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카파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로버트 카파, 2006)

▲ 로버트 카파(Robert Capa, 1913~1954)
로버트 카파(Robert Capa, 1913~1954)라는 이름 앞에는 언제나 ‘전설적인’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그도 그럴 것이 카파의 삶은 그것 자체로 그 어떤 드라마보다 더 극적인 신화였다. 41년이라는 짧은 생을 살다 갔음에도, 책 앞날개를 빼곡하게 채운 카파의 연보(年譜)에는 죽는 날까지 전 세계 곳곳의 수많은 전장을 쉼없이 누비며 자신의 시대를 카메라에 담은 한 위대한 저널리스트의 숨가쁜 인생역정이 오롯이 담겨 있다. 1936년 스물셋의 젊은 나이에 스페인 내전에 뛰어든 이후 중일전쟁, 북아프리카 공략, 시칠리아 전투, 나폴리 해방, 이탈리아 반도 전투, 노르망디 상륙작전, 베를린 함락에 이르는 2차 세계대전은 물론 이후 중동전쟁과 인도차이나전쟁에 이르기까지 카파가 평생에 걸쳐 누빈 전장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몇 년 전 운 좋게도 카파가 찍은 사진들을 아주 가까이에서 두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마흔한 살이라는 짧은 생애 동안 카파가 뷰 파인더를 통해 본 것은 오로지 전쟁이었다. 전시장을 가득 메운 흑백사진 속 인물들의 표정과 자세, 동작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워서, 간혹 지나치게 매끈한 느낌을 주는 사진들은 마치 잘 연출된 영화나 다큐멘터리의 정지된 한 장면을 보는 듯 묘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카파의 사진은 ‘피사체와의 거리감을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카파 자신의 대답이었다. 두고두고 인구에 회자되는 카파의 저 유명한 경구(警句)에 그 요체가 있다. “만약 당신의 사진이 만족스럽지 않다면 그것은 너무 멀리서 찍었기 때문이다.” 취재 대상과 얼마만큼 거리를 둘 것인가 하는 문제는 대부분의 저널리스트들이 평생에 걸쳐 고민하는 어렵고도 무거운 숙제다. 피사체와의 거리감. 카파의 사진을 보면서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화두(話頭)는 2년을 훌쩍 넘겨 다시 책을 읽어 내려가는 동안 한층 더 또렷해졌다.

▲ 그때 카파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로버트 카파, 2006)
로버트 카파는 타고난 저널리스트였다. 적국인(敵國人)이라는 한계를 뛰어넘어 종군기자가 된 카파가 2차 세계 대전 종군의 첫 무대였던 영국의 한 공군기지에서 겪은 일화에 그 편린(片鱗)이 잘 드러나 있다. 독일군과 격전을 치르고 귀환한 비행기에서 부상을 입은 승무원과 숨진 병사들의 시신이 실려 나간 뒤, 비교적 멀쩡한 모습의 조종사가 마지막으로 비행기에서 내리는 순간을 근거리에서 포착하기 위해 카파는 조종사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자 조종사가 버럭 화를 내며 카파에게 소리쳤다. “이봐, 사진사! 이게 당신이 기다리던 장면들인가?” 이 대목에서 카파는 자신과 사진기자라는 직업에 회의를 느꼈다면서 “장의사나 해야 할 일을 내가 한 것 같아 역겨운 생각마저 들었다.”고 토로하고 있다. 하지만, 보도사진가로 산다는 것과 다정한 마음을 잃지 않고 간직한다는 것이 서로 양립할 수 있는가 라는 스스로에 물음에 카파는 이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병사들이 다치고 죽어가는 장면은 빠뜨린 채 그저 한가하게 비행장 주변에 앉아 있는 모습만 찍은 사진은 사람들에게 진실과는 동떨어진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전쟁의 실상을 제대로 보여주려면, 전사자와 부상자까지도 여과 없이 찍은 사진을 보여줘야 한다.”

포토저널리즘의 역사에서 로버트 카파라는 이름을 가장 위대한 전쟁사진가로 자리매김하게 한 미군의 오마하 해변 상륙 작전 사진은 수많은 종군(從軍)의 역정을 통해 자기희생과 모험정신으로 요약되는 카파이즘(Capaism)의 정수(精髓)를 보여준다.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 섬뜩할 정도로 생생하게 재현된 노르망디 해안에서의 격렬하고도 참혹했던 첫 상륙 작전의 제1진에 배속된 유일한 종군기자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때 카파의 나이 서른하나. 빗발치는 독일군의 총격 속에서 완성된 카파의 사진은 카메라로 포착할 수 있는 전쟁의 가장 극적인 장면을 담아낸 위대한 특종이자, 가장 먼저 현장을 목격하고 기록한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우월적 특권의 산물이었다. 당시의 사진들은 원서의 제목처럼 ‘초점이 살짝 빗나간’(slightly out of focus) 이미지로 인해 더 극적인 신화가 되었다. 마지막까지 미련을 버리지 못했던 연인 핑키와의 불화에 두고두고 가슴 아파하면서도, 끝내는 격전의 현장을 선택하고 마는 카파의 때론 무모해 보이기까지 한 그 도저한 열정에는 실로 감탄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원폭 투하 직후 히로시마에 가장 먼저 들어가 피폭의 참상을 생생하게 전한 윌프레드 버체트와 마찬가지로 카파 역시 가장 먼저 ‘현장’을 선택했고 마지막까지 ‘진실’을 전하고자 했던 것이다.

▲ 오마하 해변 상륙 작전 사진
군복을 입고 카메라 렌즈를 향해 환한 미소를 지어보이는 사진 속 주인공이 금방이라도 툭 내뱉을 것 같은 한 마디. “삶과 죽음의 확률이 반반이라면 나는 낙하산을 타고 뛰어내리는 길을 택하겠어.” 누군가로부터 흥미진진한 모험담을 듣는 것처럼 그야말로 한 달음에 읽히는 이 책은 정확하게 1942년 여름에서 시작해 1945년 유럽 종전으로 끝나는 카파의 2차 세계대전 종군 기록을 담고 있다. 카파는 책의 앞부분을 적국인(敵國人)이란 태생적 한계를 무릅쓰고 종군기자가 되기까지 자신이 겪어야 했던 우여곡절을 소상히 밝히고 있는데, 그 눈물겨운 노력에는 감히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을 정도다. 책에 수록된 풍부한 사진들은 미국의 유명 작가로 카파와 동시대를 살았던 존 스타인벡의 말대로 카파의 사진이 그의 정신에서 만들어진다는 것을 입증하는 살아 있는 증거다. 저널리스트로서의 자존심과 치열하기 이를 데 없는 기자정신으로 충만하면서도 문득문득 한없이 인간적인 면모까지 솔직하게 드러내는 카파의 생생한 육성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모든 것의 중심에는 ‘사람’이 있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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