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 정세균 대표가 ‘그나마 최소한의 것’이라며 던진 요구는 대통령 사과, 진상조사 및 책임자 처벌, 국정기조의 전환 등 크게 3가지로 압축된다. 한나라당과의 지지율 격차를 좁힌 정도가 아니라 아예 뒤집었다는 여론조사까지 나온 상황이다. 여론조사에서 중요한 것이 등락의 수치라기보다는 추이와 추세라고 할 때, 민주당이 적당히 요구를 접지 않을 것이다. 죽은 노무현이 산 이명박을 압도하는 정치는 바야흐로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민주당이 던진 ‘최소한의 요구’가 매우 중요한 이유이다. 야성을 잃어버린 채 정글에 내던져져 쫓기기만 하던 민주당이 과연 최소한의 영토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인가가 달려있는 요구이다. 그런데 다소 산만하다. 지나치게 넓게 걸쳐있고, 본질과 비본질이 다소 섞여 있다. 공세의 파고를 높이기 위해서는 겨냥점을 훨씬 줄일 필요가 있다.

▲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조사가 진행된 4월30일, 임채진 검찰총장이 늦은 퇴근을 하고 있다 ⓒ 민중의소리
대통령에 대한 사과 요구는 정치적 공세를 끝까지 밀어올린 성격이 짙다. 그러나 모호한 책임을 두고 분명하게 고개를 숙일 권력은 흔치 않다. 더군다나 그는 이명박이다. 들은 체도 않을 테다. 벌써부터 공식적인 애도 기간이 끝났으니 길에서 추모할 생각일랑은 접으라고 덤비는 정권에게 윤리적 사과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이다.

국정기조의 전환 역시 마찬가지로 보인다. 검찰, 경찰, 국세청, 감사원이 완전히 권력에 종속되어 한 몸으로 움직여 나가고 있는 상황이다. 국정기조의 전환이라 함은 결국 이것의 해체를 말하는 것일 텐데, 어림없는 소리이다. 이명박 정권이 정국을 주도할 수 있는 핵심적 파워가 바로 이 권력동맹에서 나온다. 국민적 신뢰를 진즉에 잃어버리고, 사회적 비전마저 삽질로 대신하고 있는 얄팍한 정부이다. 선거에 다가갈수록 한나라당에 대한 장악력도 떨어질 것은 자명하다. 레임덕은 정권이 저무는 물리적 시간의 순서에 따라 자연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정권과의 화학적 결합이 무의하다는 판단에 의해 선택되는 것이다. 검찰, 경찰, 국세청, 감사원은 지금 이 정권이 갖고 있는 것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정기조의 전환은 이걸 내놓으란 것인데 알아서 하야하라는 얘기가 차라리 솔직한 요구이다.

최소한의 요구를 더 최소한으로 줄여야 한다. ‘진상 조사와 책임자 처벌’로 과녁을 완전히 좁히고 시작해야 한다. 목표는 검찰이다. 더 정밀하게 말하자면, 천신일로 검찰을 겨눠야 한다. ‘천신일 특검’을 맨 앞에 놓고 검찰을 조져야 한다. 대통령의 사과나 국정기조 전환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도 더더욱 그래야 한다. 감상적으로 끌고 갈 것이 아니라 논리적으로 파고들 필요가 있다. 감정적으로 치받을 것이 아니라 전술적으로 압박할 필요가 있다.

어제 검찰은 천신일 세중나모 회장에 대한 사전 구속영장을 청구하였다. 한나라당 의원 2~3명, 지방자치단체장 서너 명 그리고 전현직 판사들이 소환될 예정이라고 한다. 그러곤 이달 중순 안에 최종 수사결과를 발표하겠다고 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고, 날로 먹으려다 체하기까지 한 박연차 수사를 서둘러 마무리하겠다는 뜻이다.

검찰의 수사 방침은 무얼 의미하는가? 무엇을 보호하기 위한 ‘가이드라인’이냐 말이다. 이명박,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보다 시급한 것은 검찰 스스로이다. 도마뱀이 꼬리를 자르듯 천신일만 잘라내고 덮겠다는 얘기이다.

상식적으로 사인에 불과한 천신일 회장이 로비의 최종 대상자일 수는 없다. 징검다리라고 봐야 한다. 박연차 회장의 돈은 천신일 회장을 거쳐 어딘가로 전달됐을 것이다. 한상률 전 국세청장이 들어온다면 보다 명확해질 것이다. 최소한 국세청장에게 직접 압박을 가할 수 있는 다른 이가 있어야 구성이 되는 사건이다. 물론, 가설이다. 그러나 이 부분에 대해 검찰이 충분한 수사를 했는지의 여부도, 어떤 결과물이 있기에 다음주 중으로 최종 결과를 발표한다는 것인지 알 길이 없다.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수사가 시작된 동기나 수사 그 자체가 부당했다는 얘기는 아니다. 전직 대통령도 혐의가 있으면 조사해야 한다. 하지만 그걸 생중계하고 다른 건 후다닥 마무리하는 건 또 다른 문제이다. 피의사실 공표라고 하는 현행 법률상의 문제를 무시하고, 할 수 있는 극한의 정치적 압박을 가하며 밍기적거리던 검찰이 ‘살아있는 권력’에 대한 수사에 있어서는 이토록 신속 행정으로 복무하는 까닭은 그 자체로 특검 감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구속 여부를 따지던 검찰의 논리 중에서 가장 핵심적이던 것이 대통령 재임 중 인지했는가의 여부였다. 재임 중 인지만 했더라면, 대가성이 입증되지 않더라도 ‘포괄적 뇌물죄’로 충분히 처벌할 수 있다던 검찰이었다. 재임 중 인지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서 외국에 나갔던 날의 비공식 동선까지 파고들었던 검찰이었다. 검찰의 그 철두철미한 수사, 자의적 법해석이 결국 노무현 전 대통령을 죽인 것이다.

그 수사와 법 해석이 타당한 것이었는가를 입증해야 할 책임이 검찰 스스로에게 있다. ‘포괄적 뇌물죄’는 조문으로 존재하는 법리가 아니라 판례로 기능하는 법리이다. 검찰은 두 가지 중에 적어도 한 가지는 반드시 선택해야 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재임 중에 인지했더라는 판단의 근거를 내놓든가 앞으로 권력에 관한 수사를 언제나 그 수준까지 하든가. 이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로 피의자가 사라져 수사를 종결시킨 것과는 또 다른 문제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이후 재임 중 관련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것으로 보이는 정황이 몇 가지 나왔다. ‘1억 시계를 논두렁에 버렸다’ 등의 검찰 발 언론 플레이가 창작이었다는 증언도 나왔다. 박연차 회장이 기업의 생존이 걸린 문제에서 천신일 회장을 통해 적극적인 로비를 했으리란 추측도 가능하다. 천신일 회장과 이명박 대통령 간의 특수한 관계와 석연치 않은 자금 흐름의 정황도 이미 몇 가지 알려진 상황이다.

‘포괄적 살인죄’와 ‘사법 살인’.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에 따라 붙고 있는 표현들이다. 조중동은 앞다퉈 우린 가해자가 아니라고 발뺌하고 있다. 정부는 꿈쩍도 않고 있다. 조중동마저 검찰이 가해자라고 주장하고 있고, 정부는 그나마 검찰도 감싸고 있는 형국이다. 피하고 싶어도 도리가 없다. 검찰이 전직 대통령을 극단적 선택에 몰아넣었다. 대통령 서거 이후의 정치적 전선은 거기서 시작될 수밖에 없다. 검찰 스스로 버릇을 교정할 수 없다면, 누군가라도 검찰의 버르장머리를 이참에 반드시 고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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