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자꾸만 묻는다. ‘이제 과연 안전해졌나요?’ 전혀 그렇지 않다는 징후는 곳곳에서 감지된다. 우리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다시 외친다. “안전한 대한민국을 만들어요!”

2014년은 가히 ‘사고의 해’라 할만 했다. 연초부터 경주에서 마우나리조트 강당이 무너졌다. 석연찮은 이유로 세월호가 침몰했다. 전남 장성의 요양병원에서 불이 났다. 고양 종합터미널에서도 불이 났다. 판교 테크노벨리 야외공연장에서 환풍구가 붕괴했다. 담양의 펜션 바비큐장에서 불이 났다. 그냥 생각나는 것만 해도 이 정도다. 큰 사고가 일어나기 전에 반드시 작은 사고들이 연이어 일어난다는 ‘하인리히의 법칙’이 널리 회자됐으나, 2015년에도 그 ‘작은 사고’들은 계속됐다.

박근혜 대통령이 고심 끝에 해경을 해체하고 국민안전처를 만들었지만, 세월호 참사 이후 2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우리는 안녕하지 못하고 불안에 떤다. 도대체 박근혜 대통령이 무엇을 더 해야 했을까? 이건 바보 같은 질문이다. 실상 우리는 박근혜 정권이 사실상 세월호 사고의 재발을 막기 위한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았다는 걸 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체제를 사고하는 하나의 ‘직관’이 작용한 결과다.

박근혜 정권은 왜 ‘생색’을 내는 것 말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가? 우리는 답을 이미 알고 있다. 정권은 대형 사고의 재발 방지를 포기하였다. 사고는 그냥 일어나는 것인데, 사람의 힘으로 그걸 어찌 막는가? ‘세월호 참사는 교통사고’라는 발언은 이 얘기를 하는 것이다.

이 와중에 유가족들의 태도는 참으로 현명하였다. 지금은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이라는 요구가 무슨 음모론처럼 취급되고 있으나, 당시 유가족들은 진상규명 요구를 왜 하는지 스스로 분명히 했다. 이런 비극적인 사고는 다시 일어나선 안 되고, 그러기 위해서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런 사고가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것인지를 철저히 밝혀야 한다는 거다.

세월호 참사는 왜 일어났는가? 아직도 남은 의문들이 있지만 결국 이는 체제의 문제를 떠나서 생각할 수 없다. 다시 말하자면 세월호 참사는 단지 안전에 대한 대책 이상을 고민해야 한다는 점을 드러낸다. 세월호가 침몰한 것은 기본적인 어떤 안전장치들이 갖춰지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다. 하도록 되어있는 것만 충실히 했어도 사고는 ‘참사’로까지 확대될 수 없었다.

최근 일어난 공무원시험 준비생의 서울청사 침입 사건은 비극의 정도로 따지자면 비교할 수 없는 일이었으나 적어도 ‘원인’의 측면에선 세월호 참사와 궤를 같이 했다. 정부청사에 나름의 보안장치들이 없었던 게 아니다. 단지 정문에서는 정확하게 판별하는 공무원증을 예산이나 인력의 문제로 다른 통로에서 육안으로 확인하도록 했을 따름이며, 역시 예산과 편의의 문제로 체력단련실 라커를 자물쇠가 없는 종류로 설치했던 것뿐이고, 사무실 청소를 용이하도록 하기 위해 마치 자물쇠 옆에 열쇠를 걸어 놓듯 전자 도어락 비밀번호를 벽면에 적어 놓았을 뿐이다. 공무원들이 컴퓨터의 비밀번호를 설정하지 않거나 모니터 옆에 적어둔 이유도 마찬가지다.

원칙을 다 정해 놓고도 그걸 구색 맞추기 정도로나 사고하는 건 우리의 뿌리 깊은 생활양식이다. 아마도 이런 방식의 효용에 대한 신뢰는 시대를 거치면서 계속 강화되어 왔을 것이다. 이를테면 박정희 정권은 선거나 의회 등 민주국가를 참칭할 수 있는 요소들을 그럴듯하게 갖춰 놓았으나 그것들의 권능은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 모든 부질없는 원칙들은 성장의 과실을 키워 굶주림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당위 앞에 설 자리를 잃었다. 언제나 효율성에 대한 갈구는 원칙에 대한 믿음을 압도하였다. 이 정도면 가히 ‘효율성의 신화’라 할만하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이른바 ‘신자유주의의 시대’를 거치면서 통치의 패러다임은 완전히 달라졌으나 효율성의 신화는 오히려 더 기세가 등등해졌다. 한때는 ‘안정화론자’로 불렸던 신자유주의자들의 오랜 믿음은 특정 산업에 대한 중복 과잉 투자가 장기적으로 생산성에 악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즉, 이들이 사회의 모든 요소를 ‘시장원리’에 맡겨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게 효율을 더 증대시킨다고 믿기 때문이다. 국가는 ‘비효율’의 상징과 같은 존재가 됐고, 언젠가는 세상만사를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던 권력의 중추는 자신감을 잃었다.

이제 효율성을 위해 국가가 자신의 권한을 시장으로 내던지는 아이러니한 일이 일상이 됐다. 2012년의 수난구호법 개정은 인명 구조를 위한 임무를 민간에 위탁하자는 게 핵심이다. 정부는 이 법의 개정을 통해 “구조를 위해 필요한 장비들을 구비하고 관리하기 위한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뒤집어 얘기하면 이제 구조를 위해 필요한 장비들을 구비하고 관리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비효율적이기 때문이다. 해경이 해야 할 일은 인명 구조가 아니라 중국 어선을 먼 바다로 밀어내고 때때로 그들이 휘두르는 무자비한 폭력을 감내하는 것 정도다.

아직도 단골메뉴처럼 언급되는 의문은 침몰 이후 상당 시간 동안 왜 당국이 실종자 구조를 위해 인력을 투입하지 않고 침몰한 세월호를 내버려 두었느냐는 것이다. 이것에도 역시 어떤 음모론이 제기되고 있으나 위와 같은 맥락으로 합리적으로 생각하자면 결론은 그냥 뻔한 얘기다. 언론은 ‘에어포켓’이니 하는 말로 세상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려 했으나 당국의 체제적 상식으로 보았을 때 실종자가 생존해있을 확률은 사실상 없었고, 이를 위해 인력을 투입하는 것은 역시 비효율적인 일로 여겨졌을 것이다. 그러니 체제의 논리에서 벗어날 수 없는 관료들의 입장에선 실종자의 구조가 아니라 인양업체를 잘 선정하고 책임소재나 보상과 같은 문제를 가장 세금이 적게 투입되는 방식으로 해결하기 위한 방법을 찾는 게 더 우선일 수밖에 없다.

‘재발방지를 위한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유가족들과 그들을 지지하는 시민들이 나서지 않았더라면, 그저 사람이 죽었을 뿐 세월호 참사를 둘러싼 국가와 시장의 어떤 효율은 무섭도록 냉혹하게 그 위력을 발휘했을 것이다. 우리의 기억 속에서 세월호 참사는 망각됐을 것이고, 관련자들에게 지급된 약간의 보험금과 구상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해 구멍 난 국고만이 장부상의 숫자로 남았을 것이다.

즉, 만일 누군가 아직도 세월호 참사를 둘러싼 싸움을 말하려 한다면, 그 싸움은 ‘사람이 죽었을 뿐인 늘 있어왔던 사고’를 ‘사람이 죽은 참사’로 바꾸는 것이 될 수밖에 없음을 직시해야 한다는 말이다. ‘세월호 참사를 기억한다는 것’은 효율보다 사람의 목숨이 먼저인 시대를 만들자는 것이며, 이것은 ‘안전’의 문제라기보다는 차라리 ‘정치’의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 기득권이 세월호 참사의 진상을 규명하자는 말에 그토록 격렬한 반감을 드러내는 것은 이를 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이에 걸맞은 대답을 돌려줘야 한다. 우리 손에 쥐어진 최후의 권력, 저항의 권리를 행사함으로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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