 다시, 시작되었다. 잔혹한 일이다. 전직 대통령을 죽음으로 내몰고도 포기할 수 없는 적개심이라면, 기본적인 품성을 의심하는 것밖엔 도리가 없다. 예정된 수순대로, 이번엔 DJ를 향한 활극을 시작했다. 서거 국면으로 잠시 숨을 고르는 척 하던 조중동이 가파르게 DJ를 조여가고 있다. 노무현을 겁박할 때와 같은 거침없는 활극 모드는 아니지만, 그와 그로 상징되는 정치적 세력의 숨통을 노리고 있다는 점에서 목적은 같다.

▲ 중앙일보 6월 16일자 42면.
오늘 중앙일보 이훈범 칼럼은 DJ를 조이는 세력의 내면과 그 논법의 전형을 보여준다. 게다가 노무현을 잃은 슬픔이 자신들을 향한 분노로 치달을까 노심초사했던 순간의 고뇌까지 마음에 담고 있어, 한층 교묘해진 수법을 선보인다. 찬찬히 읽어보자.

우선, 그 칼럼의 제목이 절창(絶唱)이다. ‘노욕엔 좌우가 없다’고 초장에 몰아붙였다. 날로 제목장사가 중요해지는 미디어 환경에서, 한 문장만으로 삽시간에 DJ를 ‘노(老)’로 그의 모든 행위를 ‘욕(慾)’으로 전락시켰다. 자칫, ‘좌우가 없다’는 흐름의 지시어와 술어의 의미에 현혹될 수도 있으나, 그래서 절창 제목장사의 묘미라는 것이다. 본문으로 들어가보자.

그의 글은 공자의 ‘군자삼계(君子三戒)’를 인용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공자의 이야기가 17세기 프랑스 풍자작가 라브뤼예르도 수필집 <성격론(Les Caract<00E8>res)>에서도 반복되는 것을 확인해주며 은근히 지적 역량을 과시하기도 한다. 전형적이다. 자신의 논지를 공자에 빗대어 절대화하고, 이를 제3자의 반복을 통해 확인하는 글쓰기 전략이다. 그러곤 곧장 질러간다. “노욕은 필경 노추(老醜)로 산화”한단다. 특히 우리 사회에는 “군내 나는 노추가 군무(群舞)를 춘”단다.

이쯤 되면 궁금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다. 글에 대한 몰입을 끌어내는 솜씨가 제법이다. 공자와 17세기 프랑스 작가까지 끌어들여, 이미 가할 수 있는 최대치의 모욕을 먼저 던지고. 절대적인 가치평가 역시 먼저 재단해버렸다. 아직 그 대상은 밝히지 않은 채.

그는 우선 노추가 오른쪽에 절대적으로 많음을 순순히 인정한다. 뭐, 나이 들수록 보수 군살이 두꺼워지는 건 인지상정이란다. 김동길의 예를 든다. 건강한 정신으로 목숨을 희롱하는 몹쓸 소리를 입에 담았다고 나무란다. 사회의 어른답지 못한 말과 행동이 바로 노추란다.

김동길에게 살짝 타박을 던지고 나서 비로소 시야를 왼편으로 돌린다. 수는 적어도 폭발력 있는 노추는 왼편에 있단다. 오른쪽의 노추들이 인지상정이 발휘되는 어쩔 수 없는 대개의 노추들이라면, 왼편의 노추는 인지상정에서 일탈하는, 폭발적인 노추란 얘기다. 더 들어보자.

“의로운 사람들이 죄 없이 죽고 수난 받는다”고 하고 “자유, 서민경제, 평화로운 남북관계를 지키는 일에 들고 일어나야 한다”고 한다. “독재자에게 아부해서는 안 된다”고 하고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라고 했단다. 그러곤 이게 “남조선 인민들은 파쑈통치를 쓸어버리기 위한 투쟁의 불길을 더욱 세차게 지펴 올려라”는 북한의 신년 사설과 뭐가 다르냐고 묻는다. 연초에는 ‘민주대연합’을 주장하고 의사당 대신 거리에 나온 야당에 “잘하고 있다”고 격려했다는 사실까지 곁들인다. 그는 망령이 들어 노추인 것이 아니라 이렇듯 일관되기 때문에 노추라고 덧붙인다. 그리고 교묘하게 DJ의 발언과 북한의 신년사를 잇대어 ‘친북’의 딱지를 붙였다. 광장을 격려했다는 사실을 부각시켜 ‘과격’의 이미지를 씌웠다.

따져보자. 그는 앞서 노추는 노욕 즉, 노년의 과욕이라고 했다. 사회의 어른 같지 못한 말과 행동이라고도 했다. DJ의 발언 중 정확히 어느 대목이 노년의 과욕인가? 이훈범은 DJ가 민주대연합의 수장 혹은 광장의 지도자가 되려 한다고 보고 있는 것인가? 그게 아니라면 그가 자신의 논리를 강화시키기 위해 인용하고 시작한 공자님 말씀의 지당함에 비해 DJ 발언의 지당함에 있어 부족한 것이 무어란 말인가? 의로운 사람들이 죄 없이 죽고 수난 받고, 자유 서민경제 평화로운 남북관계를 지키는 일에 들고 일어서고, 독재자에게 아부하지 않으며, 행동하지 않는 양심을 악에 비유한 DJ의 표현에서 역사적으로 보나, 시사적으로 보나 합리성이 부족한 망령으로 읽힐 내용이 대체 뭐란 말인가?

전형적인 수법이다. 논점을 바꿔친 테크닉이다. 그가 우를 끌어들인 건, 애당초 격이 맞지 않는 교수와 DJ를 등가로 늘어놓은 것은 속임수이다. 다시 그의 글로 돌아가 보자.

그는 DJ가 “필생의 역작인 햇볕정책에 드리우는 먹구름을 보자니 가슴 찢어지는 아픔을 느꼈을지 모르겠다”고 조롱과 위로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한 빈정거림을 던진다. 그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는 바로 뒷 문장에서 확인된다. 그는 “북한이 지금 핵보유국 행세를 할 수 있는 건 온 국민이 가슴 아프게도 그가 싸 들고 간 세금 덕분이었다”고 내지른다. 북한의 커밍아웃으로 이미 명백해진 사실이란다. 이를 인정하지 않으니 노욕이요, 남의 티끌만 탓하니 노탐이요, 헛된 선동을 멈추지 않으니 노추란다.

한 단락으로 후다닥 해치워 버려 그렇잖아도 정신없는 소리가 더 정신없이 심란하다. 아무리 조중동이 똥색이라도 명색이 중앙 일간지의 정치부문 차장인데, 기명 칼럼을 이렇게 시정잡배 수준으로 말아 잡수면 곤란하다. 햇볕정책과 북한의 핵보유가 어떤 연관성을 갖는가? 더군다나 그 정책에 들어간 비용이 세금이라는 사실을 ‘그가 싸 들고 간’이란 수사로 구사하는 건 언어도단이다. 행여나 누군가 “중앙일보가 지금 일간지 행세를 할 수 있는 건 온 국민이 다 알게도 삼성이 싸 들고 다녔던 비자금 덕분이었다”고 쓴다면, 납득할 수 있겠는가? 신문은 활자 문화의 최전선이다. 논리로 구성되지 않는 사실들을 한 문장에서 나열하지 않는 정제와 절제의 수준을 갖추어야 않겠는가?

마찬가지로, 북한의 커밍아웃으로 명백해진 사실이란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좋은 문장이 아니다. 북한이 핵을 보유했다는 것을 커밍아웃했다는 것인지, 세금 덕분에 핵을 보유할 수 있었다는 것을 커밍아웃했다는 것인지 의도적으로 오해하게 배열했다. 아무리 염치가 없다 해도 너무 남우세스런 작문법이다.

결국, DJ의 무엇이 노욕인지 전혀 확인되지 않는다. 확인되지 않는 노욕을 노탐, 노추로 확대시키니 내 입장에선 이훈범이 노욕인지 중앙일보가 노탐인지 아니면 그냥 현실정치가 몽땅 노추인지 헷갈릴 뿐이다. 마지막 단락에서 그는 노욕에는 좌우가 없으며, 그저 추함만 있을 뿐이라고 했다. 그러곤 세월 좋게도 시를 한 수 읊었다. 끝내 참지 못하고 좌우 평형이 잡힐 때까지 입을 닫고 외로운 시간을 가져보란 말이라고 한 문장을 더 내뱉었다. 차라리 안 뱉었으면 그나마 나았을, 추함이었다. 세월이 좋진 않지만, 나도 노래 가사 한 자락 들려주련다. 장기하와 얼굴들의 <달이 차오른다, 가자>의 일부분이다.

“말을 하면 아무도 못 알아들을지 몰라/지레 겁 먹고 벙어리가 된 소년은/모두 잠든 새벽 네 시 반 쯤 홀로 일어나/창밖에 떠 있는 달을 보았네/하루밖에 남질 않았어/달은 내일이면 다 차올라/이번이 마지막 기회야/그걸 놓치면 영영 못 가”

어떤가, 심오한 가사를 이해할 수 있겠는가? 지독한 좌우 편향을 잡지 않으면, 외로워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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