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드러난 ‘박연차 리스트’에서 ‘추부길’이라는 이름 석 자가 감당하는 상징성은 넓고도 깊다. 그의 이름은 청와대와 한나라당, 그리고 검찰에게 ‘성역없는 수사’의 상징이다. ‘정권에 의한 표적 청부수사’라는 민주당의 B급 태풍 수준의 반발은 그 이름 앞에서 순식간에 열대성 저기압으로 수굿해지고 만다. 언론들도 참으로 오랜만에 비슷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죽은 권력뿐 아니라 산 권력에 대해서도 거침없는 사정의 칼날을 들이대야 한단다. 검찰의 칼날이 여야 모두를 겨냥하고 있으니 달리 시비 삼을 수 없었겠다. 그러니 겨우 강도와 뉘앙스에 차이를 둘 뿐이다. 여기서 ‘추부길’은 언론의 정파성이 넘어설 수 없는 ‘한계’를 상징한다.

‘추부길’은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의 ‘포트폴리오 로비’의 상징으로도 회자된다. 하지만 로비는 본디 적대적 관계에 있는 양쪽 모두에게 하는 법이다. 삼성 엑스파일 녹취록만 봐도 잘 나와 있다. 회장님은 봉투 두께만 달리할 뿐 골고루 떡값을 돌리신다. 돼지저금통까지 모아 대선을 치른 노무현 후보도 이회창 후보 차떼기의 10분의 1이 넘는 불법선거자금을, 같은 재벌들로부터 받았다. 박연차 회장이 ‘노(盧)의 남자’이었대도 달라지는 건 없다. 기업가에게 중요한 건 최신 권력이다. 당장 세무조사 받게 생겼는데, 기업가가 무슨 열녀비 세울 일 있겠는가. 그리하여 ‘추부길’은 기업가의 생리를 보여주는 상징이 된다.

▲ 경향신문 3월24일치 1면 사진
두말할 나위 없이 그는 현재 피의자 신분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그의 혐의는 세무조사를 무마해달라는 청탁과 함께 박연차 회장으로부터 2억원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난 언론들이 부르는 그의 직함이 못내 불만이다. ‘전 청와대 홍보기획 비서관’. 이 직함은 금품 수수 (혐의가 있는) 당시 상황에서 그의 위상을 정확히 지시하고 있기는 하다. 박 회장이 돈을 건넸다면, 현직은 아니지만 ‘현직 대통령의 사람’으로서 추부길을 보고 건넸을 것이다. 나는 그래도 ‘아우어미디어그룹 대표이사’라는 현 직함을 최소한 병기라도 하는 게 옳다고 본다. 그의 현 직함은 그를 연대기적 통사로 이해하는 데 최적이기 때문이다. 그는 지금 언론인이다.

그의 이력은 23일치 <한겨레> 기사 ‘추부길은 누구’에 잘 나와 있었다. 1992년 김대중 대선 후보의 홍보팀장과 선거전략 자문을 맡았고, 96년 총선 땐 서울 종로에 출마한 신한국당 이명박 후보와 인연을 맺었으며, 이상득 한나라당 의원의 선거를 거들기도 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친형인 건평씨와도 친분이 있다. 2007년 초부터는 이명박 후보 핵심공약이었던 한반도 대운하 정책홍보를 맡으면서 ‘대운하 전도사’가 되었다. 정권 교체 뒤 청와대 홍보기획비서관을 지내다 지난해 6월 촛불정국 때 집회 참가자들을 ‘사탄의 무리’라고 비난해 파문을 일으킨 뒤 자진사퇴했다. 그리고 지난 2월 친여 성향 인터넷 매체 <아우어뉴스>를 창간했다.

보다시피 그는 정치권 언저리에서 여야를 넘나든 인물이다. 한 번 바꾼 것이 아니고, 최근까지도 양다리를 걸치고 있었다. 개신교 목사라는데, 홍보와 선거 전략에 꽤나 조예가 깊은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의 거침없는 반전과 퓨전의 이력이 가장 화려하게 꽃을 피운 건 정치권 언저리나 청와대 안이 아니었다. 그는 ‘마침내’ 언론인이 되었다. 철새 정치인이야 정치권 안에서 군락을 이룬 지 오래고, 목사 안수 받은 이들의 직업분포도 얼마든지 다양하다. 그럼 정치권에 있다가 언론사 최고경영자가 되는 경우는 어떤가? 이건 희소가치가 높은 편이다. 구본홍, 차용규…, 아직 제대로 뿌리도 못 내린 이름들이 겨우 떠오를 뿐이다.

일반기업을 하던 사람이 언론사를 경영하는 경우는 많다. 지역신문사들이 대부분 그렇다. 그러나 과문해서인지 몰라도 정치권에 있다 얼마 뒤 언론사 최고경영자가 되는 경우는 거의 보지 못했다. 구본홍 YTN 사장과 차용규 OBS 사장은 방송인으로 유턴한 경우다. 돌아오지 말아야 할 곳으로 돌아왔다는 비판은 높지만, 어쨌든 연고지는 언론계다. 선출직으로는 임창렬 전 경기도지사가 퇴임 뒤 <뉴시스>를 거쳐 현재 <경기일보> 회장으로 있지만, 그는 정치권보다는 관료 출신이라고 보는 게 맞다. 김학준 <동아일보> 회장도 청와대 경력이 있지만 동아일보로 가기 전 오랫동안 학계 등을 두루 거쳤다.

추부길 대표는 어떤 경우와도 정확히 일치하지 않는다. 정치권 출신은 작은 인터넷 매체 하나도 못 만드느냐고 할지 모르겠다. 문제는 그가 처음부터 강하게 언론계 지향성을 드러냈다는 데 있다. 그는 청와대를 나온 직후부터 OBS 최고경영자로 갈 거라는 하마평이 무성했다. 그게 무산되자 스스로 매체를 창간했다. 인터넷 매체로선 전례없는 일이 잇따라 벌어졌다. 창간행사에는 이명박 대통령이 화환을 보냈고, 김형오 국회의장, 오세훈 서울시장은 영상 메시지를 보냈으며, 한나라당 정두언 전여옥 정병국 진성호 등 국회의원 20여명과, 김덕룡 대통령 국민통합특별보좌관, 현인택 통일부 장관, 이만의 환경부 장관, 공정택 서울시교육감 등이 참석했다. 또 창간 직후부터 정부 광고가 몰리고 있다.

이런 전례없는 일들이 가능했던 건 그가 ‘이명박 대통령의 사람’ 추부길이기 때문이었다. 현 정권에게 언론은 정치권력으로 원격 지배할 수도 있고, 낙하산을 투하해 장악할 수도 있고, 시장에 먹잇감으로 던져줄 수도 있으며, 필요하면 뚝딱 하나 만들어 물심양면으로 힘을 몰아줄 수도 있는 참 쉬운 대상이다. 생각대로 하면 된다. 추부길 대표는 한 라디오방송에서 ‘정부 광고가 몰리고 있다’는 지적에 대해 “우리가 본격적으로 광고 수주를 하지 않았지만…”이라고 했다. 그렇게 대충해서 광고 딸 수 있는 언론사, 대한민국엔 아우어뉴스 말고는 없다. 추부길 대표는 현 정권의 언론관이 현실의 존재로 ‘연장’된 대표적인 사례인 셈이다.

▲ 추부길 대표의 아우어뉴스 ‘CEO 인사말’ 페이지 ⓒ아우어뉴스 캡처
추부길 대표는 아우어뉴스 인사말에서 “오직 양심이 지시하는 명령에 따라 움직일 것”이라고 했다. 또 “법률과 상식을 지키는 것이 가장 확실한 행복의 지름길임을 보여주겠다”고도 했다. 그런 사람이 뇌물 2억을 받아먹은 혐의를 받고 있다. 구속되기 전 “많이 뉘우치고 반성하고 회개하고 있다”고 말했다니, 혐의를 인정한 셈이다. 회개한다니 ‘양심이 지시하는 명령에 따른 뇌물 수수’나 ‘법률과 상식에 따른 가장 확실한 행복의 지름길로써 뇌물 수수’라고까지 주장할 뜻은 없나 보다. 아니면 종교 지도자의 양심상 차마 그 정도의 언어도단은 자신이 없었든지.

추부길 대표는 현 정권의 언론관이 구현된 존재다. 겉과 속이 다른 추부길 대표의 이중성은 현 정권의 언론통치에 관한 언어도단적 이중성(‘방송3사의 여론독과점을 막기 위한 택시·버스기사와 식당 아줌마 일자리 창출’ 따위)을 상징한다. 지금 그 상징이 파탄난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추부길’ 이름 석 자가 지금 감당하고 있는 진짜 상징이다.

추부길 대표가 회개했다. 그만하면 현 정권에도 좋은 상징적 본보기다.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