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통심의위가 출범 1년을 앞두고 있는 시점이지만 어느덧 ‘폐지’라는 말마저 식상해져 버렸다.

방통심의위는 조중동광고불매운동 관련 인터넷 게시물 58건에 대한 ‘삭제’ 결정에 이어 MBC PD수첩과 YTN의 블랙투쟁에 대한 ‘시청자 사과’ 결정을 내리면서 스스로를 희화화는 지경에 이르렀다.

방통심의위는 그 뒤로도 MBC 언론관계법 시사 프로그램에 대한 심의, MBC <뉴스데스크> 클로징 코멘트 심의, 그리고 KBS <꽃보다남자>와 SBS <아내의유혹>에 대한 ‘경고’라는 중징계를 때리며 무리수를 거듭했다.

‘정치적 심의’라는 비판이 쏟아지는 것은 방통심의위의 자승자박이었고, 방통심의위의 ‘심의’가 위헌이라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이제 방통심의위는 ‘공정성가이드라인’을 만들겠다고 하지만 과연 그것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에 대한 또다른 논란을 낳고 있다.

이에 <미디어스>는 방송통신심의위 폐지 문제를 제기한다. 방통심의위의 제도적 측면과 운영에 대한 문제점을 비롯해 방송·통신·비영리콘텐츠에 대한 ‘심의’가 어떻게 진행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대안까지 제시해보고자 한다. <편집자>

방통심의위의 이녁들에게.

이녁들의 존재양식은 절묘함 자체다. 민간인도 아니면서 공무원도 아닌 것이, 처자식 먹여살리려는 이기적 동기로 일하는 노동자보다 오히려 국가발전에 보탬이 안 되고, 군대 대신 사회에서 시간을 죽이는 무기력하고 무료한 공익근무요원보다 훨씬 덜 공익적이기까지 하다. 이건 그야말로 박쥐의 존재양식이라 부를 만한데, 박쥐라면 이녁들은 단연 황금박쥐다. 이녁들은 나같은 우수마발은 꿈도 꿀 수 없는 막강권력을 가졌다. 하지만 사고능력은 단세포, 미토콘드리아다. 가장 무서운 권력은 ‘무식하면서 용감한’ 권력이다. 이녁들은 충분히 위험한 존재들이다.

초등학교 학급회의 수준보다 저열한 주장을 펼치는 걸 참다못해 야당 추천 3명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자 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이 임명한 위원 6명이 쪽수로 밀어붙이는 모습을 볼 때만 해도, 난 문제의 중핵을 쪽수 구성에서 찾았다. 박명진 위원장이 “왜 검은 옷을 입었는지 알 수 있느냐고 의문을 제기하시는데 사실 다 아는 얘기 아니냐”며 이심전심으로 강요할 때나, 박천일 위원이 “쾌청한 날씨를 예고하면서 어떻게 검은 옷을 입을 수가 있느냐”며 동대문시장 반짝이 패션 감각을 들이댈 때도 우열반 편성이 안 된 탓에 학급평균이 낮은 것일 뿐이라고 봤다.

그러면서 나는 이녁들이 시청자인 내게 퍼붓는 ‘모욕’을 짐짓 ‘민망함’으로 정리하고자 했다. 결단코 MBC PD수첩과 YTN으로부터 사과 따위 받고 싶지 않은 내게 이녁들이 애면글면 사과받으시라고 강권할 때도 문화적 상대성에서 오는 거북한 ‘과잉 친절’이라고 애써 치부하려고 했다. 인도네시아 오지 원주민이 외지에서 온 손님에게 굼벵이를 건네주며 “한 번 잡숴 봐” 하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이건 문화적 상대주의도 뭣도 아니라는 걸, 시청자에 대한 명백한 폭력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랬다. 어린애한테 뺨 맞으면 아프거나 무섭기보다는 쪽팔려서 아무 말 못하듯이.

▲ 한국판 드라마 '꽃보다 남자' 홈페이지 캡처ⓒKBS

하지만 아큐의 정신승리법은 해법이 아니어서 종래엔 죽어야만 풀린다는 걸, 요즘 들어 갈수록 더해가는 이녁들의 돌격대스런 행동을 보면서 무섭게 깨단하고 있다. 이녁들의 오지랖이 넓다는 거야 익히 알았고, 그래서 광고주 불매운동과 관련한 아고라의 글을 무더기로 삭제하도록 하고, 앵커는 위에서 써준 원고나 읽어야 한다며 몇백대 일 경쟁률을 뚫고 방송사에 들어간 사람을 무뇌아 취급하고, 정부 비판과 지지를 5 대 5 가르마로 타서 보도하라며 미니스커트 길이를 재는 순사 노릇을 하는 것도 띄엄띄엄 보면 그저 오지랖 넓은 것일 뿐이지만, 맥락지어 총체적으로 보면 너무나 뚜렷한 말기적 병증이란 사실을 더는 외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녁들의 병증은 특정한 외부 자극에만, 그것도 일관된 방식으로 무조건반사를 일으키는 병증이다. 빛을 쬐면 그쪽으로만 몰리는 어떤 감광성 단세포 생물의 행태처럼 말이다. 이녁들에게 ‘빛’은 지배권력에 대한 비판행위다. 일방적인 정부 찬양과 비호에는 아무런 반응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뚜렷한 증거다. 보신각 제야의 종 타종식에서 시민들의 구호소리를 삭제하고 음향효과를 넣든, 뉴스 어깨걸이 그림에서 ‘어청수 경찰청장 사퇴’ 손팻말을 모자이크로 뭉개든, 이녁들은 그 강력한 편파와 조작의 자극을 받고도 “기분 탓이겠죠” “왜 이래, 아마추어처럼” “다음부터 잘 하면 되지” 하며 씩 하고 웃어넘긴다.

하지만 외부자극을 느끼지 못하면 위험한 상황에 빠질 수 있다. 그래서 생물에겐 통각 같은 불편한 감각도 있는 것이다. 이녁들의 그런 병증이 어디까지 갔을 때 의학적 사망선고를 내려야 할지, 인공호흡기로라도 생명연장의 꿈을 이어가게 하는 게 나을지를 두고 고심하던 차에, 드디어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시기가 왔다. 이건 우열반 편성이 안 된 문제가 아니라 처음부터 열등반이었거나, 아니면 악화(열등생)가 양화(우등생)를 구축한 상황이라고 해야 할까. <꽃보다 남자>와 <아내의 유혹> 두 드라마를 놓고 이렇다 할 논의도 없이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10분만에 뚝딱 ‘경고’ 결정을 내렸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다.

▲ 방송통신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캡처ⓒwww.kocsc.or.kr

무정파적 대상 앞에서 6 대 3의 정파적 분할이 하나로 통합되는 놀라운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이녁들은 주인공 금잔디의 친구들이 금잔디를 넘어뜨려 소화기 분말을 뿌리고 계란·공 등을 던진 부분을 ‘지나친 폭력 묘사’라고 했고, 재벌 2세인 구준표와 외박을 하고 돌아온 여고생 딸 금잔디에게 부모가 칭찬하며 기뻐하는 장면과 구준표가 금잔디의 집에서 하룻밤 자고 갈 때 금잔디의 부모가 둘만의 잠자리를 꾸며준 부분에 대해 ‘비윤리적 상황묘사’라고 했다. 그럼 만날 찌르고 총질하는 드라마들로 편성을 채우는 방송사들은 아예 문을 닫아야 하는 것 아닌가? 춘향전에서 월매가 벌이는 비윤리적 상황을 이젠 방송에서 어떻게 묘사해야 하지?

“딸을 키워보지 않았으면 말을 하지 말라”는 말 따위는 내게 하지 마라. 이녁들만 딸 키워본 게 아니니까. 한국 지배계급의 보편적 모럴이자 압도적 풍속인 정략결혼을 부추기는 부모는 비윤리적일지 몰라도, 두 연인이 10대인 게 비윤리적일 수는 없다. 플라토닉 러브도 있지 않냐고? 플리토닉 러브가 윤리와 비윤리를 가르는 경계인가? 성인 남성에겐 성매수도 자유권이고, 힘없는 신인 여배우를 성적으로 착취하는 건 로맨스이면서? 이녁들의 나이주의는 10대들을 자기결정권이 없는 존재로 비인격화, 타자화하는 것이고, 이는 방송인들, 네티즌들, 그리고 시청자들에 대한 이녁들의 일관된 시선이기도 하다. 이녁들 앞에 나를 포함한 이들 모두는 10대 금잔디와 구준표일 뿐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엔 자신이 갖고 노는 장난감이 얼마나 위험천만한 것인지도 모르는 채, 민간 신분으로 위장하고 막강한 비행정적 행정권력과 몰사법적 사법권력에다 반문화적 문화권력까지 휘두르는 이녁들이야 말로 위험한 코흘리개 10대들이다. 보기에 참으로 아슬아슬하다. 그래서 나도 정면으로 대면하지 못하고 실눈 뜨고 곁눈질했던 건가 보다. 하지만 이젠 아니다. 내 딸들의 인격을 위해서라도 용감한 아빠가 되어야겠다. 이녁들에게 요구한다. 손에 쥔 위험한 물건 내려놓으시라. 이녁들에겐 너무 벅찬 물건이다. 그리고, 이제 초딩 일진회를 해체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조용히 사라져 주시라. 막장 드라마는 우리 손에 넘겨라. 안 그러면 정말 뭔 일 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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