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절은 1년에 한 번씩 돌아온다. 노동절이 올 때마다 나누는 이야기는 거의 비슷하다. 노동절 집회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일 것인가, 과연 행진을 할 것인가, 이에 대한 경찰의 대응 수위는 어느 정도일 것인가, 이번에는 어떤 노동계 거물(?)이 잡혀갈 것인가라는 다소 지엽적인 것들이 대부분이다. 만일 그 이상의 것, 그러니까 조금 더 거창한 얘기를 꺼낸다면 그건 반드시 어떤 한숨이나 한탄과 함께다.

한숨과 한탄이 나올 수밖에 없는 건 ‘노동’이 내몰린 현실의 조건이 날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언론 환경에 국한해서만 봐도 이건 너무나 명확한 사실이다. 우리는 아직도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이 조계사에 몸을 숨겼던 때를 기억한다. 종편은 마치 연쇄살인범을 다루는 양 하며 한상균 위원장의 일거수 일투족을 악의적으로 보도했다. 보수신문은 한상균 위원장의 조계사 피신을 계기로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 민주노총에 대한 악의적 왜곡보도로 지면을 채웠다. 서로 관계가 없는 사실들을 하나로 엮어 노동계 전체에 대한 비난에 동원하는가 하면 아예 없는 일을 거의 만들어내서 민주노총을 악마화 하기도 했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는 민주노총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굴욕’이라고 할 만한 것이었으나 지금까지도 통쾌한 반전 복수극 같은 것을 보여주지는 못하고 있다.

30일 오후 울산시 남구 태화강역에서 열린 126주년 노동절 기념 집회에 참석한 권오길 민주노총 울산본부장(오른쪽)이 권투 장갑을 끼고 노동자 구조조정을 막겠다는 의미로 '구조조정'이라고 적힌 풍선 봉을 펀치로 날리고 있다. (연합뉴스)

자본은 비교적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다. 올 초 대법원의 발레오전장 판결에 대해 보수언론이 환호한 바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보수언론들은 이제 금속노조 산하 지회들이 속속 산별노조의 품을 떠나 기업별노조의 처지로 다시 되돌아갈 것이라며 승리의 나팔을 불어댔다. 동아일보는 거의 한이라도 맺힌 듯 발레오전장의 강기봉 사장과 금속노조를 탈퇴한 노조위원장의 다정한 모습을 보도하며 악질적인(?) 민주노총의 행태를 낱낱이 지적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동아일보는 지난 4월 25일 아예 강기봉 사장의 글을 받아 지면에 배치하기까지 했다. 귀족노조와 싸워 이겼더니 회사도 살고 노동자도 살더라는 감동스토리다.

정권의 제1관심사는 이른바 공급과잉 업종의 구조조정이다. 총선이 끝나자마자 시퍼런 칼을 휘두르고 있다. 새누리당의 공약이었던 ‘한국형 양적완화’를 대통령이 재삼 언급하자 여야는 이걸 갖고 입씨름을 벌이고 있다. 안철수 공동대표의 “양적완화를 대통령이 알기나 하는지…”라는 발언이 정쟁의 대상이 되는가 하면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이 함께 “돈을 찍어서 위기를 극복하려 해서는 안 된다”고 입을 모아 청와대를 비난하는 사태까지 벌어진다.

대통령이 공적자금이나 특별융자 등의 단어를 제쳐놓고 ‘양적완화’라는 단어를 고집하는 건 구조조정에 들어갈 비용을 국민의 세금으로 메꾸는 게 아니라 중앙은행의 발권력을 동원하는 걸로 논란을 비켜가고 싶기 때문이다. 더불어민주당이나 국민의당 입장에서는 좋은 먹잇감이다. 구조조정에 근본적으로 반대하지 않는 입장을 유지하면서도 정권에 반대하는 포지션을 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지난 총선에서 한국형 양적완화가 처음 등장했을 때 야권의 주요인사들이 보인 반응은 그런 식으로 대기업에 특혜를 줘서는 안 된다는 거였다. 즉, 망할 기업은 그냥 망하게 두란 소리다. 그 기업에 인생을 걸고 있는 노동자들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선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언론은 해운이나 조선 업계가 이렇게 된 것에 대한 여러 분석을 내놓고 있다. 해운업의 경우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해운사들이 갖고 있던 배를 팔고 빌려 쓰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고 정부 지원도 미흡해 이런 상황을 맞이했다는 것이며, 조선업의 경우 세계 경제가 침체된 상황에서 해양플랜트 사업에 손을 댔다가 손실을 입은 게 지금 상황의 원인이 됐다는 게 유력한 분석이다. 이 유력한 분석에는 몇 가지 맥락을 덧대줘야 할 필요가 있다. 해운사들이 배를 팔고 용선을 하게 된 원인은 외환위기 이후 뒷감당을 모두 떠맡고 있던 김대중 정부가 해운사들의 부채비율을 일정 이하로 관리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해운업에 대한 지원 정책을 모색했어야 할 해양수산부를 해체한 것은 이명박 정권이다. 이들은 조선업계가 불황의 새로운 활로를 해양플랜트에서 찾도록 부추겼다. 박근혜 정권은 해양플랜트를 신성장동력으로 키우겠다는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관료와 언론은 해운·조선을 필두로 철강, 석유화학 업종 등을 ‘공급과잉업종’으로 부르고 있다. 세계 시장이 늘상 변하니 어떤 업종이든 공급과잉이 될 수도 있고 호황기를 맞을 수도 있으나, 어찌됐건 이 상황의 연원을 찾는다면 박정희 정권의 수출주도성장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이른바 공급과잉 업종에 대한 구조조정은 이미 이때부터도 이른바 안정론자로 분류되는 관료들의 ‘숙원’이었다. 재계와의 힘겨루기 끝에 뜻한 바를 여태까지 이루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이렇게 정리하면 지금까지의 상황을 만든 것은 역대 정권과 재벌이라는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노동자들은 그저 살기 위해 일하고 노조를 결성해 목소리를 냈을 뿐이다. 노동자들 중 해양플랜트 사업 수주에서 미래를 찾자거나 선박을 매각하자는 등의 의사결정에 책임을 갖고 있는 이는 아무도 없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구조조정 과정에서 맨 먼저 희생을 강요당할 수밖에 없다. 정부가 정책적 안전망을 만드는 데 온 역량을 투입하고 기업은 죄송하다며 무릎을 꿇어도 모자랄 일이다. 이 판국에 언론이 앞장서서 하는 일은 법적으로 보장된 단체협상을 진행하고 구조조정에 반대해 상경투쟁을 벌이는 현대중공업 노조를 비난하는 것이다.

비단 구조조정의 문제 뿐만도 아니다. 정부는 그간 십 수차례 공언한대로 노사의 자주적 영역인 단체협약을 죄다 들여다보고 이건 잘됐네 안됐네 하며 실질적인 노조 무력화에 나서고 있다. ‘중규직’이란 말로 대표되는 정규직 노동조건의 하향과 ‘능력 성과 위주 인사시스템’이란 말로 둔갑한 성과급제 도입 등을 마구 밀어 붙이고 있다. 옛날 같았으면 그들이 그렇게도 미워하는 민주노총의 반발로 전쟁을 방불케 하는 사태가 일어났을지도 모를 일이나 대중적 기반이 무너진 상태의 우리 노동운동은 그야말로 무력한 대응만을 반복하고 있다.

이번 총선에서도 ‘노동’은 사라진 채였다. 민주노총 차원에서 총선 대응 논의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서로 합의가 될 리도 없는 현실성이 없는 안이었다. 우려를 내놓지 않은 사람이 없지만 노동운동은 하루가 다르게 고립의 정도가 심해지는 상황에서 매너리즘만을 반복하고 있다. 노동운동이 진보정치에 무관심하게 만든 당사자들인 진보정당의 내부에서도 ‘노동’은 기피 대상이 된지 오래다. 이제 ‘조합원’들은 노조 집행부를 ‘따르는’ 게 아니라 상황과 조건에 맞춰 특정 성향의 집행부를 선택한다. 정권과 자본이 강하게 나올 것 같으면 강경파를, 유연한 협상이 필요할 것 같으면 온건파를 선택하는 것이다. 이제 노동의 정치는 노동조합 내부에서만 돌아간다. 노동정치가 아니라 노동조합 정치다.

고립에서 벗어나려면 그게 뭐든 새로운 것을 해야 한다. 조직화의 대상인 노동의 조건을 다시 규정하고 변화된 시대에 맞는 새로운 전술을 수립해야 한다. 물론 이런 얘기도 처음이 아니다. 진보정치든, 노동정치든, 아니면 노동조합 정치든 근본은 다르지 않다. 대중 속으로, 조직된 것으로부터 조직되지 않은 것으로 뻗어나갈 수 있는 전략이 필요하다. 단지 열심히 하는 걸 넘어서서 시대의 정신을 움켜쥐고 판을 흔들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 방법을 아직 찾지 못한 노동운동을 보며, 또다시 돌아온 우울한 노동절을 실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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