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주간지 기자는 마감에 임박해 터지는 대형 사건에 취약하다. 일껏 다 만들어놓은 표지이야기가 쓸모없게 되기 때문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시점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돈 받은 사실을 시인한 직후다. 닷새 뒤쯤 배포될 글인데, 이럴 땐 무엇보다 글감 잡는 게 가장 힘들다. 노 대통령과 관련해 아직 구체적으로 드러난 사실은 없지만, 그때 가면 이미 상황이 많이 바뀌어 있을 테니 말이다.

시사 현안을 다루는 글쓰기는 이처럼 ‘시의성’이라는 결정적 변수와 씨름한다. 하지만 시의성이 아무리 중요해도, 언론이 새로운 사건을 모두 낯설게 대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사건들을 유형화하고, 정해진 틀에 맞춰 재구성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노 전 대통령이 돈 받은 사실을 시인한 날 방송3사 메인뉴스의 관련 꼭지 구성은 거의 같았다.

이런 구성은 당대 대중의 보편적 인식론과 무관하지 않다. 사람들은 사건을 인식할 때 익숙한 틀과 경로에 기대는 경향이 있다. 고정관념, 지배이데올로기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기도 한다. 대중과 정보·관점을 공유해야 하는 언론으로서는 이를 무시하기 어렵다. 수능일이면 모든 신문이 교문 앞에서 기도하는 어머니 사진을 1면에 싣는 건 ‘학벌이 개인의 일생을 좌우한다’는 한국사회의 압도적 믿음이 반영된 결과다. 이날 ‘탈학교 청소년’ 사진을 1면에 실을 배짱 좋은 신문은 없다.

▲ 4월5일 SBS <8뉴스> 캡처.
그렇다고 언론이 고정관념과 지배이데올로기에 종속돼 있는 건 결코 아니다. 오히려 이를 적극 활용·강화하려고 한다. 지하철과 대형 제조업체 파업 때마다 등장하는 “시민의 발을 볼모로” “수출 차질액 ○○○억원” 따위 클리셰는 고전에 속한다. 언론은 이보다 교묘할 때도 많다. 북한이 로켓을 발사할 당시 골프를 즐겼던 박희태 한나라당 대표가 언론의 공격을 받았다. ‘골프 대중화’를 외쳐온 언론이 정치인을 공격할 때는 정작 골프의 ‘귀족 이미지’를 덧씌운 것이다.

이런 기법은 진실을 은폐·왜곡할 수도 있다. 북한이 로켓을 쏜 날, 일요일이었음에도 방송들은 편성시간을 최고 2시간으로 늘리며 특집뉴스를 내보냈다. 그들의 대경실색에 견줘 그날 대중의 관심사는, 한가하게도 갓 개막한 프로야구였다. 라면 사재기 열풍 따위도 없었다. 대중들은 ‘예고된 충격’ 앞에서 별다른 충격을 받지 않았지만, 북한 로켓 발사에 대한 언론의 차분한 분석보도는 이틀 뒤부터 겨우 나오기 시작했다. 언론이 클리셰를 오래 탐닉하는 사이 대중의 인식은 언론보다 두어 걸음 앞서가고 있다.

참, 그날 박 대표와 함께 라운딩을 했던 이들은 다름아닌 기자들이었다는 사실. 기사보다는 기사 이면이 재밌을 때가 많다.

이 글은 <한국방송대학보> 1536호 ‘미디어 바로보기’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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