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주 전이다. 별세한 고 여운계씨의 기사를 쓰기 위해 토요일 아침 단잠을 깼다. 1976년 일간지의 한 귀퉁이에서 ‘할머니 역할이 잘 어울리는 배우 3위 여운계’라는 대목을 찾았다. 한 인터뷰에서 “나는 20대때부터 할머니가 잘 어울린다는 얘길 들었다”는 문구도 오렸다.

우리 방송 역사의 산증인으로 현역배우인 그가 남긴 족적은 깊고 컸다. 기획사의 철저한 관리 속에 배우가 돼 가는 현재와는 달리 그가 맡은 역할은 하나같이 독특한 위치를 점했다. 그가 택한 마지막 드라마에서의 역할은 할머니였다(한국방송 <장화 홍련>). 5년차 겨우 걸음마 뗀 기자가 얼굴을 내밀며 칼럼을 써보겠다고 용을 쓰던 그날, 무심코 켜 둔 라디오에서 속보가 타전됐다. ‘노, 사망, 보입니다’정도가 들렸다. 내 귀는 인터넷으로 관람 중이었던 여운계의 전작 드라마 소리가 더 컸지만 그 몇 단어는 묘하게 여운계의 목소리를 넘어 내 고막을 강타했다.
 
티브이를 켰다. 험상궂은 바위가 눈에 들어왔다. 부엉이 바위라고 했다. 시계를 봤다. 오전 9시30분. 부랴부랴 회사로 나갔다. 신문사의 유일한 공식 휴일이었지만 이미 정치부, 사회부 동료들이 자리를 잡고 자판을 두드리고 있었다. 문화부에도 부장이 혼자 나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울어서인지 아침 단잠을 깨서인지 부은 눈에 대해서는 차마 묻지 못했다. 그는 수년전 청와대 출입기자였다.
 
결국 여운계 기사는 글이 되지 못했다. 회사에 나간 이유는 따로 있었다. 월요일자로 편집까지 마쳐놓은 기사때문이었다. <심령 프로그램, 현장 취재기>. 방송 담당이 된 뒤로 ‘한겨레에서 쓸 거라고 예상가능하지 않은 기사를 쓰자’는 다짐을 해놓은 터, 내부의 논란에도 보란듯이 현장을 누빈 기사였다. 그럼에도 그날만은 기사를 내보내는 것 자체가 견딜 수 없이 부끄러웠다. 이미 인터넷에서는 노 대통령의 서거와 관련한 의혹들이 근거없이 제기되기 시작했고, 심령프로그램 몇 개를 지목하기도 하는 짓궂은 누리꾼들도 등장했다. 대안은 없었다. 취재원과의 시비끝에 소송까지 간 경험도 있었지만 이렇게 내가 써놓은 기사의 질과 상관없이 우연으로 결정된 후회가 있어본 적은 없었다.
 
“하어영씨, 방송면 다음주로 미룰 수 있을까?”

오후가 돼 선배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자기 고집 세기로 유명해 ‘멧돼지’라는 별명까지 붙어있던 나였지만 군소리없이 양보했다. 말해놓고 후회했지만 “(결정해 주셔서)감사하다”는 말도 그때는 진심이었다. 결국 빙의가 됐다고 주장하는 16명의 이야기를 다룬 <심령 프로그램>의 현장 취재기사는 기약없이 미뤄졌다.
 
문제는 그 다음 주였다. 한 배우가 인터뷰를 거절하고 나선 것이다. ‘죄송하다’는 말을 연신 반복했다. 다른 때라면 그의 어머니라도 인터뷰를 하겠다고 나섰겠지만 그날은 신기하게도 이해가 됐다. (그 주에 촬영한 방송분을 보면 그는 정말 연기를 하는 건지 책을 읽는 건지 황망하기 그지없다.)

마감을 앞둔 갑작스런 거절, 대책없이 그것을 받아들여놓고 보니 예상가능했던 아이템들을 기사화하기에는 때가 너무 늦어 있었다. 노 대통령 기사로 비상이 걸렸던 내부 사정상 누구의 도움도 받을 처지도 안됐다. <심령 프로그램>을 내보내자는 말 대신 “어쩔 수 없는 듯합니다”라는 말을 던졌고, 부장은 “그래요, 어쩔 수 없지요”라고 답했다. 진심과는 다르나 진짜 ‘어쩔 수 없을 때’ 부장은 존댓말을 구사했다. 인터넷에서는 경호 담당자가 말을 바꾸고, 수사팀의 초기 대응도 어설퍼 의혹은 근거없는 소문으로 퍼질 태세였다. 짓궂은 누리꾼들의 심령 프로그램 놀이는 ‘개념없는’ 문화면을 만들어놓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묵묵히 앉아 귓밥이 녹을 듯이 전화를 돌렸다. 약속이나 한 듯 인터뷰 거절이 반복됐고, 한면을 메울 만한 아이템을 찾기란 힘들었다. “그거 해.” 한 선배가 말한 ‘그 거’는 너무도 한겨레에서 예상가능한 아이템이어서 주로 사회부에 양보했던 이주노동자 방송에 관한 내용이었다. 그리고 그 날 나는 이를 악물고 ‘뻔한’ 기사를 만들었다. 태어날 때부터 안면기형을 갖고 태어난 지 9개월된 프롬사카나사콘나콘의 사연을 담은 한 다문화방송 프로그램에 대한 내용이었다. 불법체류자인 부모가 온갖 핍박에도 아이를 위해서라면 살 만하다며 연신 감사하다는 말을 했다는 내용도 담았다. 산다는 것, 절망을 느끼는 것, 그 속에서 희망을 발견하는 것, 자꾸 진부하다는 생각이 머리 속에서 떠나지 못했다. 그래도 끝까지 쓸 수 있었던 것은 눈꺼풀이 모자라 눈도 제대로 감지 못하고, 기도가 막혀 있어 목에 구멍을 뚫어 가래를 빼고 밥을 먹는 사카나의 ‘꺄르르’ 웃음이 떠나지 않아서였다. 삶과 죽음이 하나라는 이야기는 살 사람이, 살아가야 할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이라는 생각이 계속 머리에서 떠나지 않아서다.

▲ 한겨레 6월 1일자 17면.

2005년 <한겨레>에 입사했다. 탐사보도팀, 경제부, 사회부 등을 거쳐 지금은 문화부 방송담당기자로 있다. 놀이전문기자가 돼 보겠다고 기자가 됐으나 아직은 여행보다는 여행기를 좋아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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