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995년 당시 떠오르는 신예 스타 이병헌과 김은정을 투톱 주연으로 과감히 기용한 액션 스릴러 '런어웨이'로 충무로에 데뷔한 김성수 감독은, 1997년 대한민국 청춘영화의 고전으로 등극한 영화 '비트' (정우성, 고소영, 유오성 주연)를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각인시키기 시작했다. 당시 서울에서만 40만이 넘는 관객을 동원하는 대성공을 거둔 '비트'를 통해 주연 배우 정우성은 청춘의 아이콘으로 등극했고, 이후 지금까지 충무로의 대세배우로 자리잡는 기반을 마련했다.

'비트'의 대성공 이후 김성수 감독은 정우성, 이정재 투톱을 내세운 영화 '태양은 없다' (1998년)를 통해 충무로 흥행감독으로 자리잡는 데 성공한다. 스타일 넘치는 화면과 속도감 넘치는 편집은 김성수 영화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이후 거대 자본을 투입한 블록버스터 '무사' (2001년)에서도 김성수 감독은 속도감 넘치는 전개와 거칠고 느와르 스타일이 배어 있는 액션 씬들을 유감없이 선보였지만, 당시 개봉 시기가 전 세계를 경악으로 몰아넣은 9.11 테러와 맞물리는 바람에 외적 요인에 의해 흥행에서 손해를 보는 아쉬움을 감수해야 했다.

'무사' 이후 김성수 감독은 그의 장기인 느와르풍의 액션물을 버리고 로맨틱 코미디물인 '영어 완전정복' (2003년, 장혁 이나영 주연)을 선보였지만 흥행에서 고배를 들었다. 이후 오랜 시간 야인으로 지내던 김성수 감독은 2013년 재난영화 '감기' (장혁, 수애 주연)로 오랜만에 현장에 복귀하였다. 하지만 '감기'는 너무나도 전형적인 재난 영화였다. 김성수 감독의 영화인지 전혀 느껴지지 않을 무색무취의 스타일로 연출한 것이 오히려 흥행에 '독'이 되었다.

영화 <아수라> 스틸 이미지

'감기' 연출 이후 김성수 감독은 모처럼 자신의 장기인 느와르 액션물 '아수라'를 들고 나왔다. 가장 눈길이 가는 것은 충무로 흥행 대세배우들과 개성파 배우를 한꺼번에 조합시킨 캐스팅이다. 정우성, 황정민, 곽도원, 주지훈, 정만식 등 쉽게 합쳐지지 않을 것 같은 5명의 남자 배우들이 한데 모였다. 2013년 영화 '신세계'로 한국형 느와르 영화의 새로운 전형을 제시한 사나이 픽쳐스가 제작을 맡아 더욱 기대감을 높였다.

시놉시스나 포스터를 봐도 금세 '신세계', '무간도', '영웅본색' 등의 느와르 영화의 대표작이 떠오르게 된다. 제목에서 보듯 영화의 전개는 꽤나 어지러이 흘러갈 것 같은 예감을 전달한다. 오프닝에 등장하는 낡은 개인주택들이 어지러이 붙어 있는 안남시의 전경은 영화 제목과 절묘하게 매칭된다.

영화 <아수라> 포스터

안남시의 막대한 권력을 쥐고 있는 악덕시장 박성배(황정민) 밑에서 하수인 역할을 도맡아 하는 형사 한도경(정우성)은 예기치 않게 자신의 선배형사 (윤제문)를 살해하게 되고 이를 은폐하기 위해 또 다른 악행을 저지르며 수렁에 내몰리게 된다. 한도경은 한편으론 자신의 치부를 빌미삼아 박성배 체포를 위한 미끼역할을 요구하는 검사 김차인(곽도원)과 검찰 수사관 도창학(정만식)에게 지속적인 협박을 받으며 더욱 궁지에 몰리게 된다. 어떻게 해서든 박성배 밑에서 궂은일을 하며 아내의 암 치료비를 마련해야 하는 한도경은 자신을 에워싼 상황에서 빠져 나오려 할수록 늪에 빠진 듯 빠져들게 된다. 한도경을 대신해 박성배 밑으로 들어가게 된 한도경의 후배 형사 문선모(주지훈) 또한 점점 씻을 수 없는 악행의 소용돌이에 빠져든다.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주요 캐릭터들은 악의 구렁텅이에 빠지기로 자처한 듯 멈추지 않는 악행을 반복한다. 그 수단은 단 하나다. 오로지 폭력에 의해서다.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더 큰 폭력을 생산하면서 영화는 폭력의 수위를 어떻게 자극적으로 표현할 것인가에 치중하는 듯한 인상을 풍긴다. 물론 영화의 조명이나 공간 (특히 장소 헌팅을 어떻게 했는지 경탄스러울 정도로), 촬영 기법 등은 영화의 암울한 톤을 잘 뒷받침한다. 또한 주인공 한도경의 극대화된 분노가 표출되는 카 체이스 장면은 숨 돌릴 틈 없이 긴박하게 전개된다. 그러나 비주얼에 너무 치중한 나머지 스토리의 개연성이 너무 많이 생략된 것이 이 영화의 완성도를 떨어뜨리고 만다.

박성배가 무엇을 얻기 위해 악행을 일삼는 것인지, 바르게 살 것 같은 문선모는 사복을 벗고 양복을 입은 그 순간부터 왜 그리 한도경만 보면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 되는가에 대한 개연성이 떨어진다. 하지만 배우들의 연기력을 통해 자연스럽게 그들의 캐릭터에 몰입이 된다.

김성수 감독의 인터뷰를 보니 의도적으로 관객들을 불편하고 힘들게 만들려고 했다고 언급했다. 영화는 최대한 현실적으로 악인들을 묘사하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찌 보면 과장이 지나치다 느껴질 정도로 악인들의 모든 행위는 폭력에 의한 것으로만 묘사했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현실에서 악인들이 폭력만으로 모든 악을 자행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폭력은 가장 낮은 수준의 악행일 뿐, 가장 무서운 악인들은 폭력을 쓰지 않고도 지능적인 수단들을 동원해 교묘히 악인이 아닌 것처럼 행세하며 악행을 일삼는다.

영화 <아수라> 스틸 이미지

그런데 영화 '아수라'에서는 시장, 검사, 경찰, 심지어는 필리핀 조직폭력배 (이들의 캐릭터는 제작사의 전작 '신세계'에 등장하던 연변거지 일당들의 캐릭터를 재활용한 듯 무지막지하기 그지없다)까지 모두가 폭력에 의지하고 폭력 없이 살아갈 수 없는 이들처럼 보여진다. 안남시라는 가상공간 안에 그들은 또 다른 벽장 안에 둘러싸여 서로 치고받고 물다가 결국 '저수지의 개들'처럼 처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영화 제목에 충실하게 모든 장면들이 혼란스럽고 불안하기만 하다. 특히나 주인공 한도경이 반쯤 미친 상태에서 행한 장면은 경악의 극에 다다른다. 어떻게 해든 자신을 둘러싼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그래봤자 소용없는 답답한 현실에서 스스로를 자해하는 장면은 이 영화의 종착역이 어디로 가게 될지를 암시한다. 그래도 감독이 서사에 좀더 신경을 썼더라면 좀 더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는 전개가 나올 수 있었을 텐데 영화는 묵직한 두통을 던져주고 마무리한다.

처음에 이 영화를 보기 전에 자연스레 떠올릴 수 있었던 영화 '신세계'도 잔혹한 장면이 꽤나 등장한다. 특히 정청(황정민)이 혼자 엘리베이터에서 이중구(박성웅) 일당들과 칼부림 대결을 펼치는 씬은 무척이나 잔혹하지만 한국 영화사에 길이 남을 액션장면으로 회자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무 이유 없이 서로에게 칼을 겨누는 것이 아니었고 탄탄한 스토리 구조에서 펼쳐진 상황이기 때문이다.

영화 <아수라> 스틸 이미지

하지만 '아수라'에서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 서로가 미쳐가면서 잔혹하게 대결을 펼치는 장면은 굳이 꼭 저렇게까지 해야 했나라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지난해 개봉했던 영화 '내부자들'의 스토리 구조와도 일부 유사한 부분이 있는데, '내부자들'도 만만치 않게 잔인한 장면들이 등장했지만 다소 허황되더라도 반전이 들어있고 나름 짜임새 있는 스토리 구조를 유지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있었다.

그런데 영화 '아수라'는 서사를 과감히 생략한 것이 오히려 '독'이 되어 보인다. 주연 배우들이 출중한 연기력을 통해 부족한 서사를 커버하지만, 이 좋은 배우들이 아깝게 소모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야구에 비유하자면 큰 점수 차로 리드하는 상황이든 접전 상황이든 관계없이 늘 내보내는 필승조 투수들을 등판시키는 한화이글스 야구를 떠올리게 한다.

영화 개봉을 전후해서 이 영화에 등장했던 주연배우들이 합심하여 좀처럼 출연하지 않는 예능 프로그램에 등장해서 영화 알리기에 전력하고 있다. 영화 촬영 동안에도 이들의 케미는 무척이나 좋았었다고 한다. 그래서 더욱 아쉽다. 이 좋은 케미를 가지고 더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있었을 텐데, 이들의 출중한 연기력만으로 커버하기에 '아수라'의 스토리텔링은 허탈할 정도로 부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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