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일,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되는 일들이 벌어진다. 미네르바 구속, 여교사 성희롱한 교장의 연구관 승진과 체험학습 동의한 교장의 정직, '방송독립' 외쳤다고 파면·해임·정직·감봉하는 KBS, 4명 중 3명보다 더 많은 표를 얻은 보도국장 후보가 탈락하는 YTN….불과 열흘 사이 한국사회는 전 세계인의 조롱거리가 되고 있다. 그런데 또 동트는 새벽에 철거민과 철거민을 철거하던 경찰까지 죽음을 당한다. 2009년 오늘의 사건인지 아니면 1970년 박정희 군사독재정권 시절의 사건인지, 내용만 보면 분간이 안된다.

어이없다. 정말 어이없는 세상이다. ‘반동의 시대,’ ‘시대의 반동’이 횡행한다. 박정희 정권부터 시작된 ‘계고장’과 ‘철거민과 철거반원의 죽음’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독재정권에서 나발거리던 기성언론이 지금 조중동이라는 이름으로 또 나발댄다.

경찰은 부인하고 있지만, 목격자들은 “경찰이 용접기와 쇠파이프를 들고 진압했다”고 전한다. 철거민 5명이 죽었다. 철거민을 ‘철거’하던 경찰도 1명 죽었다고 한다. 경찰특공대가 투입되었다. 김석기 경찰청장 내정자가 승인했다. 청와대는 경찰 진압 과정에서 6명이 숨진 사태와 관련, “과격 시위와 강경 진압의 악순환을 끊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 경찰이 20일 새벽 용산구 한강로2가 한강대로변 재개발지역 4층짜리 건물에서 농성중이던 철거민들에 대해 강제진압에 나섰다. 경찰이 컨테이너를 옥상으로 끌어올려 시너통이 가득한 망루를 철거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철거민과 경찰 6명이 사망했다. ⓒ민중의소리

왜 과격시위가 일어나는가? 그 원인에 대해서 따져 본 적이 있는가? 오로지 편의적으로, 다른 단체들이 결합해서 ‘연대투쟁’할까봐 강경 진압했다고 한다. 연대투쟁이 무서우면 생존대책을 마련하는 것이 우선일 터. 철거민들이 농성한 이유는 단 하나, ‘당국과 대화하자’는 것이었다. 그들은 외면했고, 철거민과 경찰은 죽어야 했다.

그들은 역사로부터 결코 배우지 않는다.

1977년 4월 20일 오후 3시경, 무등산 중턱 증심사 계곡 덕산골에서 무허가 건물을 철거하러 갔던 당시 광주시 동구청 소속 철거반원 일곱 명 중 네 명이 살해당한다. 자신의 집이 강제로 철거되고 불에 타자 격분한 박흥숙(당시 21세, 남)이라는 청년이 쇠망치로 살해한 것이다. 그리고 3년 뒤인 1980년 12월 24일, 박흥숙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뜬금없이 왜 30여 년 전의 ‘사건’을 들추겠는가? 그의 최후진술을 말하기 위함이다.

“사랑하는 부모 사랑하는 자식, 사랑하는 형제를 잃고 애통해하는 유가족들의 모습이 자나 깨나 눈앞에 어른거려 날이 갈수록 괴롭고 괴롭다. 나의 죄는 백 번 죽어도 사죄할 길이 없다. 나 같은 기형아가 다시는 이 땅에 발붙이지 못하도록 어떤 극형을 주시더라도 달게 받겠다”

스스로 변호사에게 ‘사형선고’를 요청하면서 참회했던 박흥숙. 초등학교 졸업, 중학교 입학시험에 수석합격했으나 교복 살 돈이 없어 포기, 검정고시로 중학과정을 통과하고 산 중 움막촌에서 사법시험 준비. 공부하면서 당시 유행하던 이소룡의 쌍절곤으로 체력단련하던 청년. 철거반원들이 불을 질러 집을 태우자 격분하여 살인을 저질렀던 박흥숙. 그의 최후진술 중 또 다른 한 대목이 아려온다.

“당국에서는 아무런 대책도 없으면서도 그 추운 겨울에 꼬박꼬박 계고장을 내어 이에 응하지 않았다고 마을사람들을 개 취급했고, 집을 부숴버리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당장 올데갈데없는 우리들에게 불까지 질러, 돈이나 천장에 꽂아두었던 봄에 뿌릴 씨앗 등이 깡그리 타버리고 말았다. 하물며 당국에서까지 이처럼 천대와 멸시를 받아야 하는 우리들에게 누가 달갑게 방 한 칸 내줄 수 있겠는가?

옛말에도 있듯이 태산은 한 줌의 흙도 거부하지 않았으며, 대하 또한 한 방울의 물도 거부하지 않았다고 하지 않는가? 세상에 돈 많고 부유한 사람만이 이 나라의 국민이고, 죄 없이 가난에 떨어야 하는 살들은 모두가 이 나라의 국민이 아니란 말인가?”

도시빈민. 그 때도 도시빈민은 국민이 아니었다. 수출을 위해선 저임금정책이 필요했고, 저임금을 유지하기 위해 저곡가 정책을 강행했던 박정희 정권. 농촌은 저곡가 정책으로 몰락하고 농민들은 도시로 나올 수밖에 없었던 시절. 새마을운동 초기 10년 간 농가부채는 21배가 늘었던 당시, 박흥숙도 전남 영광군 군서면에서 초등학교 5학년 때 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할머니·어머니·여동생 등과 함께 광주로 나왔으나 오갈 데 없어 산 속 움막촌에 자리 잡았던 것. 철공소 점원 열쇠수리공으로 생계를 꾸리며 사법시험을 준비했던 도시 빈민 박흥숙.

그를 향해 당시 언론들은 ‘평소 뒤틀린 영웅심리 잠재해 있었을 것, 이소룡에 지지 않는다고 범인 제 자랑, 독기 품은 얼굴에 잔인한 미소가, 무등산 타잔 칼던지기 등 18기 능숙’이라며 뒤틀린 영웅주의에 사로잡힌 잔인한 청년의 난동으로 이 사건을 보도했다.

아무런 대책 없이 철거와 방화를 지시한 당국에 대한 그 어떤 비판도 없었다. 박흥숙에 살해당한 철거반원들은 일당을 받고 시에 고용된 사람으로, 어느 유가족의 증언으로는 “무등산이 국립공원이 됐으니까 대통령이 시찰을 온다는 것 같았어요. 그러니까 아랫사람들은 거길 철거해야 되지 않냐 해서 명령이 떨어진 것 같아요.”

아주 오래 전 이야기다. 30년도 더 된 이야기다. 하지만 독재정권에서나 있었던 옛일이 아니라 오늘 당장의 사건인 바, 이 참사 앞에서 우리는 또 다시 그 때 그 시절의 단어들을 발견한다. ‘계고장,’ ‘이주 대책 없이 추운 겨울에 강제 철거,’ ‘죽음’ 그리고 조중동을 비롯한 보수언론….

철거민과 철거반원, 빠질 수 없는 ‘계고장.’ 다음과 네이버에 각각 ‘계고장’으로 검색해봤다. 기가 막힌다. 사전적 의미로는 ‘행정상의 의무 이행을 재촉하는 내용을 담은 문서’로 설명하는 이들 포털에서, ‘계고장’의 예문이 나온다. 똑 같은 예문이다. 그것도 철거민에 관한 이야기다. 섬뜩하다.

“계고장이 나오기 얼마 전에도 철거가 곧 된다는 말은 있었지만 막상 계고장이 날아들자 동네는 술렁거리기 시작했다.”(출처 : 황석영 저, <어둠의 자식들>)

<참고자료>
정길화 김환균 외, <우리들의 현대침묵사>-"불행했던 도시빈민의 역사, 무등산 타잔"(김동철), 해냄출판사,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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