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몇 주간은 박찬욱 감독의 신작 <박쥐>로 영화계가 간만에 시끌벅적했습니다. 평론가 사이에서는 물론 팬들 사이에서도 <박쥐>의 작품성을 두고 설왕설래가 오고갔으니까요. 현재 <박쥐>는 칸 영화제 경쟁부분에 초청된 상태며, 그곳에서도 나름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하지만 현재 <박쥐>의 네이버영화의 평점을 살펴보면 5.51로 아주 저조합니다. <박쥐>와 관련된 각종 기사에도 소위 악플이 상당히 많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박쥐>가 최고였다고 선택한 사람도 많습니다. 네이버 평점은 5.51에 불과하지만 이 영화가 최고라고 추천한 사람만 1000명이 넘었거든요. 그야말로 호불호가 명확하게 갈린 작품입니다. 동시에 좋고 나쁘고를 떠나 <박쥐>는 올해 한국 영화계에서 가장 큰 관심을 받은 작품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도 <박쥐>를 봤습니다. 애초에 어떠한 편견도 없었습니다. 영화팬의 한 사람으로서 그냥 가슴이 가는 방향대로 따라가려고 노력했습니다. 보면서 쓸데없이 잔머리 굴리지도 않았습니다. 그렇게 영화를 다 본 직후 가슴 속에 떠오른 생각을 잽싸게 뇌의 진공 보관소에 저장했습니다. 아래의 글은 그때 떠오른 생각을 조심스럽게 풀어낸 결과물입니다.

전 영화를 보며 끊임없이 새로운 뭔가를 찾습니다. 새로운 대상은 독특한 이야기 전개 방식이나 화면 구성의 아름다움 그리고 혁명적인 시각효과가 될 수도 있고, 또 몰입도를 높여주는 편집방식, 독특한 촬영 방식, 그리고 새로운 이야기(내용)까지 무엇이든 포함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좋은 영화엔 반드시 신선함을 느낄 수 있는 요소가 하나는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새로움이 없다면 영화는 공장에서 찍어내는 공산품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영화 속에서 새로움을 발견할 때의 쾌감은 영화보기 즐거움의 핵심입니다. <데어윌비블러드>의 오프닝을 보면 10여 분간 대사가 한 마디도 안 나옵니다. 하지만 대사 한 마디 없이 이야기 전개의 준비를 완벽하게 소화해냅니다. 비슷한 시기에 개봉했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도 새롭긴 마찬가지였습니다. 관객의 염통을 죄어오는 긴박한 코언형제의 편집은 고전적인 방식 속에 새로움이 묻어났습니다. 시종일관 6mm 카메라를 흔들어대는 <클로버필드>도 새로운 촬영방식과 이야기 전개로 어지러움과 함께 신선함을 선사해줬으며, <더폴;오디어스와 환상의 문>은 극단적인 풀샷과 원색의 조화로운 구성으로 화면 구성의 아름다움을 극한으로 밀어붙였습니다. 영화 보기는 분명 간접 체험을 통해 즐거움을 추구하는 행위입니다. 우리는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면, 약간의 불편함과 함께 묘한 쾌감을 느끼게 됩니다. 때문에 반복적인 일상을 벗어나, 끊임없이 새로운 경험을 추구하는 것이죠. 영화 보기에서 새로움을 추구하는 것도 이러한 원칙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겁니다.

▲ 영화 <박쥐> 메인 포스터 ⓒ <박쥐> 홈페이지
<박쥐>는 10년 넘게 박찬욱 감독의 머릿속에 담겨있던 이야기가 집대성되어 표현된, 스케일이 큰 작품입니다. 감독은 <박쥐>를 제작하기 전, <복수는 나의 것>, <올드 보이>, <친절한 금자씨>로 이어진 복수 3부작을 만들었습니다. 박 감독은 인간 내면, 그 중에서도 복수심을 집요하게 파헤쳤습니다. 복수심은 뜨겁게 이글거리는 과잉의 에너지이자, 폭력적이고 어두운 심연의 에너지입니다. 때문에 복수를 다룬 그의 영화들은 과잉된 감정이 스크린 위를 넘실거리며, 영화 속 분위기는 분노와 죄책감 등으로 얼룩져 시종 일관 어둡고 우울했습니다. 거기에 박찬욱 감독의 매력이 있었습니다. 박찬욱 감독은 너무 뜨겁고 어두워서 내면 깊은 곳에 숨겨져 있던 인간의 복수심을 표면 위로 끄집어 내, 적나라한 방식으로 관객의 눈에 들이댄 것입니다. 분명 불편하면서도 쉽지 않은 작업을 그는 탁월한 연출력으로 극적 몰입도를 높였고, 관객들은 그의 영화를 불편해하면서도, 한편으로 열광했습니다. 그는 그동안 감히 드러내지 못했던 인간의 어두운 면모를 마치 카프카가 <시골의사>에서 인간의 실체를 구더기가 득실대는 존재로 표현한 것처럼 거침없이 요리했죠.

박찬욱 감독의 작품은 또한 형식적으로도 새로움이 넘쳤습니다. <올드보이>에서 오대수가 수십 명의 깡패들과 싸우는 장면을 수평으로 잡아 롱테이크로 촬영한 장면은 지금도 잊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합니다. 롱테이크로 표현한 액션신은 극적으로 화려하진 않아도, 사실감을 강하게 느낄 수 있었거든요. 마치 오대수의 지친 숨소리가 피부로 와 닿는 것 같았고, 그 장면을 보고 나면 마치 제가 직접 싸운 것처럼 피곤했습니다. <친절한 금자씨>에서도 금자가 편지로 딸과 이야기하는 장면에서 화면을 분할해, 교차로 편집하는 방식은 어미의 복수심에 내포되어 있는 분노와 슬픔을 적절하게 표현했습니다. 때문에 제게 박찬욱 영화는 새로운 경험을 제공하는 보증수표였고, 내용이 어둡건 말건 전 박찬욱 영화에 열광했습니다.

<박쥐>는 역시 새로움으로 넘쳐났습니다. 먼저 공포 영화로서의 새로움. 피를 보면 자신의 야수성을 억제 하지 못하는 뱀파이어의 모습은 언제나 관객들을 긴장하게 만듭니다. 특히, 주인공 뱀파이어가 스스로의 야수성을 억제하려 노력하면 할수록, 본성을 억제하려는 이성과 본성의 충돌이 가져오는 긴장감은 더욱 커집니다. 소년, 소녀의 아름답고 순수한 사랑을 그린 영화 <렛미인>이 긴장됐던 이유도 소년의 피를 보고, 본성을 사랑으로 억제하려는 소녀의 모습이었습니다. <박쥐>에서도 상현은 끊임없이 스스로를 억제하려 하고, 그 사이에서 긴장과 스릴은 커집니다. 여기서 박찬욱 감독은 유머의 변주곡을 연주하기 시작합니다. 긴장과 스릴로 빽빽하게 들어찬 진공 상태의 풍선을 유머란 바늘로 구멍을 내버린다고나 할까요. 그래서 피를 빨아먹는 섬뜩한 사운드가 만들어 놓은 긴장 상태는 수혈된 피를 누워서 먹는, 때로는 오렌지 주스 먹듯, 냉장고에서 수혈된 피를 먹는 상현의 우스꽝스러운 모습과 결합하며 박찬욱만의 묘한 분위기를 창출해냅니다. 웃을 수도, 그렇다고 무서워할 수도 없는 독특한 상황이 만들어진 것이죠.

두 번째는 팜므파탈 장르의 새로움. 영화 속 태주는 자신의 매력으로 남성들을 파멸로 이끄는 인물입니다. 박찬욱 감독은 팜므파탈의 속성에도 변주를 가합니다. 태주를 죽인 상현. 갑자기 태주의 피를 빨기 시작하고, 자신의 피를 태주에게 먹여 뱀파이어로 부활시킵니다. 팜므파탈의 장르에 뱀파이어 장르가 절묘하게 조합되는 순간입니다. 독특한 장르들이 세워놓는 높은 벽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박찬욱에게 영화의 장은 마음껏 활보할 수 있는 무한대의 넓은 공간인 것이고, 그 속에서 뛰노는 박찬욱 감독의 모습은 그 누구보다 자유로워 보였습니다.

▲ 영화 <박쥐> 스틸컷 ⓒ <박쥐> 홈페이지
<박쥐>는 장르의 조합을 자연스럽고 절묘하게 넘나듭니다. <박쥐>가 보여준 새로운 점은 바로 이 부분입니다. 팜므파탈과 뱀파이어 장르 사이를 변주하던 영화는 또 다시 범죄극의 장르로 넘어옵니다. 손톱으로 메시지를 남기고 눈을 깜빡여 의사를 전달하는 라여사의 모습은 범죄극이 전해주는 긴장감을 극한으로 밀어붙입니다. 블랙코미디와 호러, 팜므파탈과 범죄극의 장르가 <박쥐> 속엔 자연스럽게 녹아들어있습니다. 각각의 장르가 제공할 수 있는 영화적 쾌감은 최고조로 발휘되고 있었으며, 영화 속에서 장르가 전환되는 과정은 전혀 논리적인 비약이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정도의 장르 융합을 두고, 각각의 장르가 따로 논다고 얘기한다면 다양한 장르를 섞는 영화 자체를 만들지 말라고 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분명 <박쥐>는 로버트 로드리게스가 만들었던 <황혼에서 새벽까지>나 에드가 라이트의 <뜨거운 녀석들>을 넘어서는 장르 짬뽕 영화였습니다. 오히려 문제는 장르 융합의 삐걱거림에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분명 다양한 장르는 변주를 거치며 조화롭게 융화되고 있었습니다. 각각의 장면이 제공해주는 몰입도도 강렬했죠. 그럼에도 전체적인 이야기에 대한 몰입은 분명 무언가에 방해받고 있었습니다. 원인은 무엇일까요? <박쥐>는 병에 걸려 죽은 신부가 수혈을 통해 뱀파이어로 부활하며 시작됩니다. 애초부터 <박쥐>의 밑바탕엔 리얼리티보다는 초현실적인 분위기가 지배적입니다. 회사 사람들과 함께 모여 마작을 한다거나, 라여사가 보드카를 마시는 모습, 그리고 태주와 강주의 특이한 관계 등도 영화의 무대가 허구의 공간임을 대놓고 드러냅니다. 제 몰입은 여기서 걸려버립니다. 영화는 감정의 과잉을 드러내기 위해 초반부터 비현실적인 설정들을 마련해놓았습니다. 영화가 본격적으로 다루는 이야기는 상현이 어두운 내면의 에너지로부터 고뇌하는 현실적인 주제입니다. 그러나 도처에 깔린 ‘비사실적’인 장면들은 상현이 죄책감과 욕망의 사이에서 괴로워하는 ‘사실적’인 고민으로의 몰입을 방해합니다. 마작을 두던 강주가 갑자기 태주를 무릎위에 앉히고 태주는 이를 뿌리치다 넘어집니다. 속옷이 훤히 드러나고, 마작을 두던 사람들이 코믹하게 그 장면을 바라봅니다. 전 납득할 수 없는 상황 설정이었습니다. 자연스레 태주가 느끼는 외로움과 공포도 과장된 라여사나 강주의 모습 때문에 가슴 깊이 와 닿지 않았습니다. 이야기의 몰입이 없는 과잉 이미지는 영화에서 폭발하는 감정에너지를 관객의 피부에 전달하지 못합니다. 그동안 박찬욱 영화가 보여줬던 힘은 어둡지만 넘치는 감정으로 관객들을 빨아들이고, 감정의 평정심을 뒤흔들어놓은 데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감정의 과잉이 관객의 피부에 와 닿지 않는 박찬욱 영화는 다른 영화들에 비해 급속도로 힘을 잃게 됩니다.

물론 기본적으로 모든 영화는 허구입니다. 하지만 허구를 사실로 착각하게끔 만들어야 허구가 노린 메시지의 효과는 강렬해집니다. 현실에 뱀파이어는 없겠지만 뱀파이어가 정말 존재한다고 믿게끔 만들어야 공포의 효과는 배가됩니다. 예를 들어 영화 <렛미인>의 경우도 비현실적인 장면이 등장하지만 소년과 소녀가 사랑하는 모습은 매우 사실적입니다. 때문에 소녀가 뱀파이어라는 설정은 소년과 소녀의 사실적인 사랑을 강조해주는 적절한 부수적 장치로 작용을 합니다. <올드보이> 역시 15년간 갇혀있다는 설정은 비현실적이었지만, 오대수가 느끼는 분노와 그 분노를 표출하는 과정에서 그가 맞닥뜨리는 상황은 충분히 사실적이었습니다. <친절한 금자씨>에서 금자가 느끼는 분노와 학부모들과 함께 그가 가하는 복수의 폭력은 영화 속 초현실주의적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공감이 갔습니다. 하지만 <박쥐>는 주제를 드러내기 위한 주변의 설정들이 지나치게 허구적이었기 때문에, 상현과 태주가 보여주는 사실적인 감정은 허공에 떠버리고 만 것이죠. 그래서 전 장면 장면에 깊게 몰입하고도 전체 영화를 보고 난 뒤의 기분은 어딘가에 깊게 들어가지 못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분명 <박쥐>는 새로움으로 가득한 수작입니다. 이동진 기자의 말대로, 영화를 보는 내내 영화보기의 쾌감을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형식의 새로움은 이야기의 논리적이고 사실적인 전개 자체를 압도하고 말았습니다. 때문에 영화 속 각각의 장면은 머릿속에 강렬히 자리잡았지만, 전체적인 이야기는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예전에 <친절한 금자씨>를 보면서도 예전 <올드보이>보다 시적으로 변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의미가 불분명한 초현실주의적인 장면이 늘어났으며, 내러티브도 압축과 생략이 늘어나 <올드보이>같은 전개의 촘촘함은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박쥐>를 보며 점점 박찬욱 감독이 이야기보다는 이미지에 천착하는 것이 아닌지, 그로 인해 혹시 대중과의 소통이라는 기본적인 원칙을 간과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가 들었습니다. 난 보다 많은 사람이 박찬욱의 기괴하면서도 상상력 넘치는 어두운 세상을 공감했으면 합니다.

책, 영화, 여행을 통해 다양한 지식과 경험을 추구하는 부지런한 블로거, ‘알스카토’입니다. (http://blog.naver.com/haine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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