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4월15일 오후 6시. 17대 총선 출구조사 결과가 스크린에 점멸하는 순간, 나는 환호했다. 152석이라는, 18년만의 집권 다수당이 된 노란풍선 때문이 아니었다. 사상 최초 원내 진입, 절차적 정당성을 거쳐 법적인 민중의 대표 자리를 얻어낸 민주노동당 때문이었다. 누군가는 자유당-보수당 양당 구도에서 노동당이 자유당을 밀어내고 한 자리를 차지했던 영국처럼, 10년 안에 우리도 보수 열린우리당, 진보 민주노동당 구도에 한나라당은 극우 소수정당으로 전락할 것이란 섣부른 전망까지 내놨다. 하지만, 기쁨을 누리기보다 맘 구석에 숨어있는 찜찜함을 되뇌는데 더 익숙한 나는, 이게 과연 진정한 진보적 시대 물결일까, 의심했다. 한국 사회의 견고한 보수-관료주의 기득권층이 이를 용인할 것인가. 진보적 시대 물결이라기 보단, 절차적 정당성을 가진 탄핵이란 제도가 정작 민중의 목소리를 외면한 채 치러지면서, 간접 민주주의의 한계를 드러냈다는 이유에 부합한 일시적 반발심 아니었을까. 그래서 되레 눈길은 권영길이 아니라, 노무현에게 쏠렸다. 역시 그랬다. 노무현은 많은 이들을 실망시켰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공권력에 휘둘려 자살하고, 미국의 패권주의 논리에 고스란히 굴복해 이라크에 파병하고, 신자유주의 물결을 피할 수 없다는 재계와 관료들의 하소연에 한·미 FTA를 시도했으며, 부안과 평택에선 국익이란 논리로 토착민들의 보습 댈 땅을 앗아갔다. 그리고 4년 뒤, 온 나라에 삽질 경영학을 펼치고 있는 권위주의 통치학의 화신이 절차적 정당성을 거쳐 그의 자리를 대신했다.

▲ 24일 밤 고 노무현 전 대통령 분향소가 마련된 서울 덕수궁앞에서 시민들이 조문을 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그 노무현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인터넷으로 뉴스를 접한 나는, 설마 와병중인 또 다른 노 전 대통령이겠지, 했다. 아니었다. 그리고 종일, 왠지 모르게 우.울.했.다. 여러 가지 반응이 나왔다. 그저 죽음의 무게에만 눈길을 주며 눈물만 흘리는 사람이 있었다. 그렇게 자존심 강하던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쉽게 갔을까, 라고 안타까움으로 의아해하는 사람도 있었다. 검찰의 목조르기 수사를 탓하는 사람도 있었다. 반대로 수사에서 얼마나 더 나올 게 많았으면 죽음으로 묻고 가려하나, 라며 말초적 호기심을 버리지 못하는 시.정.잡.배.도 있었다. 노무현은 여전히 죽음까지 이.기.적.이라며 싸늘한 시선을 보내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별다른 이유도 찾지 못한 채 우울했다. 그래서 일부는 봉하 마을로 향했고, 일부는 광화문에서 여전히 산성 같은 벽을 쌓고 있는 경찰 앞에서 오열했고, 일부는 소주잔을 기울이며 밀주의 두통으로 혼란을 잠재웠고, 일부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망연한 주말을 보냈다.

누군가는 이렇게도 말했다. 78명의 노동자 해고 소식을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로 통보한 택배회사에 항의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은 화물연대 박종태 광주지부장의 죽음, 경찰특공대의 토끼몰이 진압에 내몰려 불에 타 죽은 5명의 용산 철거민들의 목숨,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시위 현장에서 사망한 농민 전용철, 홍덕표씨의 죽음과 노무현의 죽음은 같은 비중을 가져야 하는 것 아니냐, 사람의 죽음 값은 모두 같다, 라고. 그럴지도 모른다. 적어도 앞의 소외 계층이 숨졌을 때 우리가 느꼈던 아픔 값과 노무현의 죽음이 내미는 아픔 값이, 하나의 개별적 인간의 슬픈 종말에 대한 감정의 절대량으로서 다르다고 말할 순 없을 것이다. 하지만 노무현의 죽음이 우리를 좀 더 우울하게 하는 이유에, 절차적 정당성을 지닌, 그래서 민중이 한 시대의 절대 권력으로 선택한 대.통.령.이란 자리를 지낸 정치인 노무현으로서, 또 애와 증의 대상이었던 인간 노무현으로서 몇 가지 덧붙여진다는 점까지 부인할 순 없을 것이다.

‘정치인’ 노무현은 대한민국 헌정 역사상 가장 개혁적인 실험을 한 대통령이었다. 그는 2002년 민주당 상임고문 시절, 대통령 후보 경선에 출마하며 “권력에 맞서서 당당하게, 권력을 한번 쟁취한 우리의 역사가 이루어져야만이, 이제 비로소 우리의 젊은이들이 떳떳하게 정의를 얘기할 수 있고, 떳떳하게 불의에 맞설 수 있는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외쳤다. 그랬다. 노무현 정권 당시 우리 사회는 눈에 보이지 않는 많은 부분에서 권위주의가 모습을, 적어도 잠시나마 감췄다. 지금은 권력의 주구로 환원한 검찰을, 대통령이라는 절차적 정당성을 가진 권위로 내리찍었으면 됐을 검찰을, 그것도 새파란 소장검사들과, 그는 개혁을 얘기하며 토론으로 맞장 떴다. “대통령이 체통도 없이 시끄럽다”며 그들 스스로도 이율배반적인 논리를 내세웠던 일부 언론을 통해 전파된 목소리로, 국민들이 하나같이 그를 껌처럼 씹어대도, 지금처럼 사정 권력을 총동원해 입막음하지 않았다. 비단 현 정권의 잘못 때문에 그가 상대적으로 빛나는 게 아니라, 그저 그런 대통령을 헌정 역사상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에 신기하면서도, 친근했다.

▲ 24일 밤 고 노무현 전 대통령 분향소가 마련된 서울 덕수궁앞에 국화꽃과 촛불을 든 시민들이 조문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인간’ 노무현은 마치 축구선수 박지성을 바라보는 우리네 인식과 비슷하다. 박지성은 차범근이나 박찬호처럼, 뛰어난 신체 조건이나 감각을 지닌 선수가 아니다. 그는 경기장에서 뛰고 또 뛰고 또 뛴다. 헤질 데로 헤진 박지성의 발이 온 국민을 감동시킨 적이 있는 것처럼, 인간 노무현은 ‘바보 노무현’이라고 불릴 정도의 우직한 근성으로 온갖 모순과 맞붙어 장삼이사들의 주먹을 불끈 쥐게 만들었다. 질 줄 알면서도 몇 차례나 경상도에서 ‘호남 정당’ 깃발을 꽂고 출마한 그는, 질 줄 알면서도 유비의 인정과 대의에 끌려 절대권력 조조와 맞섰다 결국 작은 별로 지고만 제갈량과 같은 호감을, 우리에게 줬다. 그는 진정한 좌파적 정치인이 여전히 발붙이기 힘든 한국 사회에서, 그나마 진보적이라는 레테르를 안고 견고한 벽과 맞서 싸운 일종의 대.표.선.수.였다. 그가 절규하며 내뱉었던 말처럼, “우리는 권력에 맞서서 권력을 한 번도 바꿔보지 못했고, 비록 그것이 정의라 할지라도, 비록 그것이 진리라 할지라도, 권력이 싫어했던 말을 했던 사람은, 또는 진리를 내세워서 권력에 맞섰던 사람은, 모두 죽.임.을. 당.했.”던 한국 사회에서 저런 대통령이 나올 수 있을까, 라며 모두가 신기해했다. 그래서 우리는, 권력의 공포가 준 아비투스에 길들여진 우리 스스로에겐 ‘밥그릇의 문제’라느니, ‘공고한 현실의 한계’라느니 따위의 위선적 변명으로 스스로를 합리화하며 싸움판에서 비켜선 채, 우리를 대신해 어떻게든 해보려고 애쓰는, 인간이자 정치인인 노무현을 대표선수 자격으로만 응원했고, 그 응원의 무게만큼이나 그의 실정에 반비례적으로 실망했다.

한 인간이 살아있을 때 우리는 그 인간의 파편적인 시대 일반에만 집중하며 가장 동시대적인 그의 삶의 일부만을 평가하게 되지만, 한 인간이 죽으면 우리는 전체를 한꺼번에 조망하는 망원적 시야로 그의 삶을 차분히 반추한다. 그런 면에서 노무현의 죽음은 최근 6년 동안의 실망만으로 평가되기엔 부족한 점이 있다. 결국 63년 동안 ‘바보’였던 노.무.현.이란 개인의 죽음은 여전히 비루하게나마 살아남고 있는 자들에게 일말의 경고장을 준 셈이다. 대표선수에게만 책임을 떠맡기고 나 스스로는 굴종하며 살아온 현실의 삶, 그 삶이 하나하나 모여 노무현에게 떠맡긴 책임이 그를 죽음으로 내몬 건 아닐까. 그 죄책감의 뒤안길에서 우리가 그저 눈물만 닦고 있기엔, 그 눈물이 너무 무기력하기만 하고 가식적이기만 한 건 아닐까.

노무현이란 사람의 죽음이 주는 무게감이 조금 덜어지는 순간, 조만간 밀어닥칠 죽음에 대한 온갖 부정적인 정치적 수사를 그저 멍하게 우울증에만 빠져있는 채 맞이한다면 곧 또 다른 ‘노무현’이 파생되진 않을까. 노무현이라는 ‘실험적’ 인물이 죽음으로 말하고자 한 건, 결국 그가 애써 싸워왔던 대상, 5년 동안 잠복됐다 다시 창궐하고 있는 한국 사회의 견고한 기득권 장벽이라는 가.족.력.에 익숙해진 우리를 깨우치는 마.지.막. 외침 아니었을까. 정치적으로 내몰리면 늘 ‘좌빨’이라는 치명적 화기로 무장한 채 편을 갈라 물타기를 시도하는 견고한 보수적 정치 지형, 5년 동안 자리보전의 눈치 보기에만 전념한 채 개혁적 시도를 사사건건 발목 잡는 복지부동 관료주의, 내 지역 출신의 정치인이 당선되면 내 지역 땅값이 오르고 돈줄이 술술 풀린다고 믿는 지리멸렬한 지역주의, 내 자식의 성공을 위해선 남의 자식은 철저하게 짓밟을 줄 알아야 한다고 가르치는 고집스런 가족주의, 개인적 치부를 위해선 주변의 처절한 삶에 눈길조차 주지 않는 주택 수집가들의 완고한 이기주의란 한국 사회의 가족력. 정의와 상식이란 이름을 지난하게도 배반해온 그 가족력을 다시 한 번 떨쳐낼 수 있는 실.험.이라도 해보자는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건, 나 혼자만의 환청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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