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실험은 내일 할 것을 오늘 결심하는 수준의 의사결정이 아니다. 이때다 싶어 내지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북한의 2차 핵실험은 오래 전에 예정된 것이었다. 지난달에 이미 예고 보도도 있었다. 반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는 불가항력의 문제였다. 북한이 가능한 주의를 최대한 기울였다고 해도 미리 알거나, 피해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차분해져야 하는 이유이다. 냉정히 전달할 책임은 언론에 있다. 핵실험의 시기상의 문제가 핵실험 자체에 대한 비난과는 별개로 다뤄져야 할 이유이다.

물론, 한반도의 남쪽이 상중이라는 것을 감안하여 실험 자체를 연기 혹은 취소할 수 있지 않느냐고 상상할 수는 있겠다. 그러나 그건 지극히 ‘우리’ 중심적인 발상일 뿐이라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앞서 말했듯 핵실험이란 의사결정이 내일 할 것을 오늘 철회하기도 쉽지 않은 문제이다. 결정적으로 그렇게 하면, 핵실험을 카드로 사용하는 북한의 기본적 외교 전략이 흐트러진다. 물론, 기회비용의 문제도 있다. 자신을 중심에 놓고 세상을 설명하는 것은 유치원생의 태도이다. 서투른 소아병을 고백하지 말자. 북한의 핵실험은 그 자체로 나쁘다. 위험하다. 하지만 그걸 서운해 할 까닭도, 이해 불가할 이유도 없다.

▲ 문태영 외교통상부 대변인이 26일 오전 10시 정부의 PSI 참여 입장을 공식 발표하고 있다.ⓒ 민중의소리 김철수 기자
북한의 핵실험이 한반도의 위협과 긴장을 실제적으로 얼마나 고조시키는지 여부는 일단 별개로 하고 우선, 한 가지만 말해보자. 그 핵실험의 메시지는 어디를 향하고 있었는가? 한국인가? 아니다. 미국이다.

북한의 2차 핵실험은 미국 현충일 성격의 연방공휴일인 메모리얼 데이에 맞춰졌다. 3년 전 장거리 미사일을 발사했던 것은 7월4일 미국의 독립기념일을 겨냥한 것이었다. 지난 2006년 1차 핵실험 역시 미국의 휴무일인 콜롬버스 데이 직전에 이뤄졌다. 북한의 핵실험은 다시 한 번 북미 직접 대화를 요구하는 것이다. 북한은 6자회담으로 상징되는 다자간 협상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접은 것으로 보인다. 한국은 고려되지 않은 것으로 봐야 한다.

물론, 북한이 미국으로 대변되는 국제사회에 직접 메시지를 전달하며 한국을 고려하지 않았던 사례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남북관계 진전에 엄청난 공을 들여왔지만, 자꾸 엇나가는 북한의 태도, 이 대목에 대한 심층적 분석에 우선 집중할 필요가 있다. 오늘의 즉자적인 단상만 말하자면, 남북관계의 구조적 안정성은 염려했던 것보다는 훨씬 안정적인 것으로 보인다. 다만, 핵실험 날짜조차 가늠하지 못하고 있다가 후다닥 전면적인 PSI 참여 결정부터 밝힌 정부의 무능함은 생각보다 훨씬 심각한 것으로 보인다.

북한이 핵실험을 했지만, 일상성의 원리들은 전혀 위협감을 느끼지 않고 있다. 남북 상호 간의 동요도 없고, 생활의 리듬감 역시 깨지지 않고 있다. 남북관계에 있어, 대중 심리가 안정적이라고 하는 점은 매우 중요한 체크 포인트 가운데 하나이다. 북한은 분명 도발을 했는데, 그 도발의 직접 당사자들은 별로 위축감을 느끼지 못하는 상황을 어찌 이해해야 할까? 군복 입고 광장에 등장하는 어르신들의 말씀처럼 6·25 동란을 겪지 않아 안보의식이 부재하기 때문일까?

아니다. 실제 북한의 메시지를 어찌 읽어야 하는지 시민들이 가장 ‘감각’적으로 영민하게 터득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시민의식의 진전이다. 시민들은 북한의 이번 행위가 ‘6자 회담’과 ‘북미 직접 대화’ 간의 긴장 관계의 측면이라는 것을 보고받지 못하고, 국제사회의 비난과 유엔의 제재가 북한의 실존에 미치는 영향을 설명하지 못하지만, 훨씬 직관적으로 탁월한 집단지성을 보여주고 있다. 남북 정부 모두 최악의 비합리성을 보이진 않으리라는 믿음을 갖고 있다. 그리고 북한의 행위가 ‘제스처’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맞다. 모든 제스처는 일종의 ‘페이크’이다. 의도를 알아주길 바라거나 혹은 속이기 위한 과장된 행동이다.

그렇다면, 북한의 진짜 의도는 무엇일까? 우선, 이런 분석이 가능할 것이다. 얼마 전 남북정상회담 등을 주도했던 대남라인의 상징이던 최승철 조선로동당 통일전선부 제1부부장이 처형되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2008년 2월 경 뉴스 시야에서 사라진 이후, 실각설이 나돌긴 했지만 상상 이상의 극단적 최후를 맞은 것은 매우 충격적인 일이었다. MB의 당선과 대북 강경책이 문제였다. MB 당선 이후 대북 강경책이 노무현-김정일 작품인 10·4 선언을 사실상 휴지조각으로 만들자, 대남라인의 입지가 좁아지기 시작했다. 시기적으론 6자회담이 꼬여갔다. 결국, 자위권을 고리로 한 행동 과시를 통해 미국과 직접 협상에 나서야 한다는 강경 군부의 득세와 체제의 조속한 경제적 안정 없이는 존속이 불가능하리라는 북한 내 최고위층의 판단이 맞물려 상대적으로 남북관계는 경색을 맞은 것으로 보인다.

이후 과정은 ‘아시다시피’이다. 지난 번 로켓 발사 때도 그랬고, 이번 역시 북한은 유독 ‘자위권’을 강조하고 있다. 직접적 침략이 아닌 한 국가의 모든 무력 행위는 ‘자위권’으로 설명할 수 있다. 모든 ‘자위권’은 전쟁을 전제로 한 것일 뿐이라는 설명은 평화적 원론에는 부합하겠지만, 현실적 상황을 설명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바로, 이 대목이 핵심이다. 정부가 북한의 행위를 ‘도발’로 규탄하고 가능한 최고 수준의 외교적 역량을 동원하는 것은 당연하다. 국제적 공조 차원에서 제재에 동참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제스처에 대처하는 제스처적인 선택들 이전에, 이른바 ‘행동 대 행동’의 원칙만을 내세우며 PSI에 덜컥 전면 참여하는 순간 게임은 끝난다. 그러면 곧장 남북관계에는 치킨게임(chicken game)의 룰이 적용된다. 어느 한쪽이 양보하지 않을 경우 양쪽이 모두 파국으로 치닫게 되는 극단적 상황 말이다. 정부가 PSI 전면 참여를 선언하자마자, 북한이 ‘군사적 타격’ 공언으로 치고 나왔다. 살자고 덤비는 북한을 죽자고 몰아, 상상하기도 끔찍하지만 실제 군사적 타격이라도 벌어지면 전쟁이라도 할 텐가?

답답하고 무능한 데다, 호전적이기만 한 정부이다. 이미 오래 전에 예고된 핵실험을 당일 대비하는 정보력도 그렇고, 그 대비라는 것이 외교적 조정을 통해 사후적 위험을 예방하는 데 집중되는 것이 아니라 PSI 참여 따위의 극단적 대결을 선택함으로써 ‘감정적 타격’이나 한다는 점도 그렇다. PSI 참여는 해법이 될 수 없다. 북한의 위협은 아직 실재적인 것이 아니다. 북한이 도발하여, 애써 위기를 고조시키는 과정의 근본적 까닭이 무엇인지를 살펴야 한다. 그 정도 성숙한 외교력은 갖추어야 한다. 무능해도 정도가 있지, 최소한 지난 10년 간 정부는 남북관계를 시민적 근심으로 만들지는 않았다.

지금이라도 핸들을 꺾든가 브레이크를 밟아라. 겁쟁이, 치킨이 되어도 좋다. 정면으로 차를 돌진시키다가는 결국 자멸하게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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