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래불사춘, 봄은 봄이되 또한 봄이 아니다. 따뜻해지지 않는 날씨만큼이나 요새 방송가의 풍경이 딱 그러하다. 광고는 곤두박질이고 언론 환경은 갈수록 각박해지고 있으니 말이다. 지난 주 혹은 이번 주부터 방송사들이 봄옷을 갈아입었다. 예년에 비해 특별한 건 많지 않다. 비용 절감이 강조되었지만, 딱히 그게 어떻게 편성에 방영됐는지는 눈에 띄지 않는다. 그보다는 오히려 장수 프로그램들에게 내려진 철퇴가 비감할 뿐이다.

TV의 개편은 트렌드의 계기이고, 물갈이의 방편이고, 포맷의 모험이(어야 한)다. 주기적 시간표에 따라 프로그램의 드나듦을 결정하는 단순한 행위가 아니(어야 한)다. 이번 개편에선 그런 뚜렷한 족적을 확인할 수 없어 아쉬웠다. 확장시킬 의미를 찾기 힘든 이번 개편에서 몇몇 프로그램들에 관해 코멘트를 할까, 혹은 방송사 개편의 전반을 다룰까 고민하다가 결국 ‘인물’을 택했다.

소설가 이외수가 본격적으로 주말 버라이어티에 진입했다. 문학과 예능은 어떤 사이여야 하는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그리고 정선희가 돌아온다. 그녀의 복귀를 둘러싸고 악녀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의 교전이 벌어지고 있다. 탁재훈은 비로소 황폐한 리얼리티의 영토에 섰다. 이번 봄개편을 달구고 있는 3인을 <주말 그리고 말랑한 미디어>가 고민해봤다.

글쎄, 아무튼 이번에도 또 낚였다. 이를테면 이런 식의 모티프가 지속적으로 변주되는 것이다.

오래 전 시사주간지 <한겨레21>에서 밥벌이 할 때 ‘기자가 뛰어든 세상’이라는 고정물이 있었다. 거칠게 비유하면 ‘체험, 삶의 현장’의 기자 버전쯤 되는 것인데, 어린이집 보육교사를 해야 할 차례가 왔다. 영특한 여성 후배가 말했다. “선배가 딸딸이 아빠니까 딱이네.” 알고 보니 그건 ‘기자가 뛰어든 세상’ 가운데서도 3D업종이었다. 내 아이들도 제대로 돌본 적이 없으면서 이틀 동안 입에서 단내 나게 영유아들에게 시달린 나는 마침내 쓰러졌다. ‘딸딸이 아빠, 보육교사 되다’라는 체험기를 남기고.

이번에는 세대론이 근거, 아니 핑계였다. 완군이 말했다. “정선희는 선배가 쓰시면 되겠네요.” 완군 이름의 ‘완’자가 한자로 정확히 어떻게 되는지는 모르지만, 그가 ‘민완’기자라면 적어도 ‘완력’ 할 때의 ‘팔목 완(腕)’보다는 ‘민첩’ 할 때의 ‘재빠를 민(敏)’에 무게가 쏠려 있는 게 틀림없다. 그래도 정선희가 나보다 댓 살 어린데, 같은 세대로 봐주니 고맙다고 해야 할까. 그러나 내가 완군의 낚싯바늘에 걸린 건 세대론의 미끼 때문만은 아니었다.

지상파와 케이블을 통틀어 몇 개 고정 프로그램을 빼놓고는 TV와 담쌓고 사는 내게 방송 봄 개편 기획 한 꼭지를 맡으라는 건, 아무리 모든문제연구소장을 자처하고 산대도 처음부터 무리한 주문이었다. 그러나 나는 기꺼이 떠맡기로 했다. 봄 개편에서 라디오 프로그램에 복귀하는 연예인 정선희가 아니라, 하나의 존재가 감당하기엔 너무 가혹한 운명과 거대한 체제적 문제를 짧은 시간 안에, 그것도 한꺼번에 겪어야 했던 동시대 한 여성의 얘기를 해보고 싶었던 거다.

난 정선희를 잘 모른다. 내 기억에 그녀는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슬랩스틱(요즘 표현으로 ‘몸개그’)을 하던 연기자였다. 그녀가 어떤 캐릭터로 무슨 유행어를 남겼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 건 세월 탓만은 아니다. 나는 그녀보다 한 세대쯤 위인 김미화의 “엄매, 기죽어” 같은 유행어를, 표정 연기와 함께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녀가 ‘사건’의 주인공이 된 뒤에야 버라이어티쇼와 라디오 방송의 특급 진행자였다는 사실을 알게 됐지만, 보고 들은 적이 없으니 실감할 수 없다.

나와 그녀 사이에 시청취자와 연예인의 관계가 단절된 것은 TV 예능프로그램의 성격이 변하면서부터인 것 같다. 나는 한국 예능프로그램의 대세로 자리잡은 버라이어티쇼가 못마땅하다. 떼로 몰려나와 자신의 욕망을 적나라하게 떠벌리는 모습이 몹시 거북살스럽다. 어떤 이는 내가 그들의 대화와 거기서 파생하는 웃음의 기제를 못 좇아가서라고 하는데, 내 언어와 웃음의 감각은 아직 고려장 당할 만큼 퇴화하지 않았다. 나는 오히려 버라이어티쇼에서 주가를 올리는 몇몇 연예인들의 언어와 웃음 감각이 턱없이 짧고 조악하다고 생각한다.

요즘 예능 장르의 특성이 리얼리티라고들 하는데, 그런 평가는 그 연예인들의 말장난보다는 조금 더 웃기는 얘기다. 그네들이 카메라 앞에서 떠드는 건 리얼리티가 아니라 리얼리티로 위장한, 그래서 그마나 누추해져버린 판타지다. 대중매체가 담아내는 적나라함이란 외피를 벗겨낸 내면의 진실이 아니라 심의/검열의 외줄 위에서 벌이는 표현 수위의 아슬한 줄타기일 뿐이다. 예능의 막장이고 리얼리즘의 물신화다. 명품을 소비하며 정체성을 확인하는 신상녀에게 그 명품 안에 숨겨진 생태와 노동의 비밀이 알려질 리 없듯이, 리얼리티쇼에 비친 연예인의 솔직담백한 ‘듯한’ 모습에 정작 고 장자연의 리얼리티는 멸균 처리돼 있다.

(두어 단락쯤 이야기가 옆으로 새고 말았지만, 난 줄곧 이와 관련한 생각을 말해보고 싶었다. 내가 대중문화, 특히 연예 관련 글을 써야 하는 난감함과, 이번 주말기획의 소재와 내 글감 사이의 부정교합을 감당해야 하는 독자제위에게 미리 너스레를 떤 것이기도 하다. 다시 본궤도로 진입해 보자.)

정선희가 지난해, 그리고 여태껏 겪고 있는 고통은 살아 있는(혹은 살아 남은) 자의 고통이다. 남편 안재환이 목숨을 끊고, 그와 관련돼 가장 절친한 언니 최진실이 다시 목숨을 끊었다. 그녀는(만) 살았다. 그녀는 각다귀 떼처럼 달라붙는 선정주의 언론과 죽은 최진실을 매명해 정권안위를 챙기려는 세력의 정치적 프로파간다, 그리고 핏줄 잃은 슬픔을 며느리에게 분노로 투사하는 시댁 때문에 고통을 슬픔으로 승화할 기회조차 갖지 못했다. 카메라를 들이대는 기자들에게 “죽어야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울부짖었다는 건 ‘살아 있음’이 ‘죽지 못했음’과 같은 존재양식이라는 걸 절규한 것이다.

‘하늘은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고통을 준다’는 말은 설령 진실일지라도, 잔인하다. 파란 피가 분출하는 느낌, 심장이 몸밖으로 튀어나와 사람들 발길에 차이는 느낌, 뼛속을 벌레 스물다섯 마리가 스멀스멀 기어다니는 느낌…. 존재하되 입증할 수 없는 이런 낱낱의 고통들은 각자 개별적으로 겪어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런 고통을 겪어본 이들은 파란 피와 축구공 같은 심장과 뼛속의 스물다섯 마리 벌레가 같은 것이라는 걸 안다. 또한 이 경우 삶이란 죽지 못함을 잇대어가는 것, 그리고 그 시간은 견디는 게 아니라 견뎌지는 것, 그리하여 시간이란 상처를 치유하는 게 아니라 고통에 내성을 줄 뿐이라는 명제에 마침내 도달하게 된다는 것도. 하지만 나는 정선희의 고통을, 시들지 않은 채 중력에 겨워 지는 능소화를 통해 겨우 짐작한다.

몇 달 은둔했던 정선희가 돌아온단다. 나는 열녀문을 세우지 못해 안달하는 유생들처럼 그녀에게 3년상을 치르도록 요구하는 여론 따위엔 관심 없다. 역시 진부한 예측은 진부하게 맞아떨어졌지만, 거기에 직업선택의 자유, 여성의 자기결정권 같은 명백하거나 고유한 가치를 들이댈 생각도 없다. 나는 그저 그녀의 고통조차 상품화해 이윤을 챙기는 이들 앞에 그녀 스스로 나설 수밖에 없는 그녀의 정해진 행로가 안타까울 뿐이다. 그러나 연예인은 곧 그녀의 정체성이다. 행복하고 싶거든 다른 직업을 선택해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녀는 행복해지기 위해 복귀해야 하지만, 세상은 그녀의 직업에 고통을 드러내 슬픔으로 승화하고, 그 슬픔이 일과 서로 스며 행복을 빚어낼 만한 겨를을 주지 않을 것 같아 두렵다. 어쩌겠는가. 벌판에 나와 비바람을 맞는 수밖에.

그녀가 TV 버라이어티쇼로 복귀하지 않은 건 그나마 다행이다. 그녀의 얼굴을 보는 시청자들의 불편함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시청자들은 그녀에 대해 아무런 리스크도 지지 않는다. 리스크에 있어서 시청자와 연예인의 관계는 심각한 비대칭이다. 나는 그녀가 리얼리티로 위장한 누추한 판타지로 소비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것은 그녀에게 마치 냉각장치가 고장난 자동차 엔진 같은 것이다. 그녀는 오래 못가 주저앉고 말 것이다.

라디오 프로그램도 진행자의 음정이 일상의 음정보다 반 옥타브쯤 높아야 하는 낮 12시 프로그램이 아니면 좋았겠으나, 이미 정해진 것이니 어쩔 수 없게 됐다. 내가 그녀의 라디오 방송을 들어본 적은 없지만, 예전의 정선희로 돌아가야겠다는 강박도 버렸으면 좋겠다. 가혹한 운명을 오롯이 감당해낸 그녀는 그 운명을 맞기 전의 그녀와 다르고, 달라야 한다. 그래서 예전의 ‘아말감’ 같은 방송문법은 내려놓았으면 한다. 기쁨을 억지로 위장하지 말라는 얘기다.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이 같은 목소리로 방송해도 좋겠다. 그 목소리로 슬픔을 드러내도 좋을 일이다. 라디오는 그러기에 맞춤한 매체라고 나는 본다.

영화 <밀양> 얘기로 글을 끝내야겠다. 신애는 기독교에 귀의한 뒤, 자기 아들을 죽인 웅변학원 원장을 면회 간다. 신의 사랑으로 그를 용서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살인범은 신의 이름으로 벌써 스스로를 구원한 뒤였다. 자기가 용서하지 않았는데도 신이 멋대로 구원해버린 것을 보고 신애는 쓰러진다. 그리고 어느 교회 야외 기도회에 찾아가 신을 찬양하는 목사의 기도에 배경음악을 집어넣는다. 김추자의 <거짓말이야>. 나는 정선희도 자신의 고통을 배가시킨 세상에 억지웃음을 짓는 대신 별안간 자신의 고통을 드러내며 세상의 허위와 탐욕을 조롱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그 정도는 돼야 리얼리즘이다. 그렇다면 나도 정선희의 라디오 방송을 열심히 챙겨 듣겠다. 스스로 머리를 자르는 신애 앞에서 거울을 들어주는 종찬처럼.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