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4월 28일. 프로야구 선수협회 손민한 회장과 권시형 사무총장은 ‘프로야구 선수협회 선수노조 설립추진 선언’이라는 타이틀로 기자회견을 가졌다. 노조 설립을 선언한 것인데, 그러면서 지난 5월4일에는 한국프로야구선수 노동조합설립추진위원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이는 4월28일 노조 설립을 선언한 후 이루어진 첫번째 공식모임인데, 여기에는 손민한 회장을 비롯하여 부상으로 불참한 기아의 윤석민을 제외한 프로야구 각 구단의 대표선수들 두 명씩(롯데는 회장 포함 3명), 총 16명이 참석했었다.

비공개로 진행된 회의가 끝난 후 손민한 회장은 선수 대표들이 노조 설립에 대한 뜻을 재차 확인했다는 뜻을 전했고, 권시형 사무총장 역시 노조의 필요성에 대해 선수들의 공감대를 확인했다고 밝혔다. 당장이라도 한국 프로야구에 선수노조 설립이 추진될 수 있는 공감대가 형성되는 분위기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말이다.

▲ 국민일보 4월 29일자 23면.
무엇이 문제인가?

그런데 상황이 점점 안좋게 돌아가고 있다. 노조를 설립하겠다고 선언한 지 한 달이 다 되어 가고 있지만, 현재 노조설립 추진 상황은 최악의 상태에 이르고 있다. 첫 공식 모임에서 발표되었던 선수노조에 대한 공감대, 찬성, 참여 여부는 모두 철회되고 선수노조 설립은 물거품이 되는 듯해 보일 정도다. 과연 무엇이 문제이기에? 선수들이 노조 설립에 대한 뜻을 확인했고 노조의 필요성에도 공감했는데, 왜 노조를 만들려는 일이 이리도 힘들게 진행되는가?

문제는 바로 추진을 하려는 시기와 이를 뒷받침해줄 선수들의 의지다. 여기에서 먼저 짚고 넘어갈 게 있다. 팬을 비롯한 수많은 야구인과 대부분의 프로야구 선수는 선수노조가 분명히 한국 프로야구를 위해서 필요하다는 의견에 동의한다. 그러한 동의는 지배적이기까지 하다. 프로야구 선수들의 권익을 보호하고 해당기관(KBO)·구단과의 동등한 입장에서 프로야구 현안에 대해 토론하고 협상하여 프로야구의 발전을 도모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잘못된 시기와 부족한 실행력을 가지면 그 의미가 퇴색될 수 있다. 현재 선수노조 설립을 위한 움직임이 좌초되는 분위기에 있는 이유도 크게 두 가지의 의문, 즉 “이렇게 좋은 취지의 일을 왜 하필 지금 추진하느냐”와 “어째서 선수노조의 당사자인 선수들이 이렇게 쉽고 빠르게 발을 빼느냐”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 다시 말해, 시즌이 한창 진행 중이기 때문에 누가 보더라도 시기가 적절지 못했고, 그렇기 때문에 선수들을 설득시킬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부족했기에 선수들의 중지를 모으기 힘들었다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겠다.

시기의 문제: 왜 하필 지금?

한국프로야구는 지난 28년간 경기력뿐 아니라 제도적인 측면에서도 많이 발전했다. 또한 선수들의 권익 보호에도 나름의 의미 있는 변화가 있었다. 상당한 진통이 야기되었던 선수협회 구성문제도 있었고 말이다. 물론 아직 많은 부분에선 부족한 부분이 남아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선수협회의 경우, 지난 1988년 최동원, 김용철 등의 주도로 선수회 결성을 시도한 이후, 지난 2000년 1월 송진우를 초대 회장으로 창립총회를 가졌고, 이에 대한 KBO 이사회의 발기인 선수에 대한 전원 방출 결의 파동을 겪으면서까지도 KBO나 구단에 맞서 선수의 이익을 대변할 공식 창구로서의 역할을 해왔다. 이 과정에서 선수협회는 선수의 최저 연봉과 외국인 선수 출전에 대한 제도 등에 의견을 개진하며 나름 의미 있는 활동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9년이 흘렀다. 느닷없이 선수협회는 선수노조 설립 선언을 하기에 이른다. 그것도 시즌이 한창인 4월28일에 말이다.

선수협회는 3월 중에 KBO 총재 앞으로 11개 항목의 제도 개선안을 보냈다. 이에 대해 KBO는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이 끝난 후 답을 주겠다고 해놓고 아무런 응답을 해주지 않았다. 이에 선수협회는 더 이상 무시를 당할 수도 없고, 나아가 노조의 설립 추진도 미룰 수 없다는 판단 하에 노조 설립 추진을 발표하였다. 시즌 중에 말이다. 설립의 당위성과 시급성을 누구보다 이해하면서도 그 시기의 문제에 있어서는 답답함이 앞선다.

“시즌 중에 선수노조 설립 추진을 하더라도 경기에는 지장이 없게 하겠다.” 선수협회 권시형 사무총장의 말이었다. 그 말의 선의를 충분히 이해하면서 아쉬운 점은 그것의 진정성이 퇴색될 수밖에 없는 현실이라는 사실이다. 선수들은 전국의 각지를 돌며 1주일에 6경기를, 거의 6개월에 걸쳐 133경기를 진행한다. 체력적으로 힘들고 어려운 강행군이다. 오죽하면 주말에 비가 오면 그 경기를 월요일에 하겠다던 제도도 시행 한 달 만에 폐지되었겠는가.

시합에 지장을 주지 않으려 대부분의 회의를 월요일에 진행한다. 경기가 없는 월요일에 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게 결코 경기에 지장을 주지 않는 것인지는 따져봐야 할 문제다. 물론, 선수협회 차원에서도 이 점을 감안했을 것이라 판단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현실적인 대안이 되지 못했던 것 같다. 선수노조의 설립은 적어도 지난 2000년 선수협회 창립 때처럼 비시즌에 추진을 했어야 한다.

더 나아가 지금 한국프로야구에는 선수노조의 문제뿐 아니라 더 시급한 문제가 산적해 있다. 단적으로 히어로즈의 매각 문제이다. 또한 중계권의 문제도 있고, 돔구장 설립의 문제도 있다. 허구연 해설위원이 허구한 날 외쳐대는 인프라의 문제 말이다. 이러한 문제들에 힘을 쓰고, 어느 정도의 문제가 해결되는 와중에, 과연 선수협회가 선수노조 카드를 들고 나오는 게 옳았느냐에 대해 따져봐야 하지 않을까?

주체의 문제: 당사자로서 선수의 마음은?

4월28일 노조 설립을 추진하겠다는 선언 이후, 많은 선수가 다양한 생각을 했을 것이다. 자신들의 삶과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중대한 문제에 힘을 보태 해결의 주체로 나서야 할 선수들이 선언 이후 지지를 보내는 척하다 갑자기 그 지지를 철회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말이다. 어떻게 하면 자신들의 권익을 보호해줄 수 있는 선수 노조 설립에 이렇게 “쉽게” 발을 뺄 수 있을까? 의문이 아닐 수 없다.

노조 설립 추진위원회의 첫 모임에 참석하고 언론에 보도된 한 선수의 인터뷰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다. 요약해 보면, “모임에 처음 참석을 했는데, 무슨 얘기 하는지 모르겠다. 형들이 하자고 하니 따라 간다. 다수의 의견이 모아지면 따를 수밖에 없다”라 한다. 또 다른 선수는 “공감대는 형성되는데 시기 등은 지켜봐야 하고 전체 의견이 모아지지 않은 가운데 일방적인 노조 결성은 옳지 않다” 등의 인터뷰도 했다. 이는 결국 선수노조의 당사자인 선수들이 노동조합에 대한 명확한 이해뿐 아니라 설립 추진 과정에 대한 계획 그리고 방법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즉, 강제는 있었지만, 동의가 이뤄지지 못했던 것이다.

결국 전체 선수들의 협의를 무시한 채 졸속적으로 진행이 된 것이다. 또한 당사자인 선수들에게 노조의 필요성과 노조가 설립되었을 때의 혜택, 선수들의 책임에 대해서 명확한 설명과 설득이 필요했다. 이를 바탕으로 선수들의 의견을 물어 전체 선수의 중지를 모은 후 노조 설립 추진을 선언했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이런 중간 과정을 배제한 채 일을 추진한 것이 오히려 선수들의 동의를 얻지 못하고 표류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이는 선수들이 발을 빼고 있는 현 상황에서 선수협회 차원에서도 스스로 인정한 부분이다. 이런 상황이니 선수들이 자신들의 권익을 보호한다는 선수노조라 하더라도 선뜻 반기기 어려운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부분에 대해서 선수협회 측은 구단의 압박에 의한 유보의 뜻으로 판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점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그것을 전부로 보는 우(愚)를 범하지 않았으면 한다.

선수협회는 6월1일 총회에서 노조 설립에 대한 찬반 투표를 진행할 것이라 한다. 선수들의 분명한 의견을 들어보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몇 명의 선수들이 총회에 참석을 할 것이며 어떤 의견이 모아질지 의문이다. 이미 한화이글스는 총회에도 참석하지 않겠다고 통보한 상황이고, LG트윈스도 주장 조인성의 성명을 통해 선수노조 추진에 대한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다른 구단들도 이와 비슷한 의견이다. 진퇴양난이다.

팬들의 힘을 얻을 수는 없는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이 난국을 타개할 방법은 무엇일까? 찾아보면 많겠지만, 실천의 주체이자 당사자인 선수들이 긍정적이지 않은 상황에서 뾰족한 수단은 없다고 봐도 될 듯싶다. 일단은 6월1일 선수협회 총회의 결과를 주시할 수밖에 없다.

참 아쉬운 부분인데, 지난 2000년 선수협회 창립 때처럼 선수노조 설립의 당위성에 관한 여론을 조성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그러한 절차를 거쳤어야 했다. 이 점이 중요했었는데 선수협회는 이를 간과했던 것 같다. 시간에 쫓겼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결국, 선수협회는 팬들에게 선수노조 설립의 당위성을 제대로 알리지 못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팬들의 지지 또한 얻을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고, 무관심을 넘어 냉소로까지 다다르고 있는 것이다.

선수협회의 이번 조치가 팬들의 동의를 얻지 못하는 이유는 몇 가지가 더 있을 듯싶다. 그 중 하나가 바로 모양새의 문제다. 선수협회가 노조설립 추진을 선언하면서 그 추진 배경을 KBO에 제시한 11개의 제도 개선안에 대한 회신이 없다는 것을 포함해 KBO가 선수협회를 파트너로 인정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골자로 삼았다. 하지만 선수협회는 총괄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을 뿐 그들이 요구한 제도 개선안이 어떤 것들인지에 대해선 전혀 언급을 하고 있지 않다. 대략적으로 군 보류 수당에 대한 문제와 FA 제도 개선 정도이다.

결국 선수협회는 그들이 요구하는 세세한 내용을 밝히기에 앞서 구단이나 KBO와의 힘겨루기를 먼저 하고 있는 것이고, 이것이 스포츠를 정치싸움의 구도로 몰아가는 듯한 모양새를 만들었기에 팬들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얻을 수도 없게 되는 것이다. 또한 그동안 선수협회는 최근에 이슈가 되고 있는 도핑 문제를 비롯해서 FA 제도 등을 통해 스타급 선수들의 권익 보호에만 힘을 쓰고 있다는 비난에서도 결코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에, 상황은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방법은 없는가?

사실, 비판은 쉽다. 대안이 어려워서 그렇지. 나 역시도 마찬가지다. 그래도 몇 가지 말해보자면, 가장 우선적으로 6월1일에 있을 선수협회 총회의 결과를 봐야 한다. 선수협회는 총회에서 그들이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더라도 선수노조 설립을 추진할 가능성을 내비치기도 했지만 당사자인 선수들의 동력을 얻지 못한 상황에서 노조 설립은 굉장히 위험한 발상이 될 수 있다. 강제만 있고, 동의가 없는 상황에서 혁명의 주도권, 즉 헤게모니를 쥘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

즉, 6월1일에 있을 총회의 결과를 토대로, 다시 선수들에게 이번 시즌을 통해서 노조 설립에 대한 명확한 설명과 그에 따르는 혜택, 책임 등에 대해서 제대로 알릴 필요가 있다. 그런 다음 시즌이 끝난 후, 당사자인 선수들의 공감대 뿐 아니라 많은 야구인들과의 대화를 통해 조언을 구하고 팬들에게 노조 설립의 당위성을 알려 여론의 힘을 빌려야 하겠다.

물론, 지금이 적기라고 생각하고, 지금이 아니면 다시는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다. 하지만 충분한 공감대와 여론만 형성된다면 선수노조의 설립은 충분한 당위성을 갖고 추진에 힘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한국 프로야구의 황금 시기임을 잊지 말고 리그의 수준을 높이고 인프라 확장에 힘을 쓰는 한편, 경쟁력 있는 경기력을 바탕으로 많은 팬들에게 멋진 경기를 펼치는 것이 우선이 아닌가 한다.

‘언제까지 그러고만 있을 텐가’라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앞서도 말했듯이, 강제와 동의는 함께 가야 하지 않겠는가? 싸울 병사가 안 싸우겠다는데, 누구랑 싸우겠나? 우선은 동의를 구해야 한다. 가장 우선적으로 선수, 그리고 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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