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가 구속되고 피디가 체포되는 작금의 사태를 두고 이들 직업의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하는 건 무척 한가해보이거니와 억지스럽기까지 하다. 기자와 피디의 위상이 예전만 같지 못하대도, 그 때문에 이들이 체포·구속된 것이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반대로, 이번 사태가 전 사회적 반발을 부르는 것이 이들 직업의 높은 위상과 관련된 것으로 보는 것도 현실과는 거리가 멀다. 그런데도 인터넷에서는 (주로 댓글을 통해) 그런 공방이 오가고 있다. 기자·피디의 위상을 폄하하든 추켜세우든, 그들이 보통 직업인과는 달리 취급되고 있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 3월 26일 KBS '뉴스9'ⓒKBS
액면으로만 보면 “어떻게 기자·피디를 잡아갈 수 있느냐”와 “기자·피디는 신분증에 금테라도 둘렀냐”는 서로 정반대의 물음 같지만, 물음의 구조로 보면 사실 하나다. 둘다 기자·피디의 위상과 작금의 사태를 인과관계로 놓고 이해하려는 인식태도에서 나온 것이다. 물론 그들의 직업적 위상과 구속/체포 사이에는 아무 인과관계도 없다. 그렇지 않다면 요즘 검찰에 줄소환되고 있는, 평소에도 ‘교도소 담장 위를 걷는다’는 국회의원들의 위상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금배지는 길가에 구르는 개똥보다 못한가 말이다.

언론인이 기사 하나 때문에 남산 안기부 분실이나 남영동 치안본부 분실에 불려가 딱 죽지 않을 만큼만 얻어터지던 게 불과 20, 30년 전 일이다. 하지만 그 남루한 시절에도 언론인은 웬만한 형사상 잘못을 저질러봤자 피해자만 잘 구슬리면 모든 게 깔끔하게 처리되는 특권을 누렸다. 이런 건 ‘위상’이라고 부르기엔 낯부끄럽고 그저 시정의 언어로 ‘끝발’이라고 불러야 맞춤한데, 그 끝발 좋던 시절 언론인들이 무시로 필화사건을 겪어야 했던 것이다. 이것을 아이러니라고 봐도 괜찮은 걸까.

그렇지 않다. 언론인은 자신이 보도해야 할 것과 보도하지 말아야 할 것을 정확히 이해하고 그 경계를 침범하지 않는 한에서 끝발도 보장받았다. 말하지 않는 대가로 얻은 그 끝발로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위세도 부리고, 개발정보를 미리 빼내 재산도 모았다. 물론 모든 언론인이 그랬다는 건 아니다. 그런 구조 속에서 ‘끝발 좋은 언론인’과 ‘할 말은 하는 언론인’의 교집합은 극도로 협애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 둘은 사실상 다른 직업군(群)이었다.

그렇다고 끝발 좋은 언론인이 권력 앞에서 마냥 침묵만 한 것도 아니다. ‘숙맥 언론인’은 끝발도 없고 할 말도 못했지만, 끝발 좋은 언론인은 적당히 권력비판적인 발언을 했다. 다만 끝장을 볼 요량 따위는 없었다. 그건 권력과의 분업체계에서 벌이는 역할극 같은 것이었다. 권력은 한도를 넘어서지 않는 비판을 허용함으로써 그 비판을 권력의 투명성을 드러내는 용도로 전시했다. 그 배역에는 권력의 관리체제 안에서 끝발을 누리는 언론인들만 캐스팅됐다. 끝발 좋은 언론인은 할 말도 곧잘 하는 언론인으로 위장됐다.

역설적이지만, 언론인의 끝발이 예전같지 않다는 건 언론인의 위상이 정상화되고 있는 데 따른 현상의 일부로 볼 수 있다. 할 말을 하려면 때론 희생도 감수해야 한다. 언론의 자유와 독립은 처음부터 하늘이 부여해준 것이 아니라, 피의 대가로 쟁취한 것이다. 한 번 손에 넣었다고 해서 항구적일 수도 없다. 그걸 망각하는 순간 언론인 스스로가 언론 자유와 독립의 지반을 흔드는 진앙지가 되고 만다. 이런 인식을 한자락 깔아야 작금의 언론 상황을 정교하게 들여다 볼 수 있다.

▲ 3월 25일자 경향신문 2면.
언론인의 위상 저하는 권력과의 관계보다 먼저 수용자와의 관계에서 비롯됐다. 다만 언론인 스스로 그 의미를 실감하지 못했을 뿐이다. 더는 정보와 논평을 직업적으로 독점할 수 없는 매체환경의 변화 과정에서 언론인은 수용자에 의해 비판적으로 ‘상대화’됐다. 또 언론인이 유통하는 정보/논평은 수용자들의 정보/논평과 경합하게 됐다. 언론인들이 (보도지침 같은) 지시에 의해, 또는 (자체 엠바고 따위) 패거리 논리로 정보 유통을 통제할 수 있는 시대는 끝났다. 아무리 열심히 보도하려 해야 비언론인의 실존적 관심과 마니아적 전문성을 따라잡기도 어렵게 됐다.

언론인이 수용자의 비판 대상이 되기 시작한 시점은 언론인의 끝발이 최고조에 이른 시점과 맞물려 있다. 이른바 민주화 과정을 거치며 언론인은 할 말을 다해도 권력의 물리적 폭력을 더는 두려워하지 않아도 됐고, 끝발도 고공행진을 계속했다. 언론인의 위상은 무소불위에 가까웠다. 언론의 자유는 언론인만의 배타적 자유가 됐고, 언론인만의 자유는 다른 모든 자유에 선행하는 자유로서 다른 자유들을 압도했고, 규정했다. 언론 수용자 운동이 해당 언론사에 의해 언론자유를 억압하는 ‘좌빨’로 채색됐고, 언론사 세무조사는 정권의 언론탄압으로 둔갑했다.

▲ YTN 사옥 안에 붙어있는 ‘노종면을 석방하라’ 펼침막. ⓒYTN 노조
언론인 사회 내부에서도 끝발을 좇는 언론인과 할 말은 하는 언론인의 식별이 어려워졌다. 한 번도 할 말을 온전히 다해본 적이 없던 언론이 언제부턴가 ‘비판언론’을 자처하면서 비판언론의 개념을 오염시켰다. 그들은 하지 말아야 할 말을 사익을 위해 서슴없이 하면서 ‘할 말은 하는 신문’이라고 광고했다. 타인의 언론의 자유를 이데올로기적으로 낙인찍고 권력에게 물리적 억압을 선동함으로써 정작 언론의 자유 자체를 부정했다. 그러면서도, 그럴 수 있는 자신만의 자유는 신성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언론의 자유는 타락했다.

언론인의 끝발이 최고조에 이른 순간이 곧 수용자가 진화를 시작한 순간이었다는 사실은 자연계의 자율조절 능력을 떠오르게 한다. 그러나 거시적으로 볼 때 자율조절도 미시적으로 보면 도전과 응전이다. 권력의 칼날이 먼저 춤을 추고, 언론인 가운데 희생자가 나왔다. 종교적으로 보면 박해는 순교자를 낳고, 거짓 선지자들을 아우팅한다. 박해사건은 박해자의 뜻과 반대로 종교의 확장으로 이어진다. 이번 언론인 구속/체포 사태로 언론의 자유와 독립이 얼마나 소중하면서도 취약한지, 어떻게 쟁취되는지를 복기할 수 있게 됐다. 또 끝발을 좇는 언론인과 할 말은 하는 언론인을 식별해 분리할 수 있게 됐다.

언론인 구속/체포 사태는 다의적 이해가 필요하다. 권력의 언론탄압을 명확히 인식하고 응전하는 것이 우선이겠지만, 언론인의 위상을 돌아보고 언론활동을 성찰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몇 사람의 구속/체포가 언론인들의 과거와 현재 행태를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기자가 구속되고 피디가 체포되는 순간에도 이들 소속사의 뉴스는 월드베이스볼클래식과 세계피겨스케이팅 소식으로 도배됐다. 용산참사와 한반도 대운하 보도는 실종됐다. 할 말을 다하지 않는 언론인들에게 수용자들이 언제까지나 손을 내밀고 연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대신 그들 스스로 정보와 논평을 생산/유통할 것이다. 그들은 빠르게 진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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