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순간, 노무현을 조롱하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지 잘 안다. 조중동마저 배신당했다고 하는 판국이니 더 말해 무엇 하랴. 난 노무현을 조롱할 생각이 없고, 더더군다나 배신당한 것은 정말 추호도 없다. 이른바, ‘상대적 도덕성’이라고 하는, 너무 남루한 자기 합리화에 진절머리가 난 건 애당초 처음부터였다. 그러니까 임기 시작 몇 개월 만에 이라크에 파병부터 하겠다고 덤볐던 그 즈음부터였다. 이후 대연정, 부동산 폭등 그리고 한미FTA까지. 난 노무현이 대통령 자리에 오른 순간부터 마지막까지 그를 반대하지 않을 이유를 찾을 수 없었고 그가 전임의 누군가들과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판단할 이유를 갖지 못했었다.

▲ 노무현 전 대통령 ⓒ여의도통신
설령, 이 모든 것이 정치보복이라 해도 상관없다. 내가 노무현을 반대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누구라도 재임 중 돈을 받았으면 처벌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구태스럽다고 한들, 우리가 그 구태 안에서 살고 있음을 부정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구태와 이별하기 위해선 끝끝내 그 구태의 바닥까지 마주하는 것 외엔 달리 방법도 없다. 수사의 의지, 정치적 개입의 문제는 본질이 아니다. 다음 정권에서 똑같은 일이 반복된다 해도 마찬가지이다. 물론, 이해는 간다. 대통령 쪽에서 부정한 돈을 받았는데도, 동정 혹은 응원 현상이 일어나는 근원적 기원이 무엇 때문인지.

우선, 그 돈이 5공 때처럼 막무가내로 ‘삥’을 뜯은 것은 아니라는 얘기, 일리는 있다. 박연차와 노무현간의 관계는 이미 세상이 다 아는 특수한 관계라는 강변이 무슨 말인지 이해는 할 수 있겠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결론이 달라지진 않는다. 아예 죄가 없는데 덧씌우는 것이라면 또 모를까, 정권이 뒤집어졌더라도 사실이 뒤집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어찌되었건 죄가 있다. 나는 YS와 결론이 같다. 현재까지 드러난 혹은 인정한 혐의로만으로도 그는 ‘형무소’로 가는 게 합당하다.

이로써, ‘우리도 이런 대통령 하나쯤 가질 때가 됐다’던 자족적 안빈낙도의 노간지 위상은 개박살 났다. 그는 그로써 상징됐던 혹은 그에게 과잉 위임됐던 모든 것들을 끝끝내 몰락시킨 완결자로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딱하고, 많은 이에겐 잔혹하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부적응이다. 실체와 이미지가 일치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면에선 차라리 다행스런 일이라고 디뎌야 한다. 노무현에 대한 평가는 이쯤에서 그만하련다. 나머지는 검찰의 몫이다. 이번 건에 관한한, 추호의 의심도 않는다. 검찰이 알아서 잘 할 것이다.

내가 하려는 얘기는 처음부터 노무현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번 사건을 불편해하는 우리 안의 그 어떤 마음에 관한 것이다. 더 정확하게는 노무현이 각별히 부탁의 메시지까지 보낸 어떤 사람들 때문이다. ‘노무현을 위로하기 위해서, 또는 스스로의 실망을 인정하기 싫어’ 노무현을 옹호하는 사람들 말이다. 대통령이 수십억 아니 수백억일지도 모르는 돈을 받았는데도 그 고백이 ‘쿨’하다며 ‘멋지다 노짱!’을 나불거리는 입들 말이다. 조중동에 의하면, 일부 ‘진보개혁세력’이라는, 그러나 시쳇말로는 한줌 ‘노빠’일 뿐인, 노무현이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바로 당신 말이다.

노무현의 부정을 신났다고 진보와 등치시키는 조중동 만큼이나 지금 노무현을 옹호라는 논리는 남우세스런 얘기이다. 그럴수록 노빠만 우스워지는 것은 별 문제가 아닌데 조중동의 논리에 말려 애꿎은 진보까지 입지가 좁아지니 문제이다. 노빠의 논리는 크게 2가지로 구성된다. 한 축엔 조중동의 존재론에 관한 역사의식이 있다. 그리고 다른 한 축으로는 모든 것은 이명박 탓이라는 정치인식이 있다. 한 마디로,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라는 현재의 활개가 가당찮다는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지금 노빠와 조중동은 한 몸이다. 두 얼굴을 지닌 히드라이다. 노무현으로 상징됐던 모든 것들이 철저하게 어긋난 시간이 이미 한참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노무현을 시대의 진전을 가늠하는 아이콘으로 변화와 개혁을 추동했던 엔진으로 여기는 노빠나, 잠깐 미지수였던 시절도 있었으나 이미 오래전에 정체를 밝히고 투항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한때의 노무현을 진보 전체를 대변하는 아이콘으로 팔아먹는 조중동이나 그 논리는 같다. 노빠의 낙후된 의식과 인식 그리고 독특한 패밀리주의가 조중동의 든든한 현실적 배경이 되고 있다. 참을 수 없이 불쾌하겠지만, 노빠야말로 조중동의 숙주(기생 생물에게 영양을 공급하는 생물)이다.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만든 소박한 생활인의 상식과 응당 조중동이 도태되는 것이 역사 발전에 부합된다는 진보적 믿음은 노무현이 어떻게 되더라도 부정될 수 없다. 다만, 현실이 부박할 뿐이고, 역사는 일방향으로 전진하는 것이 아니라 더딜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의 배반이라면 부도덕하고 무능력한 노무현이 져야 옳다. 하지만 조중동이 노무현보다 구악이라고 해서, 언제나 노무현이 옳으리란 믿음은 너무 비논리적이어서, 줄곧 조중동에게 빌미만 제공할 뿐이다. 조중동의 노무현 장사가 언제나 대박인 것은 노빠의 노무현이 실체가 없는 환상이기 때문이다. 존 레논의 음악이 흐르고, ‘고용안정쟁취’의 머리띠를 두른 채, 눈물 한 방울로 대한민국을 바꾸겠다며, ‘반미’면 어떠냐고 묻던 노무현은 단 한 순간도 현실에 없었다.

실제 노무현 쪽이 돈을 받은 것은 전혀 충격적이지 않다. 노무현의 청와대가 남달랐던 점은 하나도 없었다. 참여정부도 고비용의 정치를 했고, 그 아웃풋은 분명 어디선가 인풋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구태 정치였다. 조중동은 그걸 가장 잘 알고 있다. 강희락 리스트가 보여주듯 접대의 갑을에서 조중동은 참여정부 때도 지금도 언제나 갑이다.

하지만 지금 그들은 노무현을 판다. 실체 없는 노무현을 부여잡고 진보의 개념을 현실 정치로 박제, 우상화하는 누군가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들은 실체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낯짝을 바꾸어 노무현을 팬다. 노무현을 매개로 한 이 부적절한 공생이 끝나면 무엇이 남을까? 숙주를 잃어버린 조중동이 아니 한나라당이 생존할 수 있을까? 누구의 리스크가 더 클까? 진정 분노한다면, 노무현에게서 깨어나라. 그리고 당당히 요구하라. 노무현에게 염치가 있다면, 일말의 사회적 책무를 다하라고! ‘자신이 알고 있는 진실과 검찰이 의심하고 있는 프레임이 다르다’고 한 노무현이다. 과거, 조선일보와 같은 하늘을 두고 살 수는 없다고도 했던 그이다. 그는 마땅히 자신을 포함하여 조중동이 그리고 또 다른 누군가들의 더러운 질서를 아낌없이 까발리는 부나방이 되어야 한다. 스스로 자신이야말로 전시대의 막차에 탄 운명이라고 했던 그였다. 혼자 죽는 것이 아니꼽거든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내어놓아야 한다. 그렇게 전시대를 모두 태우고 장렬히 산화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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