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대놓고 드러내는 유희열 찬가이다. 주관적이면서도 빠순이스러운 요소가 다분함을 먼저 밝힌다.

토이남이 대세라고 한다. 토이남의 정의에서부터 시작해 취향, 소비 행태, 라이프스타일까지… 언론들도 너도 나도 토이남 열풍을 다루느라 정신없다. 사실 나는 토이남의 유형 따위, 별 관심 없다. 유희열이 ‘토이남’이라는 문화 트렌드 안에 들어가는 모습도 나쁘지 않지만, 내가 좋아하는 유희열의 모습은 ‘뮤지션’ 유희열의 모습이고, 난 그런 그의 모습을 좋아하는 팬일 뿐이다. 그래서 나는 원조 토이남, 가수 유희열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미디어스 편집장을 비롯해 유희열과 토이(TOY)의 관계를 모르는 분들을 위해 설명하자면, 유희열이 이끄는 프로젝트 그룹의 이름이 토이이다. 김연우, 김형중, 이지형 등이 토이 객원보컬로 참여했다. 다시 한 번 강조한다. 유열이 아닌 유희열이다.)

▲ 유희열 ⓒKBS
‘아이돌의 아버지’ ‘토이의 리더’ ‘가요계의 임금님’ ‘병든 차인표’. 진정한 ‘혈빠’ (팬들은 ‘혈님’이라는 애칭을 흔히 사용)라면 이쯤 되면 슬슬 입질이 오기 시작한다. 팬들이 유희열에게 붙인 이같은 별명을 듣고도 아무런 감도 오지 않는다면 당신은 진정한 유희열 팬이 아니다. KBS 2TV <유희열의 스케치북> 방송을 유심히 보면 이러한 별명들이 손팻말로 자주 비치곤 한다. 아, 요즘엔 ‘우유빛깔 유희열’도 자주 쓰인다.

MBC 라디오 <유희열의 음악도시>, <올댓뮤직>, 그리고 현재 진행하고 있는 KBS <유희열의 라디오천국> 등 오랜 시간 동안 라디오 DJ를 통해 다져온 그의 입담은, 현재 <유희열의 스케치북>을 통해 절정을 이루고 있다. 데뷔 후 처음으로 MBC 예능프로그램인 <명랑히어로>에 잇달아 출연해 예능감을 익힌 그는, 지상파를 통해 경박스러운 웃음소리와 저질 유머, 분홍빛 잇몸을 드러내며, 그렇게 서서히 여심을 흔들고 있다. (2009년 예능 기대주라는 어이없는 소문도 돌고 있다.)

나는야 ‘유희열 빠순이’

유희열을 향한 나의 빠순이스러운 기질은 예전부터 유명했다. 가만 있다가도 유희열과 유열을 혼동하는 어른들을 만나면 나도 모르게 그만 발끈해 버리곤 한다. 고등학교 때부터 얼마 전까지, 누군가 나에게 이상형을 묻으면 주저하지 않고 ‘유희열 같은 남자’라고 답을 했다. 몇몇 친구들은 이런 나에게 ‘멸치’ ‘추파춥스’ 같은 사람이 이상형이라고 놀려대곤 했지만, 그래도 나는 좋았다. 분홍빛 잇몸에 경박스러운 웃음과 저질 유머는 덤이요, 가녀린 손가락에서 나오는 피아노 선율까지. 이런 내가 조금 걱정이 되셨는지 고향에 계신 아빠는 얼마 전 나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하셨다. “남자는 그때 TV에서 본 사회자 같은 너무 마른 사람 고르지는 말고.” <유희열의 스케치북>을 함께 시청하면서 광분한 나의 모습을 보고, 유희열 같은 남자를 고를까봐 아빠는, 살짝 걱정이 되셨나보다.

그러던 중 지난달 21일, 나는 드디어 꿈에 그리던 유희열을 내 눈 앞에서, 그것도 아주 가까이에서 보고야 말았다. 스케치북 첫 방송 녹화를 방청하기 위해 얼토당토않은 사연을 썼는데 운 좋게 당첨이 되었다. 뭐라고 썼는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뽑아주면 열심히 박수치겠다’ ‘제발 뽑아달라’ 는 내용이 주를 이뤘던 것 같다. 사실, 내가 방청을 하고 있을 그 시간에 다른 기자들은 대기실에서 편하게 유희열을 인터뷰했지만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객석에서 직접 음악을 듣고, 보고, 느끼고, 참여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기에 방청 신청을 했다.

유희열을 앞에서 보겠다는 나의 일념 덕택에 죄 없는 후배는 여의도의 차가운 바람에 맞서가며 오전 11시, 입장 순서가 적힌 영광스러운 번호표를 받아냈다. 참 쉽지 않았다고 후배는 나에게 투덜댔다. 실물로 본 그의 모습은 참 말랐다. 솔직하게 정말 없어 보였다. ‘유니세프 외모’라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그러나 음악과 함께 하는 그의 모습은 진정으로 행복해 보였고, 그런 모습을 보는 나도 진정으로 좋았다.

▲ 4월 24일 방송된 KBS 2TV <유희열의 스케치북>에서 유희열이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다. ⓒKBS
유희열 그리고 음악, 라디오

토이남 열풍에 가려져 살짝 아쉬운 게 하나 있다면, 이는 바로 그의 음악이다. 사람들은 그의 DJ로서의 역할, 음악 프로그램 진행자로서의 자질을 높게 사지만, 나는 음악인으로서 그의 능력을 가장 높이 산다. 아무리 빵빵 터지는 입담을 지닌 그라 할지라도, 그의 본업인 음악에서 주목받고 인정받지 못했더라면 오늘날 토이남의 인기는 그저 허세에 그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지난 1993년 제4회 유재하가요제에서 대상을 차지하며 프로젝트 그룹 <토이>로 본격적인 음악 활동을 시작한 유희열은 이제까지 모두 6장의 정규 앨범과 삽화집 <익숙한 그집앞>과 소품집 <여름날> 등의 앨범을 발매했다. 2007년 발매한 6집 앨범 ‘Thank You’는 올해 3월에 열린 제6회 한국대중음악상에서 ‘최우수 팝 노래’와 ‘올해의 음악인’을 수상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흔히 말한다. 음악은 사람들에게 위안이 되고 쉼을 준다고. 유희열의 음악도 나에게는 그런 존재였다. 떨어지는 낙엽 하나에도 까르르 웃던, 수줍음 많고 감수성 풍부했던 고등학교 시절, 그의 음악은 나에게 위로였고, 쉼이었고, 동시에 행복이었다. 누군가를 처음 진중하게 좋아했을 때 설레는 마음으로 주구장창 반복해 들었던 노래도 그의 노래였고, 덩그러니 혼자 있는 것 같은 외로움을 느낄 때 주구장창 반복해 들었던 노래도 그의 노래였다. ‘좋은 사람’ ‘혼자 있는 시간’ ‘미안해’ ‘소박했던 행복했던’ 등을 비롯한 노래 하나하나는 야간자율학습 등으로 피폐하고 팍팍했던 나의 고등학교 시절을 꽤나 아름답게 장식한 활력소였다.

그에게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한 가지 존재는 바로 라디오이다. 내가 고3이었을 때 그는 새벽 1시부터 2시까지 MBC 라디오 <올댓뮤직>을 진행하고 있었다. 졸린 눈을 부벼가며, 그의 라디오를 들으면서 키득키득거렸던 기억이 있다. 찌질함의 극치를 보여줬던 ‘더듬이와 올가미’ 코너도 기억한다. 늦은 시간에 이불속에서 친구와 문자를 주고받으며 라디오에 흘러나오는 내용에 대해 낄낄대던 그 때가, 나는 지금도 그립다. 그래서인지 당시 해당 프로그램의 PD였던 남태정 PD를 MBC에서 먼발치에서 보게 되었을 때 꼭 유희열을 만난 것과 같은 두근거림을 느끼기도 했다. 팍팍했던 그 시절에 좋은 기억을 만들어 준 것에 대한 고마운 마음이었을테다.

▲ KBS 라디오 <유희열의 라디오천국> 홈페이지 캡처
평생 만인의 연인이었을 것 같던 그가 어느 날 결혼을 한다고 했다. “오빠는 낙엽이야”라는 한 마디를 흘리고. 그가 결혼하던 날 수많은 팬들은 진심으로 그의 결혼을 축하했지만 속으로는 울었다. (나도 살짝 서운하더라.) 그렇게 결혼을 한 그는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고, 내년이면 마흔을 바라보고 있다. 이와 함께 교복을 입고 유희열의 노래를 좋아하던 나는 어느덧 대학교를 졸업해 사회인이 되었고, 기자라는 직업을 얻어 유희열에 대한 기사를 쓰고 있다.

시간은 그를 중년으로, 나를 어른으로 만들었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그는 흰 머리가 지긋해지며, 배도 불룩하게 나올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비록 나의 영원한 ‘혈님’이 대머리가 된다 할지라도, 나는 그의 영원한 ‘팬’으로 남을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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