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례를 국민장으로 치르겠다는 결정은 여러모로 상징적이다. 장례는 형식에서 시작되어 형식으로 완료되는 의식이다. 장례의 형식 그 자체는 곧 산 자들이 죽음의 성격을 결정짓는 방식이기도 하다. 정부는 장례에 있어 ‘최대한의 예우’를 강조했다. 정부가 어떻게 국민장을 치를는지는 향후 정국을 예측하는 가장 중요한 단서 가운데 하나이다. 아직까지는 차라리 ‘최대한의 예우’를 떠벌리지 아니함만 못한 상황이다.

이번 죽음에서 ‘원한과 분노’의 감정을 느끼는 입장에서 보자면 ‘살인유발자’가 장례를 주관하는 상황을 도저히 용납하기 어려울 것이다. 자의건 타의건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의 상징적 인물로 해석되고 있는 영화배우 명계남씨는 ‘국민장 결사반대’ 입장이다. 누가 죽였다고 단언할 순 없지만, 이 죽음에 깔려 있는 ‘정서’를 강조했다. 굳이 복잡한 말을 하지 않아도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기묘한 대목이다.

▲ 경향신문 5월25일 1면 사진
덕수궁 대한문 앞에 차려진 분향소에 국화꽃을 한 송이 올려놓기 위해서는 평균 3시간 정도를 기다려야 한다고 한다. 임기 중 노무현 대통령의 인기나 지지도를 고려하면, 상상을 뛰어넘는 추모 열기이다. 유달리 죽은 자에 관대한 한국적 정서를 고려하더라고 상상 이상이다. 복잡한 성찰이 필요하겠지만, 가장 기본적으로는 두 가지가 깔려 있다고 봐야 한다.

첫 번째로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와 함께 조롱 받던 ‘상대적 도덕성’의 위력이 부활한 것으로 봐야 한다. ‘더 해먹은 놈들도 버젓이 살아있다’는 정서적 구조, 심리적 반발감이다. 한나라당 입장에서는 소름끼치는, 간결하지만 무시무시한 저주이다.

노무현의 상대적 도덕성을 극복할 현실 정치인은 없다. 박연차 수사의 원래 시나리오는 그래서 정교하게 노무현의 ‘상대적 도덕성’만 조지고 빠지는 것이었다. 검찰은 이명박 대선자금 수사에 선을 긋고, 정권 핵심 인사들에 대한 로비를 본격적으로 캐지 않았다. 정치권력의 일반적 도덕성에 대한 사정이라기보다는 특정 정치권력의 상대적 도덕성만 대상으로 삼은 수사였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스스로 목숨을 던짐으로써 이 시나리오는 틀어졌다. 틀어진 이후가 중요했는데, 당황한 검찰은 허겁지겁 노무현 관련 수사의 종결을 고하고, 나머지 대상자들만 수사하겠다고 선언해버렸다. 두고 봐야겠지만, 결정적 패착이 될 가능성이 높아보인다. 여태껏 노무현의 상대적 도덕성만 조지는 수사를 해왔다고 스스로 입증한 셈이고, 앞으로 어떤 수사를 할지 초난감해진 상황이다. 천신일 회장을 노무현 몰듯 하지 못한다면 우선 검찰이 죽게 될 것이고, 만약 그렇게 몰아댄다며 끝내 MB가 죽게 될지도 모른다. 중간쯤에서 어설프게 타협한다면, 하나만 살기도 어렵게 될 것이고.

두 번째는 이번 죽음과 이명박 정부의 관계에 관한 부분이다. 봉하마을에 등장한 ‘이명박 살인마’라는 표현은 예사롭게 넘길 부분이 아니다. 협의된 7일 간의 슬픔 이후에, 어떤 상황이 발생할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만약, 노 전 대통령의 죽음에 분노를 느낀 이들이 기꺼이 전위에 선다면, 이 상상은 그 자체로 정권과 조중동을 침몰시키는 악몽이다. 풍향계는 작년 촛불 때보다도 바삐 돌고 있다. 오마이뉴스의 오연호 대표는 ‘이명박이 노무현을 죽였다’고 단정했다. 진보적 색채보다는 중간 계급의 원로 성격이 강해진 박원순 변호사 역시 이명박 정부의 ‘핍박’과 ‘배제’가 노무현 대통령을 극단적 선택으로 몰고 갔다고 봤다. 다른 사회운동단체들의 시선은 더 강경하다. 온라인은 봉기라도 할 태세다.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서 ‘삶과 죽음이 결국 자연의 한 조각’이라는 깨달음에 이르렀던 노무현 전 대통령의 인식이 현실에 닿아서는 ‘이명박의 삶과 노무현의 죽음이 결국 정치의 한 조각’이라는 적극적인 형질전환을 겪고 있는 셈이다. 비록, 폭발적인 정치 상황이 벌어지지 않는다고 해도 죽은 노무현이 산 이명박을 압도하는 상황은 이명박의 임기 내내 계속될 것이다. 상대적으로 보자면 이명박은 이미 졌고, 노무현은 끝내 이겼다.

▲ 지난 23일 오후 서울 덕수궁 앞에서 한 추모 시민이 경찰의 분향소 출입통제에 항의하는 손팻말을 들고 있다. ⓒ미디어스
그래서 다시, 장례의 문제이다. 국민장으로 치러지는 이 국가적 장례를 경찰은 ‘갑호비상’에 준하는 근무 태세로 맞고 있다. 갑호비상은 경찰병력 100%가 동원되는 체제이다. 그러니까 현재 경찰은 ‘갑호비상’은 아니지만 이에 준하는 비상근무라는 기묘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아크로바틱(acrobatic)스런 ‘주차신공’의 곡예로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부터 시청광장을 거쳐 청계천까지 차벽을 ‘작렬’시켰다. 그 차벽은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를 맞는 정부의 분열적 태도가 늘어선 줄이자, 체제 저항적으로 해석되고 있는 죽음을 체제 친화적으로 치러내야 하는 정부의 신경질이 늘어선 줄이기도 하다.

앞서 장례가 형식으로 시작되어 형식으로 완료되는 것이라고 했는데, 장례의 형식에서 공간의 의미는 특히 각별한 것이다. ‘최대한의 예우’를 하겠다면서 왜 추모를 방해하느냐는 시민들의 분노는 일차적으로 공간의 문제, 경찰이 공간을 통제함으로써 발생하는 상황이다. 경찰은 불법 집회로 번질 염려 때문에 공간을 통제하는 것이라는 너절한 얘기를 변명이라고 하고 있다. 그러면서 드러내놓고 ‘광장’만 사수하고 있다. 울고 싶은 사람 뺨을 치는 행동이다.

정부는 이 죽음을 불온하게 보고 있는 것이다. 경찰은 이명박 대통령을 거꾸러뜨릴 수도 있는 인파의 집결을 막고 있는 것이다.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 옳고 그름을 떠나 경찰은 정권을 수호하는 역할을 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공권력의 당연한 책임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화를 경찰에게 풀 것이 아니다. 문제는 다른 것이다. 흔한 말로 광장을 ‘민주주의의 터미널’이라고 한다. 한국 사회에서 가장 유명한 ‘민주주의의 터미널’이 지금 막혀있다. 야당 원내대표가 광장에 가려해도 막아 세우는 상황이다. 광장을 시민적 필요에 따라 열고 닫을 수 없다면, 그건 민주주의가 아니다.

실재가 어떠하건 간에, 대통령을 지칭하는 한 문장이 ‘살인마’로 좁혀지고 있다. 쇠고기 수입과 같은 개별 정책에 대한 호불호와 실책 여부가 아니라 이 체제를 그냥 둘 것이냐 말 것이냐의 문제로 옮겨가려 하고 있다. 시대의 퇴행인지, 정치의식의 진전인지는 아직 알 수 없으나, 늘어선 경찰은 그 전선의 명확한 실체이다. 이명박에 반대한들 누구도 상황을 여기까지 끌고 오고 싶지도, 끌고 올 힘도 없었다. 이 지경을 만든 것은 철저히 이명박 자신이다. 이미 죽은 권력을 죽이려던 산 권력의 탐욕이 민주주의의 영혼을 짓누르고 있다. 광장은 열리지 않고, 광장 주변엔 실재적인 공포와 잠재적인 불안이 뒤섞여 길게 늘어서 있다.

정부에 진심으로 충고한다. 우선, 민주주의 터미널을 열어라. 광장을 열어 분노의 퇴로를 최소한이라도 확보해야 위기를 넘길 수 있다. 광장이 막히면, 민주주의가 해체된다. 민주주의가 해체된다는 말은, 정권이 정말 극단적 상황을 맞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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