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버버버.”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며 말을 했다. 나는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녀의 남편이 익숙한 듯 그녀의 말을 나에게 전해주었다. 그녀는 지금은 ‘The#’이라는 아파트가 들어서있는 상도2동에 살았었다. 상도동 주민들도 지금의 용산 주민들처럼 강제철거에 맞서 싸웠었고, 당시 대학생이던 나는 상도동 철거민대책위(이하 철대위)에 적극적으로 연대하고 있었다.

2002년 겨울이었다. 상도동에도 예의 그 골리앗이라고 부르는 파란 가건물이 가분수처럼 삐죽 솟아올랐다. 나와 내 친구들은 그 골리앗을 쌓는 일을 함께 도왔다. 이 골리앗이 철거깡패로부터, 그리고 그들을 비호하는 경찰들로부터 우리를 지켜주길 기원하며 고사도 지냈었다. 겉으로 보기엔 괴상하기 짝이 없는 모양이었지만, 꼭대기에 올라가기 위해서는 가파른 사다리를 타고 가야 해서 살짝 무섭기는 했지만, 그 안에서 망을 본다는 핑계로 저 멀리 우중충한 서울하늘을 바라보며 수다를 떨고 있노라면 역설적이게도 무척 포근한 기분이 들었다.

▲ 상도동 철거 당시의 골리앗
철거깡패들의 도발이 잦아들게 되자 우리는 더욱 자주 그곳에서 밤을 새웠다. 낮에는 지역의 청소년들과 함께 공부방을 진행하고 어둠이 세상을 뒤덮은 시간에는 돌아가면서 망을 봤다. 몇 차례 깡패들과 싸움도 있었다. 돌멩이를 던지고 화염병이 날아 다니고 화장실에서 건져 올린 똥물까지도 우리가 뒤집어쓰면서도 깡패들을 저지하기 위해서 던졌다. 몇몇은 크게 다쳤고 몇몇은 깡패들에게 혹은 경찰에게 붙잡혀갔다. 철거반원 중에 몇 명도 우리 쪽에 잡혀왔었다. 공포심으로 가득 차 말조차 더듬던 그 철거반원들은 무슨 일인지도 잘 모르고 고용되어 온 일용직들이었다.

아마 그 때쯤이었을 것이다.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진지하게 고민하면서 비폭력적인 삶의 방식들을 접하고 있던 나는 과격한 철거민 투쟁에 어느 정도 회의감을 느끼고 있었다. 혹은 두려움이라고 해도 상관없다. 철거민들이 학생들에게 바라는 것들이 너무 부담스럽게 느껴졌고, 나는 후배들에게 함께 철거촌에 가자는 말을 아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렇게 나도 점점 멀어져갔다.

결국 상도2동 골리앗은 무너지고 많은 사람들이 구속되었다. 당시 철대위 위원장의 부인이었던 그녀는 그때의 충격으로 쓰려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다행히도 건강은 회복했지만, 사라진 것은 골리앗과 삶의 터전 뿐 만이 아니었다. 그곳에서 일궈온 소중한 일상과 관계들이 송두리째 사라졌고 그녀의 말도 돌아오지 않았던 것이다. 먼발치에서 그저 미안한 마음으로 상도동의 철거를 바라보고만 있었던 나를 다시 만났을 때 상도동 주민들은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언젠가는 다시 만나보고 싶었지만, 이런 자리에서 이렇게 만나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병역거부운동으로 뛰어든 나는 더 이상 철거촌에 가는 일이 없었다. 어쩌다 집회에서 그 당시의 분들을 만나면 반갑게 인사를 나누기는 했지만 어디 철거촌에서 강제철거가 들어왔다더라 하는 소식을 접해도 마음만 안타까울 뿐 움직이지 않았다.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딱히 철거민 운동에 연결되어 있는 관계가 없었기도 했지만, 철거민들의 과격한 방식이 더 이상 나와는 맞지 않다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난쏘공의 작가 조세희 선생님은 전용철 홍덕표 농민이 돌아가셨던 현장 근처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며, 그 때 농민들이 죽고 당신이 살아있었던 것은 순전히 운이었다고 이야기했다. 용산의 끔찍한 학살을 보면서 그분들이 죽고 내가 살아있는 것 또한 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 상도동의 골리앗 안에서 내가 있을 때, 경찰이 이번처럼 초강경진압을 했었더라면, 용산철대위 분들 대신에 상도동 철대위분들과 나와 나의 친구들이 죽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것은 내가 가자지구에서 태어나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아주 사소한 운에 기인한 것이다. 어쩌면 가자지구와 용산에서 나 대신 죽은 사람들 덕분에 나는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이 모든 학살의 피해자들이 단지 운이 없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분명 이것은 우발적인 사고가 아니라 이미 예견된 학살이다. 한겨울 갈 곳 없는 철거민들을 사정없이 몰아붙이는 건설회사와 철거깡패와 경찰이 아니었다면, 아니 그 이전에 땅투기로 한몫 챙기려는 사람들과 이에 영합하는 정책을 펼쳐온 정부가 아니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죽어가는 이들은 땅에서 쫓겨나 하늘 근처 달동네에 살다가 그마저도 하늘과 친해지는 것을 시샘하는 부자들에 의해 집을 빼앗기는 가난뱅이들이다. 이미 너른 대지를 다 가졌으면서 가난한 사람들이 하늘 가까운 곳에서 달님과 별님을 벗삼아 사는 꼴을 못봐주고 동네를 철거한 후 바벨탑과도 같은 저 눈부신 주상복합으로 돈놀이하는 사람들은 절대 불에 타 죽을 일이 없다. 지독한 인과관계 속에서 다만 죽을 수도 있는 사람들끼리 서로의 운에 따라 유명을 달리하는 것이다.

역시나 철거민들의 죽음을 조롱하는 사람들도 있다. 도심테러의 성격이 있었다며 경찰특공대 투입의 정당성을 이야기하는 한나라당의 국회의원들과 이번 기회로 불법폭력집회가 근절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청와대, 그리고 이 모든 책임을 전국철거민연합에 돌리려고 하는 보수언론이 그들이다. 그들에게 애당초 상식을 기대하지는 않았다. 인간에 대한 예의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다는 것을 이미 알 만큼 알았고 인간으로서의 수치심마저 져버렸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다만 그들이 짊어져야 하는 수치심까지 함께 짊어지고 가야 하는, 그래서 저들과 같은 인간이라는 부끄러운 사실을 아프게 인정해야 하는 힘없는 사람들의 숙명이 서글플 뿐이다.

철거민들의 폭력과 배후세력으로 전철연을 물고늘어지는 저들의 논리는 어쩌면 한치의 예상도 벗어나지 않는다. 인간에 대한 성찰과 반성이 없기에 상상력이 고갈된 자들의 당연한 논리적 귀결인가 보다. 하지만 적어도 최소한의 논리적인 완결성이라도 가지고자 한다면, 철거민들의 폭력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한국사회가 약자들에게 가하는 구조적인 폭력을 이야기해야만 한다. 약자들이 사용하는 저항폭력이 언제나 옹호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국가폭력과 같은 차원에서 비교한다거나, 혹은 약자들을 폭력으로 내몰고 있는 구조적 폭력에 대해서 눈감아 버리는 것은 가장 손쉽게 진실을 왜곡하는 것이다.

물론 이번 경찰의 초강경진압으로 끔찍한 참사가 벌어져 순식간에 여섯 목숨이 세상을 떠났고 이 또한 묵과할 수 없는 문제지만, 가난한 사람들을 계속 벼랑 끝으로 몰아가는 주택정책은 수많은 철거민들을 조용히 서서히 죽여가고 있다. 이명박 정권이 살인정권인 이유는 이번 경찰폭력으로 인한 학살 때문만이 아니라 서서히 천천히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의 숨통을 조여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비판 없이 철거민들의 폭력시위를 부각시키는 것은, 마치 이스라엘의 고립장벽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이 공정한 척하며 이스라엘의 학살과 팔레스타인의 로켓포를 함께 비판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아마도 다섯 분의 철거민과 한 명의 경찰관이 죽은 자리는 골리앗보다 훨씬 높은 빌딩이 들어설 것이다. 나는 그 빌딩을 상상만 해도 숨이 딱 막힌다. 그것은 그 높고 넓을 빌딩이 한조각의 하늘을 가리기 때문이 아니다. 사람들의 피와 죽음으로 세워진 욕망의 마천루. 땅덩어리를 모두 다 차지한 것으로 모자라 하늘마저 독점하고 싶어하는 천박한 부자들의 욕심. 과연 세상이 이런 방식으로 지속될 수 있을까? 과연 수치심을 망각한 인간이 사회를 이루며 살아갈 수 있을까? 나는 용산을 지날 때면 다시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지 않겠다. 높은 빌딩의 눈부신 유리창 저 밑에 묻혀있는 철거민들의 피와 뼈, 그리고 사라진 동네와 삶을 기억한다면 내 눈길이 향하는 곳은 높은 곳일 수 없다. 그리고 이렇게 부끄러운 일을 자행한 자들과 내가 같은 종의 인간이라는 수치심이 떠오르는 장소에서 빳빳히 고개 들어 하늘을 바라볼 정도로 뻔뻔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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