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의 관점이 항상 일관하다고 생각하면 큰 착각이다. 하나의 언론이 특정한 사안은 물론 보편적 가치에 대해서도 관점을 뒤집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물론 관점의 변경 자체가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관점이 잘못됐으면 바로잡는 게 마땅하다. 그러나 심각한 건, 언론이 무지하거나 아니면 뻔뻔한 탓에 관점이 오락가락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지난해 10월11일치 <조선일보> 스포츠 면에는 프로야구 준플레이오프 삼성-롯데 2차전에서 일부 롯데팬들이 삼성 투수 눈을 향해 레이저 포인터를 쏘며 투구를 방해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그러나 관중들을 나무라는 것이 아니었다. ‘대다수 롯데 팬들은 레이저 발사 용의자를 향해 “집에 가”를 외치며 성숙한 관전 문화를 보였다.’

이보다 몇 달 앞서, 조선일보는 6월9일치 1면에 ‘쇠파이프 등장’이라는 제목의 머릿기사를 실었다. 전날 광화문 촛불집회 소식이었다. 기사만 보면 성숙한 시위 문화 따위는 눈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실제 현장은 어땠을까. 같은 날 <경향신문> 1면 머릿기사는 ‘“비폭력! 비폭력”…시민·네티즌 ‘평화시위’ 목소리 커져’였다. 관점의 차이가 ‘상반된 사실’로 나타났다.

▲ 2월 24일자 조선일보 10면 기사.

학업성취도 평가(일명 일제고사)가 전국적인 ‘부정행위’로 드러났다. 학생의 부정행위를 막아야 할 학교와 교육청이 오히려 부정행위의 장본인이 된 건 이 시험이 당사자들에게 얼마나 심각한 실존의 문제였는지를 역설한다. 그런데도 대통령과 장관은 ‘시험 관리가 허술했을 뿐’이라고 하고, 일부 언론들도 엄호사격을 하고 있다. 시험은 며칠 뒤 또 치러진다.

관점의 문제라고 치자. 전국의 모든 지역과 학교, 학생을 한줄 세워 서열을 매기는 것이 곧 학업성취도를 높이는 것이자 공교육을 살리는 길이라고 믿는다면 말이다. 이런 교육철학은 평준화 해체, 고교등급제 등과 만나 ‘학교 차별’의 논리를 완성한다. 그리고, 학교간 실력차가 반영되지 않는 내신의 가치는 평가절하해야 관점이 일관한다.

조선일보는 이에 관한한 일관된 관점을 유지해온 독보적 신문이다. 그런데 지난 2월24일치 조선일보에는 돌출적인 기사가 실렸다. ‘서울대 지역균형선발 학생들 ‘정시모집’보다 공부 잘했다’.(1면) 이 신문은 지역균형선발 학생 두명의 도전과 성공 사례를 들고, 서울대가 이처럼 수능 대신 내신 위주로 지역출신 학생들을 뽑게 된 배경과 과정도 소개한다.(10면)

그러나 이 신문은 자신의 이율배반에 대해 아무 설명이 없다. 역시 무지하거나 뻔뻔해서가 아닐까. 언론이 관점을 수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을 만났을 때 쓰는 가장 전형적인 방법은 ‘개인화’다. 구조의 문제도 개인의 문제로 돌려놓는 것이다. ‘개천에서 용났다’ 따위의 미담 기사를 만나면 꼭 의심해볼 일이다. 개인화된 감동이 어떤 구조적 이율배반을 가리고 있는지.

* 이 글은 <한국방송대학보> 3월2일치 ‘미디어 바로보기’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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