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과장해서, 대문을 열고 나가면 시장이 코앞에 있었다. 그 덕인지는 모르겠으나, 어린 시절 유독 엄마를 따라 재래시장에 가는 걸 좋아했다. 운 좋은 날에는 먹자골목에서 떡볶이와 잔치국수를 얻어먹는 횡재도 낚아 챌 수 있었고, 꼬맹이 손으로 엄마 짐도 덜어주면 어른이 된 것마냥 으쓱거림까지 느낄 수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재래시장 나들이는 꽤나 오감을 충족해줄 만한 나들이다.

종종 옷까지 챙겨 입고 남대문시장으로 원정을 나가는 날은 부잡스럽기 그지없었다. 나랑 동생의 옷을 입히고, 엄마 역시 동네 시장 갈 때의 패션과는 사뭇 다르게 스커트까지 챙겨 입고 집을 나서면, 그 때부터는 ‘바나나’ 먹을 생각에 흐뭇하였다. 지금은 흔해 빠진 ‘바나나’가 그 당시에는 천원에 딱 두 개였다. 귀했다. 내개 남대문시장은 동생과 하나씩 사이좋게 바나나를 손에 쥐었던 기억이다. 하루는 내내 기분이 좋았다.

흐릿한 기억이라도, ‘시장’은 누구에게는 추억의 공간이고, 설렘의 장소이다. 점차 엄마 손을 잡고 시장을 찾는 횟수가 적어지면서, 시장이 다시 엄마만의 장소로 변해가는 나이를 먹었고, 그 무렵 집 근처 곳곳에 대형 할인마트가 들어섰다. 하지만 엄마는 집 앞 시장을 두고 굳이 마트까지 나서지는 않았다. 다만 샴푸나 휴지, 비누나 세제 따위 공산품의 집안 재고를 살핀 후 목록을 작성해, 두 달에 한 번 꼴로 마트를 찾았던 것 같다. 엄마 손을 잡고 시장을 가던 꼬맹이는 어느새 운전대를 잡고 주차장까지 엄마를 모셔, 짐을 실어 나르는 일을 하고 있다.

엄마의 영향인지, 코앞에 있던 재래시장의 영향인지 알 수 없으나, 엄마 곁을 떠나서도 ‘재래시장’에 대한 낭만을 쉬이 버릴 수는 없었다. 특히 야채나 과일, 생선, 고기 등은 재래시장에서 사야 한다는 강박에 집에 들어갈 때면 왕복 30분이나 걸어 ‘무’ 하나를 살 때도 있었고, ‘두부’ 한 모를 살 때도 있었다. 엄마들도 하나 같이 “재래시장을 이용해야 한다”는 충고를 잊지 않았다.

헌데. 10분만 걸어가면 있는 대형할인마트 이마트에도 ‘두부’가 있다. ‘무’도 있고, 과일도 있고, 게다가 특가 할인이라도 들어가면 싼 값에 ‘호주산 쇠고기’를 살 수도 있다. 5분만 걸어가면 있는 롯데슈퍼는 12시까지 영업을 하기 때문에 12시 이전에 맞춰 가면 ‘과일’이나 ‘빵’ 등을 거의 반값에 살 수 있다. 늦은 겨울옷을 정리하면서 나온 드라이크리닝 세탁물은 이마트에 있는 세탁체인업체에 맡기면 된다. 자정이 다 된 시간 출출하기라도 하면 걸어서 15분 거리에 있는 킴스클럽에 들러 갓 우려 낸 국물이 일품인 잔치국수로 요기도 할 수 있다. 게다가 킴스클럽은 24시간 영업이니 여유를 부려도 괜찮다.

▲ 옥션 광고 ⓒ 옥션 홈페이지 캡처
그렇게 점차 재래시장이 우리의 일상에서 멀어지고 있다. 대형할인마트와 SSM(Super SuperMarket)에 일상의 전부가 친숙해질 수밖에 없게 된 지금, 새로 시작한 TV 광고 한 편이 영 불안하다. 카트를 끌고 날아가던 고현정이 “마트에서 돈을 무척 아낀 것 같습니다”라며 흐뭇해하더니, ‘마트를 안 거치면 가격이 내려가는 법’이라는 말 한마디에 땅바닥으로 추락한다. 인터넷 쇼핑몰 ‘옥션’이다. 아차. 인터넷 쇼핑몰이 있었구나. 자리에 앉아 몇 번의 클릭질로 상품을 구입하고, 집으로 ‘무료’로 배송해주니 품도 덜 들이고, 바글거리는 사람 틈 사이로 카트를 끌고 늘어진 계산대 앞에서 줄을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잖아. 게다가 유통 마진이 적어 ‘싸다’고. 요즘 같은 불경기에 가계 부담을 덜어주기에 그만이네. 일하는 시간에 쫓겨 부산스럽게 돌아다니지 않아도 되니 편하기는 얼마나 편할까. 익숙한 미래를 보는 듯 하다.

재래시장의 붕괴가 이미 어제오늘의 일도 아니고, 대형할인마트 규제 및 재래시장 활성화를 위한 정책과 입법안 등에 대한 논의 역시 시작된 지 오래다. 굳이 유럽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한국형 대형할인마트와 SSM이 도를 넘어 섰구나 하는 생각은 누구에게라도 공감을 얻을 수 있는 보편타당한 감정이다. 어린 시절 추억도, 한 줌 쯤 덤으로 집어 넣어주는 재래시장 상인들의 마음 씀씀이도, 편리함과 생활패턴의 변화를 이겨낼 재간은 없다. 도시는 추억보다는 편의성에 몸이 움직여지도록 설계된 구조물이다. 개인의 의지와 힘으로 막기란 여간 까다로운 일이 아니다.

광고는 그래서 흉악스러운 것인지도 모른다. 마치, 나의 몸이 어떻게 구조화되어 있는지를 알려주는 것 같다. <1박2일> 출연자들이 “홈플러스 가격이 착해, 홈플러스 매장이 시원해”라며 신나게 노래를 부르면 재래시장도 가격은 착할 수 있겠지만, 엄청 덥겠구나, 하는 생각이 몰려온다. 어쩌겠나, 사실인 것을.

언젠가 인터넷 쇼핑몰의 광고도 그럴 날이 올지 모르겠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다. 고현정이 바닥으로 떨어진 그 순간, 인간미까지 바닥으로 추락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연쇄 작용으로 대형할인마트도 SSM까지도 순간 정나미가 뚝 떨어진다. SSM이 들어서면, 주변 자영업자 50명이 문을 닫는다는 통계도 있단 말이다.

▲ 홈플러스 광고 ⓒ 홈플러스 홈페이지 캡처
맞다. 나는 어쭙잖은 ‘재래시장’ 예찬론자이다. 순간 순간 배신할 때도 있어 부끄럼이 살짝 밀려오긴 하지만 그렇다. “그럼 너나 재래시장 가”라고 쿨하게 말한다고 해도 할 말은 없다. 모든 것이 개인적인 실천이라 해도, 의미와 메시지 역시 ‘그건 내 생각일 뿐’이라 하더라도, 주저앉아 정부 정책과 규제 입법만을 기다리는 것은 갑갑한 일이다. 홈플러스도 옥션도, 압도적인 자본 규모를 가지고 극악한 매출을 이미 올리고 있는 쇼핑몰들도 TV에서 광고를 안했으면 좋겠다. 그럴싸한 연예인들이 등장하여 홍보하는 것은 본의 아니게 누군가의 생존권을 파괴하는 행위일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몰려오기 때문이다.

시장 만능의 시대에 불가능한 소박함일까, 차라리 재래시장 홍보해 줄 연예인 어디 없나요?를 외치는 것이 현실적인 방법일까. 명절 때만 되면 등장하는 시장 풍경 말고, 민심 살피러 가는 정치적 쇼장으로서의 시장 말고, 흥정도 하고, 덤도 주고, 그러다 먹자골목에서 시원한 열무국수라도 한 그릇하는 시장의 풍경을 담는 광고에 출연해 줄 만한 그런 스타 어니 없나 모르겠다.

다분히 감성적으로, 다소 유치하더라고 옛 추억까지 방울방울 꺼낸다면 금상첨화인 CF의 주인공이 필요하다. 얼마 전 MBC <세바퀴>에 출연한 선우용녀가 말하기를, 그녀는 신세계백화점에 주차를 하고, 그 건너편 남대문시장에 전원주와 함께 간다는데. 이 두 분은 어떨까. 게다가 전원주는 6월부터 열리는 제주도 ‘3다도에서 6개시장이 9가지 즐거움을 전하는 축제’에 홍보대사를 맡았다는데. 딱이네. 개인적으로는 차인표-신애라 부부도 좋고, <태희혜교지현이>의 보배엄마, 은경엄마, 땡철엄마, 준수엄마도 괜찮고, <내조의 여왕> 태봉이도 괜찮을 것 같은데. 재래시장 광고가 재래시장에 빚진 나의 맘을 달래볼 요량만이 아니라 기업화되는 자본의 그늘 속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네에게 생활 정치로서의 메시지를 던져준다면 괜찮을 것 같은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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