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말 ‘야마’는 우리말 ‘뫼’(山)와 같다. 일본 영화 <녹차의 맛>을 보면 “야마요 야마요~”를 되풀이하는 이른바 ‘야마요 송’이 나오는데, 노래를 부르는 이들의 율동이 모두 산 모양을 본뜬 것임을 알 수 있다.

한국에서는 이 ‘야마’가 몇가지 은어로 자리잡았다. ‘야마 돈다’는 달리 설명이 필요 없을 듯하고, 철공소에서는 나사의 톱니 마루 부분을 ‘야마’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 ‘야마’를 언론계만큼 자주, 또 ‘심오’하게 쓰는 집단도 없는 것 같다.

기자들끼리 업무와 관련해 가장 자주 쓰는 표현이 “팩트가 무엇이냐”와 “야마가 무엇이냐”다. 여기서 말하는 ‘야마’는 ‘기사의 주제와 문제 설정’ 쯤에 해당하는데, 이렇게 정색하고 개념을 설명하는 것이 멋쩍을 만큼 저널리스트라는 직업의 장(場)에서의 아비튀스(계급·계층 등 집단에 내면화한 습속)를 강하게 내포하고 있는 표현이다. (그래서 기자들이 ‘야마’를 대체할 우리말 표현을 쓰지 않는 건지도 모르겠다.) 여기 하나의 전형적인 사례를 보자.

▲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 ⓒ여의도통신
얼마 전 미국을 방문한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이 워싱턴 특파원들과 만찬 간담회를 열었다. 이에 대해 조선일보는 최 위원장이 자신과 이명박 대통령이 가난을 ‘공유’한 ‘인연’을 강조하며 눈물을 쏟았다고 보도했다. 경향신문은 “지난 대선 때 완벽하게 합법적이었다고 말하지는 않겠지만 가장 돈 적게 드는 선거운동을 했다”고 말한 대목을 중시했다. KBS는 전제조건은 거두절미하고 ‘KBS 수신료를 인상하겠다’고 발언한 부분만 따서 옮겼다.

관련기사들을 샅샅이 뒤져 퍼즐을 맞춰보니 최 위원장은 이날 7가지 정도의 주제로 이야기를 한 것 같다. 하지만 개별 보도들만 보면 도통 계통을 짚어낼 수가 없다. (저널리즘에 보편타당성이 있기나 한지 의심이 들 정도다.) 그보다 훨씬 쉽게 알아챌 수 있는 건 매체들이 자기가 보고 싶고 전하고 싶은 것만 고르거나 앞세워 보도하는 행태다. 이것이 바로 ‘야마’의 뒤안길 풍경이며, 기자들이 팩트 못지않게 중시하고 있는 바로 그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야마’는 ‘팩트’의 뒤를 따라야 한다. 그러나 다른 야마에 의해 구성된 기사가 완전히 다른 팩트로 전달되는 현실이라면 야마는 팩트에 선행하거나 적어도 동행한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저널리즘 행위가 존재하는 모든 팩트를 전할 수 없는 근본적 한계를 안고 있듯이 하나의 팩트 군(群)을 가치를 배제한 채 무작위로 나열할 수 없는 것도 엄연한 숙명이다. 그래서 언론은 가치를 반영해 팩트를 ‘캐스팅’하고 ‘연출’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구조적 한계가 ‘권력화’의 빌미가 되고 ‘남용’되는 것이다. 그러나 경계해야 할 것들은 이미 현실에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 또한 우리에겐 익숙한 풍경이다.

※ 이 글은 <한국방송대학보> 제1539호(2009-05-11)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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