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일 없이 산다>의 입소문이 하도 자자하기에 나도 한 번 들어봤다. 관객 천만이 넘는 영화는 부러 피해가고, 그래서 독립영화계의 블록버스터라는 <워낭소리>도 언제 볼지 기약할 수 없지만, 장기하의 노래는 돈 한푼 안 들이고 인터넷 검색으로 단 몇분이면 들어볼 수 있으니, 무슨 결벽증이 아니고서야 안 들을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결심한 게 앨범 발매 근 두 달 만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듣는 것도 저작권 침해인가? 별일 없겠지?)

들어보니 귀는 그다지 즐겁지 않고, 다만 키치적 가사가 재미있었다. 이걸 송창식이 불렀던 <왜 불러>의 21세기 버전이라고 봐도 되나 모르겠다. 둘다 반어적 가사이긴 한데, 송창식은 절규하는 듯하면서도 하회탈 같은 눈웃음을 치고, 장기하는 무표정에 하품하듯 읊조리다 버럭 소리를 지르는 정도가 30년 세월이 벌려놓은 차이가 아닐까 싶었다. 어쨌든 난 그 시간의 간극을 몸속으로 온전히 수렴해, 가끔 절규하면서도 별일 없이 무표정하게 하품하며 하루하루 산다.

그러나 “별일 없이 산다”가 꼭 반의적으로만 들리는 것은 아니었다. 천적을 만나면 겁을 집어먹은 채 몸을 잔뜩 부풀리는 목도리 도마뱀처럼 별일 많아 죽겠는 자가 별일의 원인 제공자 앞에서 벌이는 허풍이나 허세일 수도 있지만, 별일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는 관조적 무감각 또는 감각 마비 상태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런 면에서 이 노래의 제목과 가사는 다의적이다. 지금 우리는 어떤가? 별일 없는가, 별일 많아 죽겠는가, 아니면 별일 많은데 못 느끼는가?

▲ 2008년 6월 10일 광화문의 촛불. ⓒ미디어스
1년 전과 오늘의 광화문 네거리 풍경은 상전벽해다. 기억은 나는가. 촛불의 물결을 명박산성이라는 조형물이 가까스로 막아서고 있던 지난해의 그 기하학적 풍경을. (어, 그런 일도 있었던가?) 시민들의 함성 가득하던 그곳이 지금은 불도저와 포클레인 굉음으로 소란하다. 문화의 도시 서울의 새 명소, 광화문광장 조성 공사가 한창이다. 지난해 같으면 촛불이 만조 사리로 치닫던 6월에 맞춰 광화문광장은 완공될 예정이다. (그새 뭔 일이 있었던 걸까?)

어쨌든 광장이 하나씩 들어설 때마다 시민들은 즐겁다. 이명박 대통령의 서울시장 시절 때도 그랬다. 자동차로 가득찼던 시청 앞이 서울광장으로 바뀌자 가족과 연인들이 몰려나와 마천루 한가운데 펼쳐진 잔디밭을 뒹굴며, 머리 위 뭉게구름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선진한국의 현실로 읽어냈다. 이제 시민들은 새로 열리는 광화문광장에서 기념사진도 찍고, 비보이들의 배틀을 구경하며 박수도 칠 것이다. 이런 세상인데 1년 전 그때는 왜 그랬을까?

겉으로는 정말 별일 없다. 안녕하다. 옛 애인과 나누던 열정적 사랑은 생물학적 집착의 인문학적 과대포장일 뿐이라고, 헤어진 1년 뒤 그렇게 상기할 수 있다면, 그건 별일 없는 거다. 안녕한 거다. 그도 아니면 그때는 정말 행복했고, 현실은 요지부동으로 엄혹했으며, 끝내 아름다운 건 추억 그 자체뿐이라고 누군가에게 쓸쓸하게 말할 수 있으면, 그것도 그럭저럭 별일 없는 거다. 1년 뒤에도 서로 욕지거리하는 관계가 아닌 것만 해도 대충 안녕한 거다.

그러나 봄밤 보송보송한 풋바람 속에서, 또는 한낮 무심히 피어 있는 들꽃 몇송이에서 특정한 존재를 좇는 그리움을 느낀다면, 비록 말 못하게 사무치거나 가슴이 미어지지는 않더라도, 우리의 모든 별일 없음은 ‘체념’이라는 무성영화의 낡은 필름을 느리게 돌리며 웅장한 돌비시스템 사운드 트랙을 상상하거나, 환청으로 듣고 있는 거다. 사실은 별일 있는데, 별일 많아 죽겠는데, 별일 없다고 둘러대거나, 그도 아니면 자각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독일 울리히 벡 교수의 ‘위험사회론’은 인류의 위험 관리에 관한 근대적 인식론에 종언을 고했다. 위험은 과학(이성과 경험의 체계화)에 의해 통계적으로 예측할 수 있고, 투자하면 예방/관리할 수도 있다는 믿음을 부정한 것이다. 위험을 인지하고 예측하고 예방/관리할 수 없다는 건 무서운 일이다. 통계와 확률에 기반한 보험시스템이 정상적으로 작동할 수도 없다. 쉽게 말해 부자도 거지도 똑같은 위험 조건에 노출된다는 얘기다. 그가 이렇게 주장하는 근거는 무얼까.

울리히 벡 교수는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폭발 사고를 예로 든다. 이 사고가 위험사회론의 근거가 된 것은 어마어마한 사고 규모 때문만은 아니다. 원자력발전소 폭발 사고는 확률이 현저히 낮다. 통계학적으로 예측할 수 없기에, 지난해 한국사회 일각에서 주술처럼 외워대던 ‘골프장에서 홀인원하고 벼락 맞을 확률’이라고 해도 허풍은 아니다. 하지만 언젠가 터졌듯이 언제든 다시 터질 개연성이 있다. 그리고 한 번 터지면 부자든 거지든 치명적인 방사선에 무차별적으로 노출될 수밖에 없다.

울리히 벡 교수가 위험사회론으로 환기하려는 것은 종말론이 아니다. 위험사회론은 개인은 물론 인류 전체의 삶이 고도로 복잡한 물리적 관계망 속에 놓여 있는 현실을 통찰한 결과다. 우리집 냉장고 안에 들어 있는 오렌지가 누구의 손에서 어떻게 길러져 수확되고, 지구 반바퀴를 도는 동안 누구로부터 어떻게 취급되었는지 알 수 없는 데 따른 순리이자, 지뢰를 하나 건드리면 지뢰밭 전체가 터지는 것과 같은 이치가 바로 위험사회론이다. 그래서 위험사회에서 필요한 건 ‘성찰적 실천’이라고 울리히 벡 교수는 말한다.

통계학적으로 예측할 수 없고, 아무리 투자해도 예방/관리할 수 없는 위험은 역설적으로 위험으로 인지하기 어려운 위험이다. 그래서 위험사회와 별일 없는 사회는 정작 같은 사회다. 성찰적 실천이란 인지하기 어려운, 그 때문에 더욱 무서운 위험을 예민하게 인지하고, 문제의식을 끝없이 환기하며, 위험을 줄이기 위해 개인뿐 아니라 인류 전체의 삶의 물리적 관계망을 바꿔나가려는 지향적 운동이다. 별일 없이 사는 삶에 의문을 던져야 하는 이유다.

▲ 2008년 5월 2일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 문화제 풍경 ⓒ미디어스
미국산 쇠고기 전면 수입 개방은 위험사회론에 정확히 들어맞는 텍스트다. 골프장에서 홀인원한 뒤 벼락 맞을 확률 자체가 무서운 위험이다. 지난해 광화문 네거리에 밝혀진 촛불은 한국사회에 벼락처럼 찾아온 ‘성찰’이자 ‘실천’이었다. 다만 성찰을 성찰하지 못했고, 그 성찰이 물리적 억압에 눌려 사그라들었을 뿐이다. 그러고는 다시 별일 없다는 듯이 산다. 뜨거운 열정에 사로잡힌 연인들이 그 열정 하나로 사랑하다 현실의 벽을 넘지 못하고 헤어져 별일 없다는 듯이 사는 것처럼. 사실은 별일 있는데, 별일 많아 죽겠는데, 별일 없다고 둘러대거나, 그도 아니면 자각하지 못하는 채로. 그 사이 삶은 스미듯 식민화되어 가고 있다.

<미디어스>가 4월27일 사이트 개편을 단행한다. 2007년 10월10일 창간 이후 첫 개편이다. 궁벽하고 남루한 현실이지만, 꿈마저 남루해서는 안 되겠기에, 별일 없는 건 우리의 굳건한 행보일 뿐이라는 걸 증명하고자, 힘 닿는대로 ‘신장개업’에 최선을 다했다. 개편 기념 특집기획으로 ‘촛불’에 대해 성찰해 보기로 했다. 진부하게 느껴질지 모르겠으나, 퇴행적인 회고담은 아니다. 전체 기획에 촛불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담으려고 고민했다.

기획은 크게 3부로 구성했다. 1부는 지난해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섰거나 그 현장을 취재한 이들의 1년을 개인과 작은 무리, 언론계 등으로 범주를 점증하며 되돌아보기로 했다. 2부에서는 그 촛불들이 한국사회에 던진 빛과 그림자를 몇 개의 단위와 층위에서 가감없이 살필 것이며, 3부에서는 촛불 1주년을 맞는 한국사회가 마주한 과제들을 ‘촛불의 연장’ 위에서 도출해볼 계획이다. 이 글은 장기하의 <달이 차오른다>를 들으며 써내려간 그 프롤로그다. 달이 차오르면 바다는 부풀어 만조가 된다. 시나브로 달은 차오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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